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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6] 해방 직후 혼돈의 시대에 : 무너진 땅을 다시 세우며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5:26
조회
1078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27-135쪽.


[6] 해방 직후 혼돈의 시대에 : 무너진 땅을 다시 세우며

해방을 맞이하자 김재준은 조선신학원 재건에 힘썼다. 이를 위해서 송창근, 한경직 등을 교수로 청빙했다. 이들 세 사람은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공부가 끝난 뒤 한국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했었다. 그들은 선교사 중심의 한국 신학교육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고, 송창근은 목회신학, 한경직은 신약학과 교회사, 김재준은 구약학을 전공하여 함께 일하기로 했는데, 이제 그 꿈을 실천할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은 조선신학원을 재건하여 남자 신학교로 하고, 여자 신학교는 신설하여 한국 신학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기로 했다.

이사장 김종대 목사가 천리교 재단이 아직 접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왔다. 당시 천리교는 방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본부 건물과 관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사택도 있었다. 또한 시내 40여 처소에 천리교회가 있었는데, 제일 큰 교회가 현재의 영락교회 자리에, 두 번째 큰 교회가 현재의 경동교회 자리에 있었다.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미군정청, 시청 등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교섭했다. 천리교는 재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미 한국인을 내세워 원예학교로 설립인가까지 받았지만, 미군정당국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동자동 본부 건물은 조선신학원 캠퍼스로 쓰기로 하고 원장이 된 송창근이 관장 사택에 입주했다. 김재준은 언덕에 있던 직원 사택에 입주했다. 또한 현재 영락교회가 있는 경성제일교회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과 5층 건물의 기숙사, 기숙사 아래층의 집회실 그리고 소강당 등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여자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교장인 한경직은 구내 사택에 살면서 그곳을 돌보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 신학교 캠퍼스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북의 피난민들이 한경직을 찾아와 “하룻밤만”하면서 빈 방에 짐을 풀고 눌러 앉아버리는 것이었다. 몇 주일이 지나자 여자 기숙사는 피난민 수용소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긴급 이사회가 소집되어 한경직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한경직은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사회는 그 사표를 수리할 태세였다. 송창근과 김재준은 우리도 책임이 있다면서 즉석에서 사면서를 써냈다. “이사회로서는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선후책으로 여자 신학교는 동자동에 옮겨 조선신학원 여자부로 하고 한경직은 송창근, 김재준과 함께 조선신학원 교수로서 사택만 영락정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피난민들은 즉시 다른 데로 옮길 것을 역시 한경직에게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한경직의 성격으로는 단행하기 어려운 요구였던 것이다.”41)

41) 한경직은 이때 꾼 돈과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을 생각해서인지 1969년 3.1절 50주년 기념주일 날 영락교회에서 영락여자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는 영락여자신학교가 있는 남한산성에서 노후를 보냈다(조성기, 『한경직 평전』, 175-176쪽 참조).

한경직은 약속한 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피난민들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은 길에 나앉으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던 중 조선신학원 측을 화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락교회 측에서 군정청과 교섭하여 영락정 적산을 이중으로 임대차했고, 동시에 그곳에 예배당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함태영 이사장이 찾아가 공사를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봉변만 당하고 돌아왔다. 한경직은 김재준에게 딱한 사정을 말했다.

“나는 원리대로 하려는데 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언제나 약속대로 되지 않소. 그렇지만 불하할 때에는 조선신학원 이름으로 불하하도록 하겠소. 이것만은 믿어주시오! 교회에서도 그렇게 결정했다오!”

그러나 이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적산 관리국에서 불하 통지가 와서 가보니, 어제 이미 영락교회 측에서 불하해 갔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배신감을 느꼈고 송창근도 절교한다며 흥분했다.

김재준이 지적한 대로 한경직의 유순한 성격으로는 피난민 이주의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으며, 그것은 김재준과 조선신학원 측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영락교회 측에서 볼 때에, 피난민들을 나가게 하라는 요구는 무리였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이북에서 피난 온 성도들을 교회에서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은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 곳이 없었고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피난민으로 예배당이 차고 넘치는데 바로 옆에 있는 기숙사를 비워둔 채로 놔두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았다. 신학교로 임대한 땅인데, 같은 장로교단 교회의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 땅은 조선신학원 측이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적산을 공짜로 임차대한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결국 이 문제는 6ㆍ25 동란중 영락교회 김치복 장로가 조선신학원 측에 몇 십억 원을 전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당시 한경직은 조선신학원에 갚을 돈을 모금하러 미국을 방문중이었는데, 그의 모금액은 조선신학원 측에서 요구한 액수에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42)

42) 현 영락교회 부지문제에 대해 영락교회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경직과 김재준이 해방 직후에 미군정 당국을 찾아가 서울에 있는 40여 군데의 천리교 토지와 건물들을 거의 공짜로 얻게 되었는데, 8년쯤 지만 1953년에 이르러 조선신학교는 자기네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는 토지와 건물이니 영락교회는 거기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영락교회 구내를 반으로 갈라 철조망으로 둘러치겠다는 것이다. 철조망으로 출입이 통제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교섭하였으나 조선신학교 측에서 처음에 요구하던 3천만 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6천만 환, 8천만 환, 1억 환, 1억 2천만 환으로 자꾸만 늘어갔다. 거의 공짜로 얻은 땅이 자기네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다 하여 그런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봉이 김선당리 따로 없었다. 하지만 경직은 재정이 어려운 조선신학교에 헌금을 하는 셈치자 하고 김치복 장로에게 교섭을 하도록 일임하고 미국으로 가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김치복은 경직이 미국에 가 있는 사이에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조선신학교 측에서 요구하는 거금을 대신 지불하고 1870평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다”(조성기, 『한경직 평전』, 160-161쪽).

김재준은 영락교회 사건의 마무리를 이렇게 회상했다.

“영락교회 대표가 신학교 이사장 김종대와 나를 찾아 교무실에 왔다. 별실에서 만났다. 영락교회에서 불하한 기지에 대한 사례금이라면서 그때 돈 몇 십억 원이던가를 갖고 왔다. 계쟁사건을 마무리 짓자는 것이었다. 김종대도 나도 ‘좋다’고 수락했다. 일인들이 버리고 간 시체를 서로 먹겠다고 아옹다옹하다가 6ㆍ25란 징벌을 받았는데 이제 또 묵은 싸움을 되풀이 하기는 싫었다. 이제부터 깨끗한 손으로 재건해야 하겠다. 우리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교무실에서 교수들에게 보고했다. 정대위는 펄쩍 뛰었다. 영락교회 전술에 말려들어 장차 몇 백 억으로도 살 수 없는 요지를 개 값에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는 돈을 쌓아 놓고 신학교를 했나요? 필요하면 또 하나님이 주실 거요!’ 나는 위로했다. 사실 재산갖고 목사끼리 싸우기는 싫다 못해 진저리났던 것이다. 그 돈으로 선생과 학생이 얼마 동안 살았다.”

재건된 조선신학교는 비교적 순탄하게 운영되었다. 문교부에서 인가도 받았고, 송창근의 주선으로 거제도의 부동산도 기부받았다. 교수진도 충원하고 학생수도 늘어났다. 당시에 대학인가를 받은 신학교는 조선신학교뿐이었기 때문에 평양신학교, 만주의 봉천신학교, 일본신학교, 북경과 남경신학교 등의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감리교, 성결교 등 타 교단 학생들까지 전ㆍ입학하여 35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에는 근본주의 신학을 접한 학생들도 있었고, 진보적인 신학을 접한 학생들도 있었다. 그의 구약개론, 구약강해 시간에는 학생들이 강당에 꽉 찬 채로 열심히 듣고 필기했다. 그는 모세오경을 역사비평학적으로 해석했고, 「창세기」의 문서설도 소개했다. 그의 강의에 대해서는 “이단 교수다”, “신 신학이다” 등등의 뒷공론도 있었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글을 발표할 때 이미 받은 것이었다. 1946년에는 이북 교회와의 연합이 단절된 채 ‘남부대회’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장로교회로 구성된 남부만의 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조선신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받았다.

김재준은 신학교를 재건하고 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버린 전기』를 번역하여 신학생들에게 목회의 길잡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에 8월 무더운 날씨에 이불을 뒤집어쓸 정도로 몸이 매우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 책을 번역했다.

오버린은 1740년에 태어나 1826년에 죽은 프랑스의 개신교 목사였는데, 보수적인 산간 농촌 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하며 교인들의 생활 향상과 그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이러한 인물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할 때 한 학생이 문병을 왔다가 물었다.43)

“목사님, 무엇을 쓰고 계십니까?”
“내가 지금 병에서 나아 일어날 자신이 없어. 그래서 내가 지금 죽으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남길 것이 있어야 하겠기에 …… 그래서 유언으로 이것을 남기려고 …… .”

43) 강원하, 「늘 새롭게 회상되는 은사 장공 선생님」, 『장공이야기』, 22-23쪽.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이 세 사람은 조선신학교 재건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각자 교회도 개척했다. 1945년 12월 첫 주일에 송창근은 동자동 천리교 본부 회당에서 선교와 목회를 주목적으로 한 ‘바울교회’, 한경직은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영락정 천리교 경성 제일교회 자리에서 ‘베다니교회’,44) 김재준은 장충동 1가에 있는 천리교회 자리에서 지성인들과 학생들을 위한 특수 교회를 지향하는 ‘야고보교회’를 각각 시작했다.

44) 당시 철자로는 ‘벧아니 전도교회’였는데, 27명의 피난민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야고보교회라는 명칭에는 김재준의 목회철학이 반영되어 있는데, 교회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준은 지성인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한다. 그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강연이었다. 지성인은 비판적이다. 자기 이성에 납득이 가지 않는 한,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생활’을 본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예수의 말씀을 그들은 옳게 여긴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이 점을 가장 강조한 것이 야고보였다. 생활로 나타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 말하자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이다. 이런 것은 처음부터 장공 자신의 주장이었기에 교회 이름도 ‘야고보교회’로 된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노회에 가입할 때 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이름은 거의 전부 그 소재지 이름을 따서 썼기에 고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야고보교회는 서울 동쪽에 있다고 해서 ‘경동교회’로 개명했다. 바울교회는 성남 쪽에 있다고 해서 ‘성남교회’로, 베다니교회는 이북 피난민들의 마음의 보금자리라는 뜻에서 ‘영락교회’로 개명했다.

김재준은 야고보교회의 강단을 지키기 위하여 주일 아침, 저녁 그리고 수요일 밤에 가족들을 데리고 동자동 사택에서 장충동 교회까지 먼 길을 걸어서 오갔다. 그의 설교는 부흥사처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감동을 주거나 웅변가처럼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청중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원고 한 번 쳐다보고 천장 한 번 쳐다보는 일이 계속되었다. 강의에서뿐만 아니라, 설교에서도 ‘천지(天地)’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원고는 늘 논리 정연했고 차분하게 읽혀졌다.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이 컬컬하고 지성에 목말라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경동교회에는 은진중학교 시절 학생이었던 강원룡이 처음부터 참여하여 ‘선린형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합숙하며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선린형제단은 1935년 전후 북간도 용정 지역에서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 되었는데, 경동교회는 북한이나 만주 등지에서 자유를 찾아 서울로 온 젊은이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숙식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이들은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담임 목사인 김재준의 지도 또한 당연히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