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김재준, 현대사의 호랑이를 키워낸 자유혼" - 조현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9-21 11:14
조회
369

현대사의 호랑이를 키워낸 자유혼
김재준(1901~1987)


서울 강북구 수유리 도봉산 아래에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다.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의 지령이 깃들어서인가. 몇 발자국 밖은 소란한 도시인데 캠퍼스는 깊은 산의 수도원 같다.


김경재 명예교수도 1959년 이 학교에 입학해 장공을 만났다. 그가 말하길 장공은 칠판에 어려운 한시를 거침없이 쓸 만큼 동서양의 학문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는 특정 학파와 이론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언제나 가슴을 툭 트이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혼이 되는 것이구나!”


김경재는 그렇게 깨달은 날부터 장공을 ‘사부’로 모셨다. 그에 앞서 이미 20년 전부터 장공을 삶의 스승으로 모신 이들이 있었으니 장준하, 문익환, 안병무, 강원용, 이우정, 김관석 등이었다. 그런 새끼호랑이들이 깃들만한 품이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20대 초반까지도 장공은 고향 군청에서 말단직원으로 일했던 시골 청년이었다.


장공은 시대의 이단자였던 함석헌, 이용도가 태어난 1901년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창동이다. 바로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창동은 분지로 둘러싸여 있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늘과 푸른 능선뿐인 시골이었다. 그의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농사일도 하는 전형적인 시골 선비였다. 어머니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장공은 다섯 살 때부터 부친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아홉 살 때까지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통독하고 신학문을 접했다.


시골 백면서생의 상경길


그는 사립 향동학교를 2년 다니고 열두 살 때 보통학교를 거쳐 13~16세 때는 회령간이농업학교에 다녔다. 학창시절에는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하지만 그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업을 마친 장공은 16세에 회령군청 재무부 직세과에 근무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8세 때는 부모가 짝지어준 처녀와 혼인했고, 웅기 금융조압으로 직장을 옮겨 월급을 받아 가족을 먹여 살리는 평범한 백면서생으로 살았다.


그런 장공을 깨워 새 삶을 살게 한 이가 동향 선배 송창근 목사였다. 훗날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는 장공의 교육관은 바로 자신을 발굴해 새로운 기회를 갖게 해준 송창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송창근은 웅기에서 5리 떨어진 웅상 출신으로 일찍이 성재 이동휘 선생을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민족에 눈을 뜬 엘리트였다. 그는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3ㆍ1운동에 가담해 6개월간 옥살이를 한 후 잠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그곳에 묻혀 있던 장공을 발견했다. 그는 장공에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이 시골 구석에서 서기나 하면서 평생 살 것이냐”며 상경을 권유했다. 이에 자극받은 장공은 부인에게 알리지 않은 채 상경했다.


시골 백면서생의 상경길은 고생이었다. 웅기 금융조합에서 퇴직할 때 모아둔 몇 푼도 얼마 안 가 바닥이 나자 그는 내복조차 없이 한겨울을 나야 했고, 결국 하숙비가 밀려 이부자리도 떼인 채 거리로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시골의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학력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서울 유학 3년 동안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진행하는 일요강좌를 들으며 학구열을 채웠고 틈나는 대로 신학문과 신문물을 접했다. 이곳에서 영어전수과 3년 과정을 1년간 다니면서 영어를 귀동냥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장공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어려서부터 공자ㆍ맹자를 익힌 선비가 종교 체험 후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장공은 승동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서울시내 장로교회 연합사경회에서 당대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중생 체험’을 했다. 사경회 마지막 날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창세기 1장 1절로 설교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오.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오!”


유가적 선비답게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장공이기에 평소 같으면 비논리적으로 들릴 부흥사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 사자’ 김익두 목사의 인도를 접하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옳다! 나도 믿겠다!”


장공은 그렇게 결단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게 들렸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고 했다.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그의 체험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를 주로서 고백할 수 없다”는 바울의 은혜 체험이기도 했다.


이는 이성을 초월한 영적 변이였으며 뜨거운 가슴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냉철한 머리를 내버리지 않았다. 샤머니즘을 비판하던 이가 종교적 체험을 경험한 후로 기독교적 샤머니즘으로 회귀해 반이성적ㆍ반지성적ㆍ반합리적 정열주의로 치닫거나 도그마에 갇혀 세상과도 단절하고, 같은 교파 내에서도 스스로 교통을 차단하는 일이 있는데, 장공의 신앙은 그런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3년 동안 서울에서 고학을 하는 연단과정을 거쳐 평생 열 가지 삶의 신조로 정해 실천했다. 철저히 이성을 바탕으로 한 삶의 교훈이었다.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자


평생 흔들리지 않을 영적 체험을 했음에도 장공은 자신의 도그마를 완전히 해체할 자유주의 신학에 몸담기로 한다. 고향으로 내려가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24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그것은 미국의 유니언 신학교의 영향을 받아 개인의 자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사회주의 사상까지 마음껏 논의되는 자유혼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어도 몸은 여전히 고달픈 유학생의 신분이었다. 단돈 5원 50전으로 떠났던 무모한 유학생 장공은 송창근의 기숙사에 숨어 살며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 공부했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스팀 하나 없는 다다미방에서 헌 외투 하나로만 버티며 공부했는데, 일본인도 놀랄만한 영어실력을 갖추어 3년 뒤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장공이 일본에서 3년, 이어 미국에서 4년간 눈물 젖은 빵을 먹어가면서 본토 학생들이 놀랄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지만, 더욱 특별한 것은 그가 당시에 미국에서도 보수 신학의 총본산인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해 근본주의 신학의 총사 그레셤 매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강의를 주로 들었다는 점이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문을 접했던 그였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애초부터 한쪽은 배제하고 한쪽만을 배웠던 것과 달리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신학을 골고루 접한 그의 열린 자세는 감히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태도였다. 태생적으로 도그마를 지닌 종교의 세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양극단의 학문을 경험한 그였기에 과연 어떤 쪽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공이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려 하자 한국에 있는 한 선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귀국에서 일을 해야 할 텐데 그의 신학노선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근본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를 물은 것이다. 이에 장공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에 박을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


귀국 후 장공은 죽어가는 식민지 백성과 나라를 구할 민족의식을 깨우는 학교로 향했다. 그는 조만식 선생이 설립한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김약연이 설립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당시 학생이던 강원용은 “장공은 학교에서 한 달에 70원의 봉급을 받았다. 그중 22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학하는 학생들의 뒤를 보살피는 데 다 썼는데, 다 떨어진 옷을 꿰매 입고 다녔다”고 회고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미국 선교사들에게 예속된 신학이 아닌 이 땅의 역사와 정신문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정신을 접맥하려던 그의 꿈은 1939년 조선신학원 설립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공은 훗날 수십 개가 넘은 교단으로 분열돼버린 장로교 교권의 종교재판에 의해 큰 위기에 직면한다. ‘성서 무오류설’과 관념적 교리의 도그마로 신학적 우민 정책을 편다면서 그의 성서해석을 문제 삼은 교권은 그의 교수직과 목사직을 박탈하고, 그를 교단에서 축출한다.


미국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을 아무런 여과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단적 보수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의 신학과 교회를 지배한 극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장공이 쓴 찬송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어둠 속에서도 비전을 보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찬송가이기도 한데, 마지막 3절은 그의 제자 문익환 목사가 지어 보탰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김재준, 문익환,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기성 교단은 그를 정죄했지만, 이미 장공의 인격과 학덕을 흠모한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그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장공은 5ㆍ16쿠데타 세력이 총학장의 재임 연령을 60세까지로 못 박는 바람에 자신의 신학교육을 채 펴보지도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꾀한 이후 장공은 1969년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교회 밖으로 나섰다. 기존 제국주의 침탈 정책을 그대로 따르거나 이를 이끌어 교세 확장의 기회로 삼았던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왜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느냐”고 비판했다. 제국주의적 정치를 십분 활용하는 가운데 약소민족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정치참여 불가라고 못 박았던 미주와 유럽의 선교사들처럼 독재정권에 동조하는 행위였다. 이에 장공은 독재에 대한 동조야말로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러운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1971년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로 활동했고, 미국에 10년간 망명하던 중에도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북미본부’(한민통) 의장으로서 민주화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는 장공(長空)이란 아호대로 길고 텅 빈 마음을 지녀 정치적 야심이 없었고, 교회와 역사를 깊이 통찰하며, 이를 현실에서 실천해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늘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등불이 된 정신적 지도자였다.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장공은 눈을 감기 전 “그리스도께서 평생 동행해주었다”고 고백할 만큼 확고한 신앙인이었으며, 이 땅의 전통 유ㆍ불ㆍ선 정신과 역사를 사랑했다. 장공은 서구의 선교사들이나 그들을 맹종하는 목회자들이 우리의 전통문화과 종교적 유산을 가치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박멸되어야 한다며 기도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1885년 제물포를 통해 처음 들어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후반의 청년들로 우리 종교문화와 도덕의 높은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다고 그는 주장했다. 더구나 당시 전통문화와 종교 기록은 대부분 한자였기에 그들이 이를 접하기도 힘든 일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으로 간 초기 선교사들처럼 전통사상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공은 한국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아 추구해야 할 신학 과제를 ‘한국사의 토양에 뿌리박은 한국기독교를 발견해 육성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의 정수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본 그가 품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는 왜소하고 소박했으나 호랑이들을 품어 날게 했고, 좀체 말이 없고 정을 겉으로 표현하거나 특정 제자를 편애하지 않았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영성의 신비였다. 그는 말년인 1983년 <새벽 날개 타고>라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우주적 영성을 선물하고 갔다.


이 우주는 하느님 집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 집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이 눈이 하늘 보아
푸름이 몸에 배고
이 마음 맑고 맑아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서
내 고향 마련하네


땅에서 소임 받아
주님 나라 섬기다가
주님 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옮기나니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김재준, <새벽 날개 타고>)


조현, 『울림 – 한국의 기독교 영성가들』(한겨레출판사, 2014), 126-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