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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8호] 추모예배 설교 - “옳고 그름을!” / 문동환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7 13:42
조회
1143

[제18호] 장공 27주기 추모예배 설교

“옳고 그름을!”
(사 1:10-17, 막 11:15-19)

문동환 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기독교교육학)


시작하는 말

내가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살 때이다. 그가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오시어 성서를 가르치셨다. 그는 퍽 얌전한 분으로 보였다. 학생들은 그를 천지(天地) 선생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을 보시지 않고 천정과 방바닥만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보석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특히 그의 가르침의 세 가지가 지금도 내 귀에 둘리는 듯하다.

하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Believe, Trust, Obey’라는 세 단어로 말씀해주신 것이다. ‘Believe’란 “그가 길이로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Trust’란 그의 성실한 사랑의 삶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Obey’란 그의 제자로 성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은, 칼빈의 물질에 대한 가르침인데 거기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하신 것이다. 칼빈은 “열심히 일하고”, “부를 축적하고”, “선하게 사용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자가 되면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본주의는 그릇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세 번째 기억은, 참된 제자의 삶이란 옳고 그른 것을 명확히 보고 옳은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해방 후 한신대학에 다닐 때에도 그는 옳고 그른 것을 명확히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가 이렇게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보고 행동하라고 강조하신 것은 틀림 없이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의 영향을 받으신 것이라 보인다. 이사야 5장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아, 너희는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아, 너희는 비참하게 되리라.
술이 센 자들아!
독한 술을 잘 빚는 자들아!
뇌물에 눈이 어두워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 있다 하는 자들아!
지푸라기가 불길에 휩쓸리듯
검불이 불꽃에 스러지듯
너희 뿌리는 썩고 꽃잎은 먼지처럼 흩날리리라.
만군의 야훼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사 5:20-24).

이렇게 옳고 그름이 뒤범벅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야훼께 드리는 성전 제사를 여지없이 혹평을 했다.

무엇하려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과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사 1:11-14).

그들의 성전 제사가 말할 수 없이 패악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 예배에 구역질이 난다는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을 완전히 전도했다는 것이다. 왜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성전 제사를 혹평하셨는가? 야훼께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말이다.

[샤갈, <The Prophesy of Isaiah>(1969)]

1. 전도된 다윗 왕 전통

그는 다윗 왕 전통이 완전히 야훼의 뜻에 역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이 된 것부터가 야훼의 뜻에 역행한 것이다. 야훼는 출애굽 공동체에게 왕을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다. 당시의 왕들이란 다 수호신을 모시고 그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탐욕, 권세욕, 그리고 명에욕을 추구하려고 악행을 자행했다. 하비루들이 이집트 바로왕 밑에서 각가지 수난을 겪은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그래서 출애굽공동체는 300여 년 동안 왕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싸움 잘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공략한 뒤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을 가지지 말라고 엄하게 지시한 야훼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자신의 뜻을 수행하는 우상의 자리로 끌어내린 것이다. 야훼의 이름으로 각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성전을 지었다. 거기에 야훼를 모셨다 하고 야훼가 자기를 사랑하는 아들로 삼아 자기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이룩해 주신다고 하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면서 백성들로 야훼께 제사를 드리라고 명했다. 그리하면 야훼가 그들을 선민으로 삼아 축복을 하실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진 짐승들을 제물로 성전에 제사를 드렸다. 성전은 이런 음흉한 조작에 따라서 태어난 것이다.

야훼가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다. 야훼가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공동체다.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안심하고 사는 세상이다. 다윗은 그 시초부터 그릇된 짓을 옳다고 말하고 옳은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왕조는 선과 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 패악한 문화에 동조하여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성전 예배를 향하여 그렇게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농촌의 예언자 미가의 선포는 더 혹독한 언어로 다윗 왕조의 문화를 질책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은 들어라.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은 들어라.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 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미2:1~3).

이렇게 질타한 미가는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미3:12).

이런 혹독한 질타에도 다윗 왕조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을 한다고는 했으나 그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오도된 성전 예배만을 강조하고 정의는 외면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도 성전 문을 가로 막고 외쳤다.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렘7:4)”라는 헛된 말을 믿지 말고, 과부, 고아, 떠돌이들을 돌보라고 호소했다. 행실을 고치라는 것이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나가서는 악행을 계속했다.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했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결국 저들은 망하고 만다. 힘을 추구한 자들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당시 다윗 왕조 수호자들은 이것을 질투하시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라도 회개하고 야훼만을 섬기고 이방인들과 섞이지 않으면 다윗 왕 후손에서 메시아를 보내주시어 시온산을 모든 묏뿌리 위에 드높게 하실 것이요 이방 나라들이 그 밑에 와서 살길을 배울 것이라고 믿었다. 다윗왕조 자체가 문제의 뿌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문제를 그렇게 명확히 보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고 외친 예언자들의 말들은 다 허사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강자들이 조작한 문화를 깨뜨리고 생명문화를 창출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풀어야 할 마지막 과제였다.

2. 갈릴래아 청년 예수와 김재준

예수님은 일찍부터 이 패악한 전통으로 말미암아 아우성을 치는 갈릴래아의 오클로스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셨다. 무엇이 삶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지 이를 극복하고 새 내일을 창출하는 길이 무엇인지 구하고 찾았다. 그리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야훼 하느님과 기화하셨다. 그리고 깨달으셨다. 문제는 야훼의 이름까지 오용하는 탐욕과 권세욕에 사로잡힌 다윗 왕조의 문화라고 보셨다. 따라서 이를 물리치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 해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회개하라고 말이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서라고 외치기만 해서는 새 내일이 창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예언자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외치기만 하지 말고 나가서 그런 공동체 창출에 나서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가셨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헤매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그곳에 있는 떠돌이들과 더불어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에덴동산을 창출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생명의 길을 밝혀주셨다.

김재준 목사님도 그런 분이시었다. 그는 허위에 가득 찬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교회를 투명한 그의 글로 규탄하셨다. 우리는 것을 그의『낙수』라는 책에서 읽는다. 그러시다가 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지 행동으로 새 길을 창출해야 한다고 깨달으셨다. 강자의 문화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 새로운 진리의 공동체를 창출해야 한다고 믿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원을 창출하셨다. 북에서 내려온 보수파들이 한데 엉켜서 그를 이단으로 몰았으나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치적인 송창근 박사는 적당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믿으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소신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셨다.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다. 내가 그 성명서를 등사했기에 그 과정을 잘 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단으로 몰려났다. 동시에 기독교장로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성이 있는 신학자들 중에 그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가 없다.

[김재준, <낙수>(1941) 표지]

박정희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뒤에도 그는 삶으로 새 내일 창출에 앞장을 서시었다. 박정희가 그를 학원에서 내쫓자 그는 박정희 타도에 앞장을 서시었고, 기장이 그 뒤를 쫓아 이 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을 했다. 옳고 그른 것을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새 내일 창출을 위해 몸을 던지시었다.

맺는 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명확히 보아야 할 옳고 그름, 그것은 무엇인가? 지난 주 한겨레신문에 놀라운 통계가 보도되었다. 다보스 회의의 발표에 따르면 거부 85명의 재산이 세계 총 재산의 1/2 이란다. 세계 인구의 1%가 되는 거부들의 재산이 밑바닥 세게 인구의 반의 자산보다 65배나 된다는 것이다. 하루에 1달러로 사는 자가 70억 인구의 반인 35억이나 된다. 이런 격차는 날로 늘어만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산업문화라는 괴물이다.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자멸할 때까지 지속한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이것이 패망의 길이라고 외치고만 있을 것인가? 김재준 목사님이 지금 계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어떻게 행동을 하실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김재준 목사를 경외하는 우리는 새 내일 창출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아니라고 아우성을 치는 무리들과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리하면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영과 김재준 목사님의 영이 우리와 같이 하실 것이다.

[2014년 1월 27일, 장공 김재준 목사 27주기 추모예배에서 문동환 목사의 설교말씀을 대독하는 김상근 목사]

[기도하는 배태진 목사]

[성북교회 성가대의 특송]

[축도하는 김수배 목사]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8호] 2014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