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1장 : 문자에 눈을 뜨다(1901-1915) - 세계와 역사를 보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0 15:57
조회
9

세계와 역사를 보다


김재준의 외갓집은 경원 함양동에 있었다. 그곳에 사립학교인 향동학교가 생겼다. 한말 신문화의 물결이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외사촌 형님 채규표, 채규홍이 경성 함일학교 선생으로 있는 황수봉 씨와 협력해서 학교를 설립하고 인가를 받았다. 교장은 채규혁 씨, 교사는 서울 오성중학교 제2회 졸업한 김희영 씨다. 외사촌 형님들과 김희영 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아버지께 신학문에 대해서 역설하면서 김재준을 신학문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또한 계몽주의 서적도 많이 열독하셨고 개화운동 자체에는 찬동해서 김재준을 그들에게 맡겼다. 외갓집까지 고아산 골짜기 30리 길을 넘어가야 했기에 아버지는 발이 틀까 염려하여 미투리(삼으로 엮은 초신) 바닥에 두꺼운 천 조각을 꿰매어 붙여 주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곱게 빗질하고 새 옷을 입혔다. 김재준은 이때까지 머리 한 번 자르지 않았다. 그 끝이 엉덩이까지 닿은 총각이었다. 외갓집에는 큰어머니(외삼촌댁)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외사촌 형은 ‘우선 머리부터 깎자’며 10년 동안 길은 머리를 잘라냈다. 머리카락을 고이 싸서 짐 속에 간직했다.


김재준은 향동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김재준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었기 때문에 소학교 공부는 쉽게 배울 수 있었다. 학기말 첫 시험을 치를 때 김재준이 1등을 했다. 그동안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인 안학봉이라는 나이든 소년이 1등을 차지했는데, 반촌인 김재준이 1등을 해서 동네 토박이 어른들은 무슨 설욕이나 한 것처럼 통쾌해했다. 졸업 때까지 김재준은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김희영 선생은 김재준의 이질뻘이어서 김재준에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열렬한 민족지사였다. 학생들에게 일반 학문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해서 가르쳤다. 민비살해사건, 한일합방, 개화파 사람들의 활동, 독립투사들의 활동 등을 가르쳤다.


“사천년 역사와 이천만 민족이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느냐? 지금도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 제발 ‘여러분’은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대를 이어 싸우라.”11)


김재준을 비롯한 어린 학생들에게 민족애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선생님이 울면 아이들도 울었다. 김희영 선생은 형편상 회령 탑동 사립 소학교로 전근을 갔다. 하기방학 중에 선생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김재준은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선생은 “아저씨 잘 오셨소. 나는 아저씨를 못 다 가르친, 남은 학기 과정을 며칠 동안에 다 가르치고 갈 테니 염려마오.”12)라고 했다. 김재준은 며칠 안에 한 학기 수업을 배웠다. 그 후 향동학교는 그나마 있던 선생도 가버렸다. 김희영 선생이 내려와서 겨우 졸업식을 치를 수 있었다.


김재준이 외갓집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사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매일 어머니 생각, 고향 창골집 생각에 집에서 가져온 책 궤짝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그리움이 풀리지 않아서 머리가 계속 아파왔다. 졸업식 후 집에 와서도 머리 아픈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역정을 냈다. 머리가 아프면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라는 것이다. 김재준은 머리가 아프면서도 백부가 보내온 책들을 다 읽었다.


“그동안에 서울 백부님이 여러 가지 신간서적과 계몽잡지들을 보내왔다. 『나파론 전사』(나폴레옹 전쟁사), 양계초의 『월남 망국사』니, 잡지 《야뢰》니, 그밖에 수다한 책들이 이엄이엄 도착했다. 나는 골치 아프면서도 그걸 읽었다. 그때 글이란 한문에 토 단 것 같은 것이었지만, 못 견디게 읽고 싶었다.”13)


김재준은 백부가 보내온 책에서 세계와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김재준이 열두 살 초가을에 외사촌 형인 채규홍이 찾아왔다. 향동학교는 폐교가 됐고 고건원에 공립 보통학교가 생겼으니 3학년에 편입하자고 강권했다. 김재준은 다시 외갓집에 머물면서 2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 고건원 보통학교는 외갓집에서 20리 길이다. 걸어서 다니기에는 쉬운 길이 아니다. 학교 가는 길에 오룡천이 있는데, 소낙비가 오면 징검다리가 떠내려 갔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는 살얼음이 섞인 찬물을 맨발로 다녀야 했다. 두 살 아래 외조카 채관석도 같이 학교를 다녔다. 열두 살과 열 살 짜리 어린 학생들로서는 매일 20리길을 다닌다는 것은 보통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 김재준은 이곳에서도 졸업할 때까지 1등을 했고 ‘도지사 상’도 받았다. 이곳 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일본인이 교장으로 있고 한국 선생 두 분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중에 김재준의 담임 최두진 선생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외족이 아니라, 조선민족인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정신들 똑바로 가지고 제 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14)며 민족정신과 민족의 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고건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김재준은 회령간이농업학교를 입학했다. 김재준이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다녔던 학교에서 항상 1등만 했기 때문인지 이번에도 외사촌 형이 와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데리고 간 것이다. 하루에 50리 길을 걸으며 3일 만에 회령읍에 도착했다. 당시에 고무신이 없을 때라 김재준은 솜버선에 짚신을 신고 간 것이다.


집에서 회령까지는 사흘 길이었기 때문에 외사촌 형이 하숙집을 정해주었다. 농업학교에서 김재준은 조선 역사와 민족 문화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를 가르쳤던 최선생은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는데, 조선의 역사, 퇴계, 율곡, 이 충무공 등의 글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김재준은 이곳에서도 성적이 우수하여 최우등상을 탔고 함경북도 도지사 상을 받았다. 그러나 20대까지는 민족의식이 뿌리내린 건 아니었다.


[각주]


[11] “향동학교”, 『전집』, 제13권, 24.


[12] 위의 글, 25.


[13] “집 생각하는 소년”, 『전집』, 제13권, 26.


[14] “고건원 보통학교”, 앞의 책,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