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 청빈(淸貧)사상에 영향을 받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3 09:04
조회
437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청빈(淸貧)사상에 영향을 받다


백부가 운영하는 출판사업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김재준의 서울 생활도 어려워지게 됐다. 장도빈은 《조선지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김재준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한달에 20원씩 주기로 했다. 그 돈이면 밥은 안 굶으리라 생각하고 조수일을 했다. 원고 수집, 편집, 인쇄 넘기는 것, 교정, 서점 배본, 수금 등등을 모두 혼자서 맡아 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조선지광》은 폐간되었다. 매달 약속한 월급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결국 김재준은 하숙집에서 쫓겨났다. 그 밤에 김재준은 눈 내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돈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돈과 어떻게 대결하느냐? ①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남 못잖게 살자. ② 우선 돈을 벌어서 좋은 사업에 쓰자. ③ 애당초부터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淸貧)을 살자. 그중에서 나는 제3을 택했다.……. 톨스토이, 아시시 프란체스코, 그밖에도 비슷한 분들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 같다.”44)


김재준은 이러한 돈에 대한 생각과 청빈에 대한 사고는 그 무렵 그가 읽었던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김재준은 톨스토이, 아시시 프란체스코, 그리고 하천풍언의 고베 빈민촌 생활을 동경하며 일등원 그룹의 무소유 생활도 그려봤다. 이들 모두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살았다. 그중에 김재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였다.


“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탐독했다. 그의 출가(出家) 광경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일품의 탁발승으로 평생을 걸식 방랑한 공(空)의 기록, ‘공’에 회리바람처럼 몰려드는 하나님의 사랑–그것이 퍼져 가는 인간과 자연에의 사랑–이런 것이 나를 매혹시켰다.”45)


김재준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탐독한 후 그의 전기를 정리해서 동경에 있는 송창근에게 보냈다.


“만우도 동경 유학의 길을 걸었다. 동경서 채필근, 강봉우 등과 고학하면서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서울에 있었다. 학자금이 없어서 정식학생으로 등록은 못했어도 도서관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고 꿈도 드높았었다. 만우와의 편지 왕래는 잦았다. 나는 내 창작이랄까 수상이랄까 어쨌든 내키는 대로 적은 글들을 소포로 만우에게 보내기도 했었고, 만우로부터 장공(長空)이란 호를 그때 받았다.”46)


송창근은 김재준이 보낸 원고를 받아서 읽고 난 후 ‘장공’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시 <태양의 노래>에서 따왔다. 송창근은 1926년 8월 29일 <태양의 노래>를 번역하여 《청년》 잡지 1926년 9월호에 게재했다.


“내 주께 찬송을 드릴지라
우리 형제 바람과
태양과 구름과 만 리의 장공(長空)
그리고 사계절을 지으시고
주는 이 모든 것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십니다.”47)


송창근은 이 시에 들어 있는 만 리의 ‘장공’48)을 따서 김재준에게 호로 선사한 것이다. 송창근은 김재준이 앞으로 펼쳐질 무변 광활한 삶을 예견했던 것이다.


김재준은 청빈의 삶을 동경하여 어느 날 중년거지가 추워서 덜덜 떨며 무언가 달라고 했을 때 집에서 보내온 솜바지 저고리를 몽땅 그에게 주고서도 혼자 좋아하기도 했다. 하숙집에서 쫓겨나 밤새 거리를 거닐다 외조카 채관석이 하숙하는 집에 들어갔다. 김재준이 쫓겨난 하숙집에 한 방을 살던 김영구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김재준은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영구는 김재준보다 한두 살 아래였다. 그는 경흥읍 교회 장학생으로 서울에서 공부 중이었는데, 김재준의 사정을 듣고 학비를 몽땅 털어 빼앗긴 이부자리를 찾고 하숙집을 옮겨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구가 장질부사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김영구가 죽기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김재준은 잊지 못했다.


“주님,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무살 될 때까지 주님이 길러주셨는데 아무 한 일도 없이 주님 앞에 가기가 죄송합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주님, 경흥 본 교회를 축복하시고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모든 친구들 인도하옵소서. 제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 축복하시고 여기 둘러선 사랑하는 친구들 위로하옵소서. 저를 치료해 주시던 의사님, 간호원, 심부름 들어주던 일본부인 모두 주님께서 친히 복 내려주옵소서.”49)


김영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김재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김재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재준은 죽음, 내세,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고 타계적인 신앙으로 이끌었다.


“김영구 군의 최후는 나를 타계적인 신앙에로 이끌었다. 세상이란 이렇게 허무하다. 죽음 앞에 무엇이 남느냐? 한줌 재 아니면 흙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믿느냐? 그것은 죽음의 저쪽에 약속된, 영원한 천상세계를 얻기 위함이다. ‘그 약속만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해결이다’ 하는 심경이었다. 종로 네거리 가고 오는 인간들이 ‘산송장’의 꿈틀거림처럼 보였다.”50)


김재준은 김영구가 죽은 지 며칠 후에 승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구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만이었다. 그동안 세례는 하나의 형식이요, 세례받은 신자들에게서 어떤 삶의 변화를 보지 못했던 터라 미뤘던 것이다.


“나는 믿은 지 3년이 넘었지만 세례받을 생각은 없었다.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경험 때문에, 물세례 같은 ‘형식’은 군더더기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세례받았다는 신자, 제직들에게서 별다른 ‘인간 변혁’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형식 불요’라고 항변해 왔다.”51)


그러나 김영구 목사가 예수도 세례받았고, 세례받는 건 예수의 사람 됐다는데 대한 교회로서의 ‘공인증’이라고 해서 늦게야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며칠 후 하숙집에 형이 찾아왔다. 이때 김재준은 만성대장염에 이질, 기침 등이 겹치면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에다가 일본에 가려고 해서 백부가 형을 부른 것이다. 서울에 온 지 3년 만이었다. 김재준은 가족 모두 불신자들이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가는 심정으로 내려갔다. 김재준은 형의 손에 이끌려 창골집에 도착했다. 온 식구들이 대문 밖에 뛰어 나와 반겨주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의 자연인이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이제는 이방인에 둘러싸여 있는 포로 신세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다시 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바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창골집의 자연 환경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황막한 호지(胡地)같이 스산했습니다. 아버님 말씀과 같이 내가 ‘환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52)


김재준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너무나 닮은 인도의 전도자 선다싱의 삶에 주목했다. 1926년 김재준은 《기독신보》에 13회에 걸쳐 성자 선다싱을 발표했다. 선다싱은 회심 직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부친에게 전했다가 냉정하게 배척당했다.53)


“그(선다싱)는 즉시 부친 앞에 달려가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오늘 나는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를 따르며 그를 섬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너무나 돌변한 그의 태도에 놀라서 반신반의하였으나 그때부터 선다의 행동은 전연히 변하여 그리스도교에만 열중하는 고로 그 일로 인하여 가내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나고 선다에게는 여러 가지 유혹과 박해가 생겼습니다.”54)


창골집에 돌아온 김재준은 반년 만에 몸을 회복했다. 성탄절이 됐지만 누구 하나 믿는 이 없어 홀로 솜뭉치로 축하성탄(祝賀聖誕) 네 글자를 쓰고 예수의 오심을 축하했다. 성탄이라는 글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성인이라면 언행에 있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없어야 하는데 예수는 과격한 청년이기에 성인이 아니라고 했다. 김재준의 아버지가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은 그의 음양론(陰陽論) 때문이었다.


“그의 음양론에 의하면 동양은 ‘음’이고 서양은 ‘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인은 양기가 북받쳐서 고요할 줄 모르고 살벌과 정복에 날뛴다. 그러니만큼 예수의 절제, 희생, 십자가 등의 교훈이 필요하다. 그것이 그들의 ‘태과(太過, 너무 과도한)’한 양기를 꺾어 포학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은 ‘음’ 즉 ‘그늘’의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가 온유하고 평화하고 살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의 희생정신까지 덮어씌운다면 동양인은 더 무력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55)


아버지의 지론은 동양이 본래 음인데 거기에 예수의 희생까지 강요하면 동양인은 더 무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서구열강의 세력 아래 있는 조선의 현실에서 아버지는 기독교를 거부해야 했던 것이다. 그 무렵 김 재준의 아버지는 『참서류』 중 『풍수』에 관한 책을 즐기셨다.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정도(正道)’로 지킨다고 하시면서도 참서 같은 ‘이단(異端)’에 끌리시는 아버지의 심경에 ‘구도자(求道者)’의 여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미처 살피지 못한 김재준은 후회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가 김재준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용현학교에 교사로 청빙받아 갔다. 그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벗삼아 책을 읽으며 해방과 자유를 만끽했다. 용현학교에서 반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정이 들었고 주민들과도 가까워져서 보람을 느낄 무렵, 귀낙동에서 학교를 다시 열기로 하고 김재준에게 오라고 했다. 김재준은 고향사람들을 생각해서 귀낙동으로 갔다.


귀낙동 학교는 개화 시기에 창골집 근방 동네가 힘을 모아 큰 기와집을 지어 학교를 세웠으나, 재정난 때문에 개교한 지 3년 만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김재준은 고향 사람들을 생각해서 동네 유지인 강재용에게 ‘서당만 없애주면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서당 문제는 헌병 보조원들이 잘 설득해서 마무리짓고 난 후, 김재준은 서울에 있는 오촌 조카 희용과 김 군과 함께 교과과정을 만들고 초・중・고 세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아이들은 모두 110명으로 김재준이 고등반을, 희용이 중등반을, 그리고 김 군이 초등반을 맡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귀낙동 학교를 연 다음해에 김재준은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청년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었으나 점점 일이 많아져서 학교 옆 김기련 집에서 하숙을 했다. 창골집에서 학교까지 10길을 매일 출퇴근하기에 벅찼기 때문이다. 김기련은 웅기시절 친구로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부인, 외딸이 살고 있었다.


여름 중복 무렵이었다. 김재준은 학교 교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김기련의 부인이 학교에 와서 빨리 피하라고 말했다. 동네 청년들이 예수쟁이 교사를 쫓아내야 한다며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마음이 평안해서 괜찮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차츰 가까워집니다. 그 순간 나는 황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고 기쁨이 넘치고 즐거워졌습니다. 그 기쁨은 내게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로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떠들던 소리는 고요해졌습니다. 그들은 도중에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만 것이었습니다.”56)


김재준은 처음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서 경험했던 성령 체험 이후 두 번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다.


“나는 성령의 내주를 경험했다. 맨 처음 믿기로 작정한 때에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성령의 하늘 위로와 기쁨, 그리고 복음증거 때문에 사람 없는 외따른 집 독방에서 핍박자의 쇄도를 기다리던 깊은 자정에 내 생명 속에 화산처럼 솟구쳐오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의 기쁨이었다.”57)


이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이 날마다 줄었다. 그래도 용감한 아이들은 집에서 혼나면서도 학교와 주일학교를 나왔다. 그동안 김재준이 김기련의 집에서 하숙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남편 없는 집에서 학교 선생이 하숙하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나만 깨끗하면 된 다’는 심정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며느리를 생각해서 단둘이 있을 때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 마음은 깨끗한 줄 안다만, 그런 소문이란 뒤집어보일 수도 있을 것 이다. ‘선생’은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도 여자 문제에 걸리면 억울하게 누명쓰는 경우가 있다. 세상이란 네 생각같이 간단한 게 아니니 그 집에서 나오너라. 그리고 어려워도 집에서 다녀라. ‘결백한데 내가 그 댁에서 나오면 도리어 우습잖습니까?’ 나오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대로 있으면 조언할 기회를 계속 주는 게 된다.”58)


김재준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그 집을 나와 힘들어도 창골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귀낙동 학교에서 학예회를 열었다. 이날 학생들은 노래, 웅변, 암송, 그림, 글씨들을 준비하고 선생들은 학사 보고와 자기반 학습에 대해 소개하였다. 김재준은 아이들을 가르쳐 민족의 미래를 열자는 취지의 연설을 준비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희망이 무엇입니까? 국토・정치・경제・권력・아무 것도 가졌달 수 없지 않습니까? 과거를 자랑할 것입니까? 잃어버린 것을 자랑할 것입니까? 모두 부끄럽고 슬프고 못난 것뿐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백지(白紙)입니다. 우리가 그리는 대로 됩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 민족의 생명이고 꽃망울이고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는 돈 한푼 받는 것 없이 벌써 3년째 이 어린이들을 가꾸고 있습니다.59)


김재준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는 한 면이다. 아버지는 김재준의 연설을 보고 기뻐하셨다. 늘 모기만한 소리가 언짢았는데 웅변조로 했던 연설이 아버지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학교가 다시 활기를 띨 무렵 송창근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할 만큼 했으니 네 공부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동경에 오라는 것이다. 동경 유학중이던 송창근, 채필근, 강봉우 등이 김재준을 동경에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 이었던 것이다. 김재준은 월급 주는 신아산학교로 가서 여섯 달 동안 지내며 동경 가는 여비를 마련했다. 문제는 아내였다. 만삭이 된 아내를 두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간다는 건 무책임한 것 같았다. 신아산을 떠나기 전날 밤, 김재준은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이광수의 『무정』이나 『유정』에서 나오는 달콤한 단어들을 섞어서 많은 말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김재준은 웅기로, 아내는 회암동 친정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둘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웅기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날 밤부터 폭풍우가 몰아치고 매일 비가 왔다. 배를 띄울 수가 없어서 여관방에 머물러야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아내를 보내고 떠나온 길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떠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내리는 비로 우울함만 더해졌다. 앞으로 닥칠 험난한 미래의 징조였다.


[각주]


[44] “하숙에서 쫓겨나”, 55.
[45] 위의 글, 54.
[46] 앞의 책, 387.
[47] 송우혜, 『벽도 밀면 문이 된다』, 생각나눔, 2008, 41-84.
[48] 정대위, “장공 선생의 아호는 진짜로 멋지다. 만리장천(萬里長天)의 무변 광활한 푸른 하늘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글자들, 누가 감히 그 궁창의 높고 크고 밝음을 다 헤아려 알 수 있으랴. 가을 하늘엔 은하수, 성운(星雲)이 아직도 태양계와 같은 우주를 저 멀리 자꾸만 만들어가는 무궁한 창의. 창세기 1장 6-8절의 웅휘(雄輝)로운 묘사와 같이 물과 물 사이에 터진 무한대의 공간, 무변대(無邊大)와 구원(久遠)의 상징.” 주재용, “김재준의 생애”,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풍만, 1986, 19.
[49] “김영구의 죽음”, 『전집』, 제13권, 57.
[50] “김영구의 죽음”, 『전집』, 제13권, 위의 글, 58.
[51] “세례받고”, 『전집』, 제13권, 59.
[52] “조약돌 몇 개”, 『전집』, 제18권, 409.
[53] “성자 썬다싱(二)” 「기독신보」, 1926. 1. 3, 이덕주, 제23회 장공사상연구 목요 강좌, “장공 영성과 한국 교회”, 2010. 9. 10., 14.
[54] 이덕주, “장공 영성과 한국 교회”, 14.
[55]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전집』, 제13권, 62.
[56] “조약돌 몇 개”, 『전집』, 제18권, 410-411.
[57] “내가 믿는 하나님”, 위의 책, 187.
[58] “교사 2년생”, 『전집』, 제13권, 70.
[59] “교사 3년생”, 위의 책, 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