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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6장 : 교육의 꿈을 펴다(1939-1959) - 조선신학원 설립에 참여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9 09:04
조회
1042

[장공의 삶] 6장 : 교육의 꿈을 펴다(1939-1959)

조선신학원 설립에 참여하다

장로교회 총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신학적 갈등이 깊어졌다. 이것과 함께 지역간의 갈등 역시 가속화되었다. 한쪽은 서북 지방인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의 대구 지역을 주축으로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에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총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쪽은 진보적인 신앙을 옹호하는 서울, 경기 지역, 호남 지역이었다. 신학적, 지역적 갈등이 교회 안에서 심화되는 동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더욱 높아졌다. 교회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해야만 했다. 일제는 집요한 공작으로 끊임없이 신사참배를 요구했으며, 박응률은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라고 주장하며 선동했다. 박응률과 함께 이승길, 김일선 등 일부 목사들은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시키도록 도왔다.

1938년 9월 평양에서 27회 장로회 총회가 열렸다. 이때 일제는 신사참배가 통과되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각지 경찰서장은 총회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1)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 (3) 앞의 두 가지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중 택일할 것을 강요했다. 또한 총회 전날 친일적 총대들을 포섭하여 신사참배 안에 대하여 제안을 할 사람, 동의를 할 사람, 재청을 할 사람을 미리 선정하였다. 또한 총대 선교사들을 미리 불러 놓고 이에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결국 장로회 총회는 100여 명의 정사복 경관들이 감시하고 있는 가운데 불법적으로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140)

이에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목사 등과 선교사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선교사들은 이미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폐쇄한 상태였다. 또한 평양신학교 역시 5월부터 무기 휴학에 들어간 상태였다. 장로교 총회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인해 신사참배 결의가 통과되자 선교사들은 총회 본부와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인 통보로서 평양신학교를 폐쇄시켰다.141) 이것은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선교사들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를 폐쇄하고 불쾌한 감정을 안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국인으로 있던 교수 박형룡, 남궁혁도 다른 나라로 망명을 했다. 한국에 한 곳밖에 없던 목사 양성기관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1939년 평양신학교가 폐쇄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재개할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평양과 서울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신학교 개교 내지는 신설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142)

평양에서는 1939년 3월 3일에 총회 신학교육부가 모여 평양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운영하기로 하고 선교부에 이를 청원했다. 이때 평양 신학교의 건물과 시설까지 모두 넘겨 달라는 뜻이 있었다. 선교부는 신사 참배 가결로 인해 신뢰를 잃어버린 까닭에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서울에서는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신학교 설립운동이 태동할 무렵 한국 교회 여론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선교사파와 조선교회파랄까. 전자는 선교사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학교를 폐문하고 돌아갔으니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자는 주장이었다. 평양신학교 재개 또는 서울에서의 새 신학교 설립 등등은 모두 선교사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상숭배 굴종하는 배교행위라는 것이었다. 조선 교회파란 것은 선교사 시대는 지났고 잘되는 못되는 조선 교회는 조선 사람 손으로 운영 추진 건설해야 한다는 분들이다. 물론 후자가 절대 다수였다.”143)

조선신학교가 태동될 무렵, 김재준이 기록한 바와 같이 조선 장로교 안에는 두 계열의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과 교권적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었다. 두 흐름이란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평양신학 재건파와, 조선 신학교 설립파를 뜻한다. 1930년대 이후 장로교내에 있던 교권 문제와 신학 문제로 두 개의 흐름이 분열ㆍ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39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고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는 신학교 설립을 위해서 50만원(당시 미화 25만 달러)에 상당하는 부동산과 경상비 10만 원을 헌금했다. 오늘날의 돈으로 따지면 175억 정도가 되는 매우 큰돈이다. 김대현 장로는 원래 전당포를 작게 운영했지만 영등포 쪽에 사놓은 부동산의 땅값이 크게 오르면서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었다. 김대현 장로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 자신의 십일조를 김필헌이라는 이름으로 저금하고 반드시 헌금으로 낸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1939년 총회에 조선신학교 설립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총회는 평양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총회 폐막 직전 평양의 윤원삼 장로는 긴급 발언을 요청하며 조선신학교를 대변하는 말을 했다.

“이 교회의 수난기에 총회 산하의 현직 장로가 교회를 지키려는 충성으로 50만 원 사재를 주의 제단에 바쳤는데 총회로서 감사와 격려의 표지는커녕 냉대와 질시로 대한다는 것은 인징상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제단의 성금까지 교권 다툼에 희생된다면 금후 어느 신도가 충성을 보이겠느냐!”144)

이러한 발언은 그동안 신학교 개교 문제를 놓고 벌어졌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총회는 김대현 장로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결의하고 조선신학교를 사설기관으로 인가 수속을 계속 진행시켜도 좋다는 허락도 받게 되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 추진이 시작된 1939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해 7월 송창근에게서 편지가 왔다.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입건되었고 보석중이니 본인이 맡고 있던 조선신학교 설립 실무를 그만해야겠다는 편지였다. 또한 이 일을 김재준이 대신 와서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1939년 9월 25일 김재준은 은진중학교를 사임하고 혼자서 서울로 왔다. 가족은 용정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서울에서 김대현 장로를 찾아가 인사하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편지의 회답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김익두 목사로부터 온 거였다.

“평양신학교 재개 또는 서울에서의 새 신학교 설립 등등은 모두 선교사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상숭배에 굴종하는 배교행위라는 것이었다.”145)

김익두 목사가 꾸짖음의 소리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었다. 이에 김재준은 어떻게 회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는데 김대현 장로가 불쑥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무어라고 회답하랍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묵묵히 계시다가 전도서 3장 1절 이하의 구절을 펴셨다.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뽐을 때가 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146)

김재준은 선교사의 때와 지금의 때가 같지 않고 때를 따라 헐기도 하고 새로 세우기도 해야 하나님의 새 경륜이 이뤄질 것이 아닌가? 평양신학교를 헐고 조선신학교는 세워야 한다는 때의 요청에 응답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147)

그해 10월 13일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 실무에 들어갔다. 다음해 1940년 2월 9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만 인가를 내주었다. 총독부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 조선신학교 측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조선신학교 측은 1년마다 갱신하는 강습소 인가라도 얻어 신학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강습소 인가는 경기도청의 권한이었다. 인가를 신청한 지 18일 만에 1940년 3월 22일에 ‘조선신학원’이라는 명칭으로 허가가 나왔다.

김재준은 비록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인가였지만 신학교육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였다. 아버지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것이었다. 김재준의 아버지는 3월 23일 별세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장례를 치렀다.

“나는 뒷동산 아버님 묘소 앞에 엎드려 사죄(謝罪)했다. 아버님도 용서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스미스란 사람이 쓴 『Life hereafter』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아버님이 다음 세상에서 더 자유롭게, 더 넓게, 더 많이 생명을 깨달으시고 거기서 더 바른 제2의 선택을 하셨으리라고 느꼈다.”148)

아버지를 기독교로 인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김재준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는 조선신학원 개원이라는 시대적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 4월 개원식과 함께 조선신학원이 시작되었다. 김대현 장로는 원장 취임식에서 김재준의 마음에 깊이 각인될 명취임사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돌봐주신다는 신념을 나는 내 경험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신학교란 간판으로서 처음부터 크게 벌이는 데 두려움을 느껴왔었는데, 이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초라하게 작은 기관으로 출발하게 됐습니다. 나무 자라듯 오래오래 더디 자라는 생명일수록 더 견실한 법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이소성대(以小成大)를 원합니다. 이제 이 작은 조선신학원이 꾸준히 자라 전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에 유명한 신학교로 결실할 것을 확신합니다. 적은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장래는 더욱 견실합니다.”149)

김재준은 김대현 장로의 취임사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그 희망을 구체화시키는 조선신학원 교육이념 5개항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조선신학교로 하여금 복음 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할 것. 2) 조선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3)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현대비판학을 소개하며, 그것은 성예비적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 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해 넣은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의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 모략과 교권의 이용 등은 조선 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러한 논쟁을 하지 말 것.

이러한 5가지 교육이념은 신학교육의 수준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학문연구의 자유와 성서비판학의 수용을 말한 것이며, 교회를 위한 신학임을 나타냈다. 이러한 신학교육은 어디까지나 복음적이며 경건을 수반하며, 칼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던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가르쳤던 신학교육의 수준은 세계 신학에 비춰 봤을 때 현저히 낮은 단계에 속했다.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펼친 정책은 네비우스 정책이었다. 이것은 전도를 통한 기독교의 양적 성장에는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신학의 사상적 발전과 신학교육에는 도리어 걸림돌이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개원을 정말 기뻐했다. 또한 선교사 신학의 한계점, 네비우스 정책의 한계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1940년 4월, 조선 사람의 손으로 조선신학교가 서울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교되었다. 이것은 조선 교회 사상에 있어 처음 되는 기록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이 날부터 참된 의미의 조선 교회가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에 다른 기관은 모두 조선 사람에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신학교만은 기어코 선교사들이 경영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 우월권 주권을 유지하려면 조선 교역자의 질을 선교사 이하의 선에 정지시켜야 될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신학교육을 완전히 선교사가 독점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조선 사람으로서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고 선교사가 일제히 귀국한다는 것은 비록 전쟁에 의한 불가피의 사태라 할지라도 벌써 선교사 집권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150)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개원을 감격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회상했다. 또한 세계 신학의 흐름에 맞추어 자유롭게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꿈을 꾸었다. 실제로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한국인 신학교라는 것은 한국 신학교육사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연 것임에는 틀림없다.151) 이러한 김재준의 신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총독부에서 ‘성경교본’을 만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물론이고 감리교신학교 마저 그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못이겨 구약 강의를 폐강했다. 화살은 김재준에게 날아왔다. “출애굽”, “메시아 왕국” 등의 구약의 중심사상이 그들 이 주창하는 ‘천조대신’의 세계 통치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더 많은 시간을 구약 강의에 할애했다. 그의 구약 강의에는 언제나 형사 한 사람이 따라붙었다. 구약교본대로 가르치냐는 그의 날선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재준은 구약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152)

[각주]

[140]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2』, 265. [141] 평양신학교는 원래 총회 본부와 선교부에서 공동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선교부의 폐쇄 결정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03을 참고할 것.
[142]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344-345.
[143] “김대현 장로님”, 『전집』 제13권, 172-173.
[144]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06.
[145] “김대현 장로님”, 『전집』 제13권, 173.
[146] 위의 글, 173.
[147] 위의 글, 173-174.
[148] “아버님 별세”, 『전집』 제13권, 180.
[149] 50년사 편찬위원회, 『한신대학 50년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1990), 20-21.
[150] 김재준, “한국신학대학의 역사적 위치”, 「한국신학대학보」 3집, (1957), 5.
[151]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서울: 전망사, 1982), 204.
[152] “성경교본”, 『전집』 제13권, 22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