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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6] 해방 직후 혼돈의 시대에 : 근본주의에 맞서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5:43
조회
1123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36-147쪽.


[6] 해방 직후 혼돈의 시대에 : 근본주의에 맞서

조선신학교를 통한 신학교육의 실현과 경동교회를 통한 지성인 목회의 실현으로 김재준은 학문과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을 ‘신 신학’이니 ‘자유주의’니 하면서 정죄하는 한국 교회의 뿌리 깊은 근본주의 신앙은 해방 후에도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이미 1929년 총회에서 근본주의 문제를 정리하고 근본주의자들이 떠났지만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 말 이후 조용하던 근본주의자들과의 논쟁이 해방이후 왜 다시 일어났는가? 김재준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교회에는 사상적 갈등이 점차 첨예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성경은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뿐이라는 교회 지도자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김과 동시에 여러 가지 부수적 요소가 작용하여 갈등은 더욱이 첨예화하였다. 그 부수적 요소들 중에 얼마를 적어 본다면, ① 미국에서 다시 들어온 옛 선교사드이 해방 전의 자기들의 지도 이념을 회복해 보려는 저의를 버리지 못한 것, ② 이북에서 피난 남하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이 60년래의 보수 신앙에 향수를 느낀 것, ③ 맨주먹으로 남하한 의탁 없는 피난민으로서의 좌절감을 보충하기 위한 무비판적인 광신 경향, ④ 경제생활 방도를 위한 선교사 의존심리, ⑤ 새 시대의 신학으로 무장한 후진들의 교회 진출에 대한 구세대로서의 의구심, ⑥ 비판을 꺼리고 권위에 의존하려는 대중심리의 영향 등이라 할 것이다.”45)

45) 김재준, 「전후 한국교회 20년사 비판」, 『기독교사상』, 1965/8,9,16-25쪽.

근본주의자들과의 논쟁, 즉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단순히 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과 교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조선신학교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 4월 대구에서 총회로 모이기 일주일 전쯤, 조선신학교 학생들 중 51명이 김재준과 몇몇 교수들이 신 신학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며 총회에 호소하려 했다.46) 그들은 문익환이 회장으로 있는 학우회에서 결의를 얻어 이 일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자 팸플릿을 만들어 총회원들에게 배부했다.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은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다고 주장하면서 김재준의 강의 내용인 오경의 문서설, 성경의 고등비평, 칼빈의 예정론 해석 등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울에 장로교 정통 신학교를 세워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총회가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에 착수하기로 하자 김재준은 ‘진술서’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신 역사적 계시”라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밝혔다. 그리고 면담을 통해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임을 믿으며, 사도신경과 장로교 신조를 그대로 믿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로써 총회는 그의 신앙이 이단이 아님을 확인하고 일단락지었다.

46) 송창근의 전기를 쓴 주태익에 의하면 신학생 이일선이 쓴 『이상촌』이란 책에 김재준이 서문에 써주었는데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 책 내용에 농번기 농촌의 실정으로 주일 예배를 밤이나 새벽에 보게 하고 주일날에도 농군들이 일을 할 수 있게 제도화하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내용이 있는데, 주일성수를 이렇듯이 파괴하자는 책에 교수가 들을 쓸 수 있느냐 하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주태익은 이러한 논란의 배후에는 평양에서 월남한 K 목사는 조선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게다가 그가 송창근과 잘 아는 여성과 결혼하려 했는데, 송창근이 재혼을 상의하는 그 여성에게 K 목사의 인품을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결국 재혼하였고, 자신에 대한 송창근의 부정적인 평가를 전해들은 K 목사는 보복하는 심정으로 이를 문제시하여 송창근과 그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어려움을 주려고, 학생들을 선동하고 그 비용과 방법까지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만우 송창근 선생 기념사업회 편, 『만우 송창근』, 103-104쪽 참조).

조선신학교 교직원들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김재준이다.

1948년 박형룡이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그만두고 상경하면서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의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평양신학교의 폐쇄 이후,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와 다투다 일본에 잠깐 머문 뒤, 이미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만주의 봉천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귀국했었다.47)

47)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450-451쪽.

봉천신학교는 여러 교파가 연합하여 설립한 에큐메니칼 신학교였다. 박형룡은 총회의 요청으로 김재준의 ‘진술서’를 검토 한 뒤, 김재준이 “성경의 파괴적 고등비평의 수호자와 자유주의 신학의 옹호자로서 자인함이 명백하다”라고 결론내렸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구체적인 이유 중의 하나로 김재준이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 모세가 오경의 저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세가 오경의 저자로 말한 구약 여러 책의 증거와 …… 신약의 그리스도의 증거와 …… 다른 책들의 증거와 권위를 무시하고 욕함이며, 따라서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의 교훈과 기록에 불신임을 선어하여 성경 전부의 권위를 의문케 함이니 …… .”

김재준에 대한 박형룡의 정죄의 배경에는 당연히 성경문자주의를 집요하게 고집하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당시 세계 교회의 신학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오경에 모세의 정신과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모세가 오경의 직접적인 저자라고 하는 주장은 소수의 근본주의자들만이 외치는 것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총회는 왜 하필 김재준의 성경관을 다시 문제 삼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박형룡에게 요청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유동식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이미 장로회 신학교인 조선신학교가 존재하여 있었다. 문제는 그 신학교의 신학노선이었던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김재준이 학문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적인 정통신학을 장로교의 전통신학사상으로 확신하고 있는 박형룡과 교역자들은 보수주의적인 신학교 재건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박형룡이 가졌던 신학자로서의 사명은 김재준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단죄함으로써 보수주의 신학을 확립ㆍ지속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재준을 비판하는 데 힘을 썼다. …… 조선신학교를 보수주의로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박형룡을 임시 교장으로 한 또 하나의 장로회신학교를 열었다(1948). 그리고 그 다음 해 총회에서는 이 신설 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결의함으로써 보수주의의 승리를 강요했다.”48)

48)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190-191쪽.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김재준은 왜 근본주의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개인적인 측면에서 그가 받은 신학교육, 그리고 근본주의 신학의 주장과 그 허구성에 대한 파악 등은 그로 하여금 도저히 타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메첸 등으로부터 근본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 허구성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한국 장로교회의 앞날을 생각할 때 그는 근본주의 신학을 거부해야 했다. 미국 유학 시절 근본주의자들로 인하여 미국 장로교회가 분열되는 현실을 그는 이미 직접 목격 했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가 근본주의 신학을 지속한다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장로교회와의 유대에서 끊어지는 한국 교회의 고립을 의미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미 미국 장로교회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은 세계 교회와의 연대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는 박형룡이나 일부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회를 통째로 미국 장로교회에서 정죄했던, 메첸파의 정통 장로교회로 끌고 갈 우려도 있었다.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파(일명 고신파)에서 활동하는 메첸파 목사들과 선교사들은 이미 이러한 우려를 현실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그의 소명이요 사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은 자신을 이단시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매우 괴로워했다. 이러한 시련과 아픔의 세월을 다음과 같은 글을 쓰면서 달랬다.

“…… 지금 우리도 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쓰여진 계시의 문자를 다시 읽고 당하는 온갖 사위(事爲)를 재(再) 비판 재(再)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되고 현재를 영도(領導)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크리스챤은 언제나 진보주의요 자유주의다. 그러나 쓰여지기 전 그리스도의 본심정(本心精) 성령의 본의에 소급(遡及)하는 의미에서 크리스챤은 가장 철저한 보수주의자이다. …… 그리스도 심정! 그 무한대의 ‘아가페’…… 이 심정 있으면 내 마음 하늘이다. 이 사랑 없으면 낙원도 황천이다. 이 심정 잃으면 교리도 신학도 발 뿌리에 널리는 ‘스텀불링 불럭’이다.”49)

49) 김재준, 「자유와 보수」, 1947년 4월.

“그리스도는 억울하게 죽으셨다! …… 그러나 그는 결코 변호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 자신이 가장 웅변으로 그를 변호하는 까닭이다.
그가 만일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였더라면
그가 만일 자신을 구하려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더라면
그가 만일 그를 죽이는 원수를 조금이라도 미워하고 원망하였더라면
그의 십자가는 그의 몸과 함께 그의 영혼까지도 상처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드라면 그에게는 부활과 승천, 영광의 재림은 제외되었을 것이다. ……
이론을 넘은 그리고 윤리적 조문까지도 넘은 무한대의 사랑만이
진정한 승리
진정한 건설
진정한 영광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만이 나를 세우고
남을 합하여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나님 나라!
그것은 십자가의 속량愛에서 싹튼 생명의 나무다.50)

50) 김재준, 「無怨」, 1948년 4월.

이 무렵 그가 쓴 글들 가운데 「편지에 대신하여」(1948)란 글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신학교육의 이상, 그동안 경과된 상황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근본주의 신학의 태동과 흐름 등을 소상하게 밝힌 것이데, 그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고전 10:7-11:21)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저가 믿음의 증거를 가졌느냐? 나도 그러하다. 내가 유교와 한학의 열심 있는 집안에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 어버이에게서 끊어지는 쓰라림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증거를 얻었노라. 주께서 의롭다 하시나니 누가 나를 송사하랴 하는 마음의 기쁨에 몰려 손에 쥐어진 하늘의 약속만을 가지고 바다로 육지로 50평생을 표랑(漂浪)하였으되 내가 부족함이 없었노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였느냐? 나도 그러하다.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외로우되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였도다.
저가 신학교육에 공헌이 있느냐? 나도 그러하다. 사면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총회도 외면하고 지나갈 때 주의 막대기가 나를 붙드셨도다. 내 설령 마지막 숨을 내쉬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수백 명 후진을 생각하고 하늘의 별을 세일 수 있음을 자랑하리라.
저가 현대주의의 결함을 아는가? 나도 그러하다. 저는 전망대 위에서 보고 외쳤으나 나는 그들과 함께 피하는 거리를 순례한 사람이다. 나는 그 결함과 아울러 그 장점을 발견하고 있다.
저가 정통을 자랑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그는 관념으로서의 정통을 안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에 부딪혀 들어가는 전 인격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저가 칼빈 신학을 수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창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신앙의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친구님들이여,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시오. 더 쓰지 않으렵니다. 주를 사랑하고 조선 교회를 사랑하는 열심히 나를 미치게 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떠나간 학생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전도(前途)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선배 혹은 동료인 ‘정통 애호자’를 존경하고 아낍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소신을 은혜 받은 대로 겸손히 증거하며 열심히 전도하고, 또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성도의 친교를 교란하지 않기를 충고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진국인 미국의 소위 ‘정통 장로회’가 자기네의 분파적 투쟁심을 조선에 불붙여 불신자 획득보다도 기성 교회의 교란과 쟁탈에 정력을 경주하는 것과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기네 본국 교회에서 이미 경험한 결과를 번연히 알면서도 하등 명백한 지도성을 표시하지 않고 무위좌시(無爲坐視)하며 어떤 인사는 도리어 그런 것을 틈타 전쟁 전 선교사 집권의 회복을 꿈꾸는 것을 볼 때 의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동기도 사실은 우리끼리의 변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알면서 아웅하는 저들의 대한 우리 교회의 정당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데 있습니다. 듣는 바에 의하며 선교사가 방금 다수 입국중이라 합니다. 전세계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연합체가 되기르 원하고 있습니다. 나도 조선 교회가 세계 장로교회 성도의 교제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해방 직후, 김재준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조선신학교의 재건을 통하여 세계 신학을 호흡하는 신학교육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분단의 상황으로 인하여 파생된 신학적 논쟁에 휘말렸던 것이다. 보수적인 총회, 진보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의 성경고등비평 매도에 대한 미온적 대응, 김재준에 대한 각종 악성루머(처녀 탄생부인, 부활부인, 기적부인, 재림불신 등) 등은 그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재준은 만주 용정에 있을 때 출간했던 『십자군』이라는 잡지글 1950년 1월부터 속간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한국 교회에 대한 시각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