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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캐나다 이민 생활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6:57
조회
925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94-199쪽.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캐나다 이민 생활

1974년 3월 김재준은 대부분의 자녀들이 이민하여 살고 있는 캐나다로 갔다. 칠순 노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위협 속에서 네 번째 자택연금을 당하는 형편을 염려하여 가족들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제자들과 민주동지들은 캐나다로 떠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여 실망하기도 했다. “이런 난국에 어떻게 이 나라를 떠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비겁한 짓 아닌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싸우라고 버리고 가시는 것인가?” 그에 대한 불만과 궁금함, 그리고 섭섭함과 아쉬움 등이 엉켜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을 잃고 각자 제 본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가졌음직한 허탈감” 같은 것도 느꼈다. 당부의 말이나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이 잔잔히 고인 그의 모습은 공항에서 그를 전송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서글프고 괴롭게 했다. 그리하여 박형규 목사는 김재준이 떠난 뒤 공항에서 전송했던 사람들과 함께 김재준을 생각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64)

“바닷가 모래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의 미소까지도 그렸지마는 아 –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64)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장공이야기』, 263-264

김재준은 캐나다에 머물면서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활동했다. 1974년 3월 국내 출판법에 의해 정간된 『제3일』을 그해 10월부터 캐나다에서 속간하여 1981년 6월 60호를 발행했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 거의 그의 몫이었고 가족들이 도와주었다. 후원금과 구독료도 있었으나 운영자금은 항상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제3일의 논리를 계속 펴나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전기인 『범용기』를 써서 캐나다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은 국내에서 한때 불온서적으로 취급되어 읽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민주인사들의 책을 판매 금지시키고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주를 중심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모임도 결성했다. 1975년에는 북미주 한인인권수호협의회 의장을 맡기도 하고, 1978년에는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을 그리고 1982년에는 북미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북미주 활동을 하면서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그리고 유럽, 일본 등을 누비며 강연도 하고 설교도 하며 때로는 유엔 본부와 워싱턴 거리에서 데모도 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자녀들이 있는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북미주와 유럽 등지를 돌며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70대와 80대의 노인으로 긴 여행을 하면서 독재정부와 대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4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죽음의 위협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이 언제 그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윤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뉴저지 쪽을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가 탄 자동차는 마침 대형트럭을 지나치고 있었다. 평소에는 흥분하거나 큰 소리로 말하지 않던 그가 감자기 차를 멈추라고 당혹스럽게 호령했다. 이윤구는 영문도 모르고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김재준은 대형 트럭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두려운 얼굴로 내다보다가 한참 후에 숨을 돌리면서 “혹시 그 트럭이 한국의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해치려고 보낸 차가 아닐까 하는 육감이 갑자기 들었다”고 말했다.65) 이것은 그의 불길한 육감에 불과했지만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이러한 정신적 위협을 항상 느껴야만 했다. 특히 북미주 지역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김재준이 느끼는 그와 같은 정신적 공포는 당연한 것이었다.

65) 이윤구, 「내 혼 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 님」, 『장공이야기』, 212쪽

1970년대 말 캐나다에 있을 때 북한 사람들이 그에게 북한 방문을 주선했다. 또한 독일을 방문했을 때 스위스 제네바의 북한 대사관에 들러 그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그는 북한 땅에 있는 고향을 방문하고 싶기도 하고,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통일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도 싶었다.

“북한 사람들 말이야,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더라. …… 대사를 만난 건 아니고 북한에서 나온 고위층 사람이라는데 참 점잖고 민족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떠라. …… 나더러 고향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하는거야. 연세도 드셨는데 한번 고향에 가보셔야지요 하고 말이야. 참 따뜻하게 말하는 거야 …… 우리 민족이 서로 적대해서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싸워보았자 누구 좋은 일하는 거겠어? 나는 말이야, 늙은이답게 인간이 만든 휴전선이고 반공법이고 다 무시하고 훨훨 자유롭게 고향에 가보고 싶어. 그리고 김일성을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말이야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대화도 해보고 싶단 말이다.”66)

66) 김윤옥, 「민족 화해의 물꼬 트기를 원하시던 목사님」, 『장공이야기』, 270쪽

그러나 그는 북한 방문을 포기해야 했다. 그가 만약 북한을 방문한다면 한국의 독재정권은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북한 방문을 포기한 그는 사위인 이상철과 함께 “동지들의 의견이 이러니 갈 수는 없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옹졸했다는 평을 면할 길이 없게 됐다”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서 제멋대로 훌훌 돌아다닐 수 있다면 신나겠는데 안내자라는 감시원에게 포로처럼 끌려 다닐 바에야 안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기도 했다.67)

67) 이상철,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장공이야기』,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