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9장 : 영원의 끝을 살다(1983-1987년) - 하늘의 부르심을 받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21 09:14
조회
380

[장공의 삶] 9장 : 영원의 끝을 살다(1983-1987년)


하늘의 부르심을 받다


김재준은 1986년에 들어서 이유 없이 한 달 내내 서글퍼지는 마음이 가득했다. 책을 보아도 마음이 닿지 않고 글을 써봐도 울적함이 풀리지 않았다. 친구가 산책을 권했지만 몸이 쇠잔하고 방향감각이 무디어져 식구들이 밖에 혼자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기도였다.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리고 하늘의 집 마련해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는 기도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의 기도가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끼는 제자 강원용이 방문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문병을 갔는데…… 기도중이라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기도가 어찌나 긴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 나는 참다 못해 기도가 계속되는 중에 방문을 열었다. 그때 그분의 안색이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말했다. ‘죄송하지만 기도 좀 그만하십시오. 선생님은 지금 당장 입원하셔야 되겠습니다.’”324)


기도와 함께 김재준은 마감원고를 정리하듯이 그동안 삶으로 살아냈던 그의 신앙과 신학을 정리했다. 아내 이야기와 교우록 등 그의 살붙이 들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풀어서 썼다.


“평생토록 놓지 않았던 붓을 들어 ‘생명(生命), 평화(平和), 정의(正義)’를 쓰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자, 예수의 제 자들이 추구할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실체라고 전한다.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은 장공의 신학적 비전이자 신앙의 목표였다. 그의 일생은 ‘그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마 6:33)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었고, 그 삶은 온 우주의 속량을 꿈꾸는 드넓은 신앙정신이 약동하는 삶이었다.”325


김재준은 1987년 1월 17일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썼다.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마감원고에 점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김재준은 1987년 1월 27일 오후 8시 51분,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326) 그 글의 전문을 싣는다.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 김재준, 함석헌(1987. 1. 19)


시시각각으로 어두움 속에서 치닫는 정국을 보다 못해 우리는 한국의 늙은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 탄원합니다.


늙은이가 가진 것은 경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20세기의 첫해에 나서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이씨 조선이 망하는 것도 보았고, 군국 일본이 패망하는 것도 보았고, 제3세계 나라들이 군벌의 발호로 고난을 겪고 있는 것도 듣고 있고, 핵우산을 펼쳐들고 세계의 모든 약소국을 못살게 하면서 무너져가는 대국가주의를 유지해 보려 발버둥치는 미국이나 소련의 음모도 알고 있습니다. 노서지곡이라고 늙은 쥐가 곡식이 어디 있는 지 아는 모양으로 비록 제1선에서 일하지는 못해도 우리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첫째, 정부 당국에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여러분은 잘못 출발했습니다. 그 흔적을 아무리 없애려고 6개 성상을 지나면서 온갖 치장을 했어도 국민은 그때를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거기에 군국주의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전 정권(前政權)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잘못입니다. 군인 조직은 상하질서가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극상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 그 기본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군대라는 특수 집단에서는 가능해도 국민 사회를 그렇게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도 처음에는 개방정치를 표방했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꼭 군대통치 방식만 남지 않았습니까! 정권 평화교체를 크게 내세우지만 군인은 전진만을 알도록 훈련돼 왔습니다. 국민이 바라는 정권교체란 군사정권의 종식을 뜻하지 그 안에서 사람만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어떤 방법으로 재집권한다고 해도 국민은 더 이상 여러분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여러분이 매일같이 겉으로는 잔치 마당을 벌이고 뒤로는 그 잔인성을 연속하기 때문에 이 국민에게 분노만 팽창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김근태 씨 고문사건에도 뉘우치지 않고 성고문을 자행하더니 급기야 고문치사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도덕적 양심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할 수 없거니와 고문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과 국민,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 앞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겠는지 깊이 생각하고 어떤 결의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국민과 나라가 살아남아야 당신들도 살아남지 국민과 나라가 살지 못하고 당신들이 사는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몸부림은 우리 민족의 몸부림으로 알기에 우리는 희생되는 여러분의 소식을 들을 적마다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혈기가 이성을 누르는 나이에는 안하무인으로 선생도, 심지어 부모도 없는 듯 스스로 오만하기 쉽습니다. 이런 자세는 이 사회가 명분이야 어떻든 수용하지 않습니다. 폭력에 지친 우리 국민은 폭력을 싫어합니다. 감정이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감정의 불길이 너무 치솟으면 도리어 도둑을 부르게 됩니다. 현재는 힘의 철학을 믿는 낡아빠진 대국가주의가 스스로 망하느라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때인데 여러분은 새 시대의 주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지성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옳고 그름은 국민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서 반영됩니다. 심한 표현으로 국민을 잃고 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야당 여러분께!


2·12 선거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말없는 국민이 얼마나 정확하게 볼 것 을 보고 제대로 판단하는가를 백일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여러분에 대해 실망하는 걸 아셔요! 이번에 여러분을 대표로 뽑은 것은 권력을 누리라는 게 아니라, 오래 뺏긴 국민의 권리 되찾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감옥 생각하지 않고 그 대임을 영광으로 알고 나섰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 자리에 연연해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지금이 어느 때 인데 계파니 자리 다툼, 심지어는 분파 운동이 있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고도 국민의 심판에 견딜 줄 아나요? 여러분께 건 기대에 배신당하면 국민의 마음은 역전하여 여러분을 적으로 삼으리라는 것을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주권재민의 민주화를 이룩할 큰 책임이 있습니다. 민중생존권을 확립하고 자주 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서야 하는 큰 사명이 있습니다.


군인들에게!


나라의 울타리인 군인들! 그대들은 민족 전체를 위해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사명이지 결코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분명히 할 일이 있어! 무자의 뜻은 무기를 멈추게 하자는 것입니다. 쓰지 말라는 것이 무기지 결코 쓰자는 것이 무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만큼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런데 정치권력에 눈이 어두운 극소수의 군인들 때문에 여러분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사는 것은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튼튼한 전선을 위해서도 정치에 맛을 들인 군인은 다시 등장하지 말도록 여러분이 함께 단결해야 할 것입니다.


근로자와 기업주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산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경영주 없이는 그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은 기업주와 공생(共生) 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여러분과 기업주가 함께 만들어내는 재산은 절대로 어느 개인이나 족벌의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그것에서 생기는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며 의롭게 쓸 수 있도록 여러분이 깊이 간여하는 것은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이 정당한 권리를 방해하는 어떤 세력도 국민들과 함께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기업주들도 이러한 본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인의 것이라는 생각이나 오히려 내가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전근대적인 착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건설을 위하여 한 역할을 담당할 뿐 이라는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씨알)여러분!


우리는 이 이상 상전 모시는 종의 시대에 살지 맙시다. 그럼으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묘한 ‘프락치’ 정책으로 ‘정보국 화(化)’하여 국민운동을 통제하는 경찰을 ‘전’경찰이라고 이름한데서 보듯이 국민을 전투의 대상으로 아는 이 정부의 횡포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악의 뿌리가 문제입니다. 엉겅퀴에서 포도는 못 땁니다. 자유는 정의를 내포하며 질서는 자유와 정의를 전제합니다. 그러기에 국민 여러분밖에 이 나라를 바로잡을 힘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1987년 1월 19일
김재준 함석헌


1987년은 역사에 남을 특별한 해였다. 자유ㆍ민주 국민의 힘이 하나로 응집되어 6월 항쟁을 이뤄냈으며, 평화적 정권교체를 약속받는 노태우 정 권의 6・29 선언이 울려퍼진 해였다.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김재준은 이날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권력 야욕에 사로잡힌 정치군인들의 종말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염두에 둔 예언과 같은 글을 남겼다.


새해벽두에 쏟아진 애도와 탄식의 눈물은 각성과 결집을 이루어 향후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재준의 유언과 같은 글은 가혹행위 와 고문 살인, 불통과 폭력, 정치권력을 향한 분파로 얼룩진 ‘종의 시대’를 ‘주인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것은 범우주적 사랑 공동체로 가는 새 시대를 여는 외침이요, 민족과 사회의 공적(公敵)을 향한 정부, 야당, 군인, 근로자, 기업주, 그리고 국민의 미래적 선언이었다.


박형규는 김재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붓으로 ‘나의 좌우명’이라고 적은 액자를 발견했다.327) 김재준이 젊은 시절부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생활지침이었다. 이후 김재준은 2002년 12월 27일 김대중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 교회 신학 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328)


김재준은 긴 고난과 아픔의 시기,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고 예언자였다. 평생을 ‘신앙의 모험’으로 ‘새로움’의 신학을 추구했다. 그는 언제나 성서를 올바르게 보는 것,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 인간에 대한 존중, 세계와 온 우주 피조물의 관심,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 이 모두를 위해 외쳤고, 그렇게 살아냈다.329) 김재준의 부음을 듣고 문익환은 청주 감옥에서 추모시를 작시하였다.330) 영원의 삶을 보여준 어버이 스승에 대한 감사였다. 이 시는 장례예식 때 조시로 낭송되었다.


스승이시여
큰 스승이시여
하늘 같은 땅 같은 스승이시여


죽어서 사는 길을 몸으로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여
우리를 죽음을 사는 길로 몰아넣으시고
그 길을 앞장서 가신 지독한 스승이시여


스승이시여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버이 같은 아니 어버이보다 더한 스승이시여


스승이시여
만년 청청하게 우리와 함께 서 계실 스승이시여
낙락장송은 정몽주의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도 낙락장송입니다.


당신은 한국 교육의 풍운아 ‘한신’의 정신이요 창설자이십니다.
기독교장로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보다 전에 당신은 분명 예수의 제자요
우리의 다시없는 스승이십니다.


당신이 지난날 해낸 일
우리도 내일 또 모레 해보일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고마운 스승이시여
길이 우리와 함께 계시소서.


[각주]


[324] 박형규, “장공과의 만남과 억지 제자의 변”, 『장공이야기』, 335.
[325] 위의 글, 335.
[326] [역사를 바꾼 크리스챤] 장공 김재준 목사…… 교회개혁 비전 제시한 선각자 「국민일보」 2002년 12월 30일자
[327] 강신석, “한국 교회사의 맥락에서 본 김재준의 사상”, 주재용,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80.
[328] 문익환, “큰 스승이시여”, 『장공이야기』, 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