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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1장 : 문자에 눈을 뜨다(1901-1915) - 부모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0 15:52
조회
936

부모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김재준의 집은 대가족이다. 부모와 형님 내외분, 형제, 그리고 일꾼까지 열 명이었다. 중농 살림에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생계에 보탬이 될 겸 사랑방에 초학서당을 차렸다. 열 가호쯤 되는 동네에서 각각 분담하여 사례금을 주었다.

김재준도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 아버지가 가르치는 한문을 배웠다. 아버지가 손수 붓글씨로 써 주신 『천자문』, 『통감』, 그리고 『동몽선습』 등을 배워나갔다. 서당에는 칠팔 세 꼬마에서 십오륙 세, 그리고 이십대 청년들도 가끔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천자문』, 『통감』, 그리고 『동몽선습』 등을 배우며, 청년들은 『시경』, 『서경』, 그리고 『주역』 등 사서오경을 배웠다. 아침에는 전날 배운 것을 복습하고 새로 몇 줄 배우고 낮에는 글씨를 쓰고, 글짓기를 하며 오후에는 큰 소리로 글을 읽었다.

서당은 오래 열지 않았다. 김재준의 형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농사일을 도와주는 아버지가 너무 부담이 크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정원을 가꾸고 풍월을 읊으며 유유자적 여생을 지냈다. 가끔 아버지는 시상이 떠오르면 잠자고 있는 김재준을 불러 자작시를 읊어 주셨다.

“특히 초가을 입추에서 추석에 걸쳐 푸른 하늘, 밝은 달, 맑은 바람, 익어가는 곡식 등등의 계절이면 거의 매일 저녁 불려갔다. 그래서 아예 옆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노라니 나도 풍월을 알 것 같고 풍월의 감흥이 제법 느끼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5)

김재준의 자연에 대한 감상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재준은 서당이 없어졌어도 계속 한문 공부를 했다. 김재준이 여덟 살 무렵, 어느 날 북간도 명동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이십대 젊은이가 김재준의 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그가 아버지 몰래 김재준을 데리고 명동으로 가려고 한 것을 아버지가 눈치 챘다. 아버지는 그를 보내고 서재방에 불러서 “서울 너희 백부님이 내년에는 너를 데려다 공부시킨다고 하셨다. 서울 가야 제대로 공부 될 것 아니냐? 딴 생각 말고 기다려라.”6)고 말씀하셨다. 통감은 이권까지 읽고,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사서를 읽었다. 아홉 살 때 『맹자』를 통독했다.

“당판으로 『논어』와 『맹자』는 각기 일곱 권씩이었는데 다 떼면 일곱 권을 묶어 선생 앞에 드리고 꿇어앉아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암송하는 것이었다. 막히는데 없이 물 흐르듯 내려가면 근엄한 아버님도 만족한 미소를 띠우곤 하셨다. 맹자는 아홉 살 때 통독했다. 그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장이었다.”7)

이 무렵 밤늦게 순회 전도하는 매서인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학자시기 때문에 예수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교를 전하면 아버지는 “나는 孔孟之道하는 사람이오 公平異端이면 斯害也己라 했소.” 한다.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교를 믿으면 이단행위라 내 도에 해롭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이런 대화를 사랑방에서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아버지 편이기에 절대로 예수교는 믿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매서인은 하룻밤을 지내고 떠날 때 쪽복음과 국한문 신약성경을 두고 가면서 한마디 했다.

“이 신약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니 읽지 않으시더라도 버리지는 마시오. 혹시 자손들 시대에라도 믿는 사람이 생길지 누가 알겠소!”8)

매서인이 두고 간 쪽복음서는 형님이 담배를 말아 피울 때 사용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정중하게 제본된 책이어서 아버지는 농짝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김재준은 열 살까지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도와 김도 메고 땔나무도 했다. 하루는 아버지 따라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할 때였다. 아버지를 따라 낫질 흉내를 내가다 낫날에 발목을 베었다. 우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가 부둥켜안고 집으로 내려가서 한약을 발라 치료하였다. 이때 김재준은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안겨보았다. 김재준의 아버지는 한문학에 조예가 깊기도 하지만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나의 소년 시절에 유사 콜레라가 동네마다 퍼져서 구토 설사로 탈진하여 길바닥에 쓰러진 행려가 많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영락없이 죽습니다. 창골집 터밭 기슭에 그런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구토 설사로 뒤범벅이 된 빈사의 낯모를 인간이었는데 아버님은 그 사람을 부축하여 따끈한 온돌방에 눕히고 손수 처방한 한약을 달여 먹였습니다. 그 이튿날 그 길손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은인이라면서 큰 절하고 갈 길을 갔습니다.”9)

김재준은 2남 4녀 중 다섯째였다. 위로 큰형은 김재준과 나이 차이가 많다. 어릴 적 아픈 뒤로 몸이 허약해서 농사일을 할 때면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형수는 김내용의 딸이다. 김내용은 처음에는 능참봉으로 있다가 봉사로 승진했다. 그는 글을 잘하고 풍류와 멋을 아는 미남이다. 형수는 아버지를 닮아서 미인이며 다산했지만 3남 1녀만 남겼다. 김재준의 첫째 누이는 열여섯 나이에 열세 살 김인수에게 시집갔다. 둘째누이는 박춘익에게, 셋째누이는 엄충섭에게 시집을 갔다. 모두 아버지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이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다. 대가족이다.

“나는 유교의 영향 아래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래서 저절로 유교적인 마음이 풍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도 대가족제도 안에서의 독립가정을 생각한다. ‘핵가족’ 시대라지만 혈연공동체를 경시하고 싶지 않다. 형제, 자매, 친척이 좀 더 ‘한 집안 의식’에서 자주 내왕하며 서로 나누며 사는 행복이 아쉬워진다.”10)

김재준이 향동학교에 가기 전까지 모두 함께 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누이들이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 누이들이 시집을 가도 조카들이 하나 둘 생겨나서 그 빈자리를 메우니 항상 대가족이었다.

[각주]

[5] “대가족과 서당풍경”, 『전집』, 제13권, 19.

[6] “외톨이와 풋내기도”, 앞의 책, 41.

[7] “대가족과 서당풍경”, 앞의 책, 20.

[8] “신학이전”, 『전집』, 제18권, 147.

[9] “회향”, 앞의 책, 419.

[10] “첫머리”, 『전집』, 제13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