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 - 교회의 대사회 참여운동을 시작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3 09:23
조회
262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


교회의 대사회 참여운동을 시작하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묶어 공산권 국가인 소련, 중국, 북한과 대치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박정희는 월남전쟁에 이어 1965년 6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과 외교관계를 비밀리에 맺으려 했다. 학원과 민간에서 날마다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벌였다.230) 김재준이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현장에 나선 것이 이때부터였다. ‘한일 국교 정상 화’ 방안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이 운동은 특별히 교파를 망라하고 교회가 앞장섰다. 그중에서 교회 대표격으로는 김재준과 한경직이 앞장서게 된 것이다.231) 김재준은 자주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말했다. 성장만을 위한 교회, 축복만을 선포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시대의 역사적 책임을 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했다.


(1)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지난 잘못에 대한 비판을 감수함과 동시에 반성하여야 한다. (2) 말씀의 선포자로서 정의에 용감해야 한다. 정의 없는 평화는 정의와 평화를 함께 상실한다. (3) 교회는 역사적 책임에 철저하여 의(義)에 용감하고 사랑에 진실해야 한다. (4) 기독교는 윤리법에 대비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비판과 해석을 제공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5) 교회는 야당적 입장에서 십자가를 각오한 의의 병기가 되고, 인간 혁명의 과정을 영적 재창조로 수행하여야 한다.232)


김재준은 1965년 7월 초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한경직, 이태준 등과 함께 영락교회에 갔다. 처음에는 6, 7명에 불과 했는데 차츰 그 수가 불어나 시내 각 교파를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였다. 교회는 물론이고 문인, 재향군인, 장교 등 각계각층이 모두 하나가 됐다. 이날 성명서와 함께 공개서한을 김재준의 책임하에 작성됐다. 집회는 초만원이었는데, 김재준이 강연을 맡았고, 한경직이 설교를 맡았다.233) 김재준이 강연을 통해서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일러 전쟁 이전에 38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단하여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사실과 러시아가 이에 불응하자 일러 전쟁 준비에 광분했던 사실을 말하고 다음으로 일본은 지금도 침략 야심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군사, 정치, 경제의 순차적 지배라는 종전의 순서를 경제, 정치, 군사의 역순서로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금후의 한국은 미국 자본 아래 있는 중남미와 비슷하게 그보다도 더 나쁘게, 일본 경제 침략의 제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 경고했다.”234)


이날 한경직의 설교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날 밤 한경직의 설교는 대일 감정의 노골적인 폭발이랄 수 있는 웅변이었다. 그는 만 명 가까운 청중을 울리며 매혹시켰던 것이다.”235)


1965년 3월부터 8월까지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타 도가 매일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의 반대운동에 동참했던 일부 목사들은 수차례 연행되었고, 소위 ‘정치교수’, ‘정치 목사’로 불려졌다. 그러나 박정희는 냉소적이었다. 결국 전국민의 반대에도 1965년 8월 14일 계엄령 아래 한ㆍ일 협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236)


이런 어수선한 정국에서 한국신학대학은 김재준을 1965년 4월에 명예 학장으로 추대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존경하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9월에는 기장총회에서 50주년을 맞이하여 김재준을 총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듬해에는 한신학원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학교에 있을 때 보다 여러모로 바쁜 날이었다. 그러는 중에 김재준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신앙과 직제’ 세계 대회에 참석하러 갔다. 가는 길에 일본 기독 교단을 방문했다. 일본 기독교단 지도자 전체가 수양회로 모인 자리에 김재준은 기장 총회장 자격으로 환영 예배에 연설을 했다. 자신이 일본말로 연설할 수도 있었지만 이인하 목사에게 통역을 맡겼다.237)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관계의 소외 때문이라고 본다. 모 든 은구(恩仇)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관관계가 화해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관계 개선에 중심적으로 노력해야 하겠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물 교류, 연구재료 교환, 교회사 공동연구, 신학생과 신학교수 교류, 안식년 해당 목회자 초청 목회 실습과 시찰, 공동 선교, 그리고 이런 사업을 가능케 할 기금 설정 등등이 있을 수 있다. 한일관계에서 일본 교회의 ‘사죄와 속죄’ 운운하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 하나님은 이미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죄과를 용서하고 친교와 협동을 당부하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일본 교회로서는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 태도 개선, 일본 국가의 성격 갱신에 중점 적인 선교 목표를 두었으면 하고 기대한다.”238)


김재준은 환영 예배가 끝난 다음 간부들 모임에서 히야네(比屋根), 다까야나기(高柳) 등 옛 선생님들과 일제 말기에 조선신학원에서 고락을 같이한 미야우치(官內彰) 목사도 만났다. 모두 노인이 돼 있었다.


김재준은 그 길로 몬트리올로 향했다. 대회는 맥길신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 김재준은 전체회의에서는 발언한 적은 없지만, ‘교회와 교직’ 분과토의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다. 김재준은 여기서 다루는 회의 내용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서구 사회와 전통,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신앙과 직제를 현 시대에 대응시키려는 논의가 전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재준이 생각할 때 한국의 빈곤하고 비기독교적인 복수 종교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다루는 논의들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의 이런 소외감을 글로 적어 그들에게 말하면서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절박한 현실을 다루지 않으면 대회는 ‘공염불’이 될까 우려한다고 말했다.239)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고 있던 김재준은 1967년 2월 16일 종로 한일관에서 20여 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졌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자’는 염광회를 조직한 것이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 혼란 극복과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신앙을 기초로 한 사회 참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재준과 함께한 사람들로는 정일형, 김상돈, 장준하, 박형규, 김옥선, 송원염, 임일, 문장식, 이명하 등이었다.240)


그 후 김재준은 1967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대표들과 함께 ‘한국 찬송가 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찬송가는 가사와 곡의 불일치뿐만 아니라 한국인 작품수가 작사만 고작 6편에 불과했기 때문에 ‘개편 찬송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적극적인 찬송가 한국화를 목적으로 찬송가 위원회는 1966년 김재준에게 찬송시를 의뢰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가 그것이다.241)


(1)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간다


(2)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이 찬송가의 3절은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쓴 <고마운 사랑아>라는 시를 가지고 김재준이 2년여 동안 고민하면서 지었다.


(3)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를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이 찬송가의 가사는 종교적인 언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1975년 종로 5가에 모여 투쟁할 당시에 비기독교인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불렀다.242)


[각주]


[230]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2.
[231]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61.
[232] 김재준, 『한국 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 《기독교사상》, (1961년 6월호).
[233]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3.
[234] 김재준,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 『범용기 : 장공 김재준 자서전』(서울 : 풀빛, 1983), 343.
[235] 위의 글, 343.
[236]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4.
[237] 위의 책, 184-185.
[238] 김재준, “캐나다 몬트리올 가는 길에”, 『범용기 : 장공 김재준 자서전』, 345.
[239]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위의 책, 347.
[240] 문성모, “장공 김재준의 찬송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장공사상연구논문집』(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508.
[241] 문익환, “통일은 다 됐어”, 한신대학교 43주년 개교기념일 강연 내용(1993/4/19), 「세계와 선교」 139호, 서울, 1993, 8. 문성모, “장공 김재준의 찬송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509-510에서 재인용.
[242]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