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의 삶

김재준 -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의를 위한 투쟁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6:47
조회
115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79-194쪽.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의를 위한 투쟁

한신대학에서 퇴임한 뒤 김재준은 수유리 집에서 지냈다. 갑자기 실직자가 된 그의 생활을 염려하여 그를 존경하는 제자나 지인들이 거의 매 주일 설교를 부탁했다. 교회 창립기념 예배나 목사 위임식 등 교회 행사에도 초청했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도 자주 부탁받았다.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서 원고를 부탁해 오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들과 가끔 여행도 다녔다. 그리하여 퇴직을 했지만, 한가롭지 않게 지냈다.

퇴직한 다음 해인 1962년 어느 날 「대한일보」 김연준 사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논설위원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김연준은 신문 사설이 시사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구차한 코멘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가회 각 분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논설위원직 수락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하여 김재준은 날마다 신문사에 나가 논설회의에 꾸준하게 참여하면서 사설이나 기행문 등을 써서 실었다. 그는 신문이 단순한 보도만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위한 횃불이나 ‘경세의 목탁’이 되어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문 기자는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일보」가 정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그 일을 계속했다. 또한 그는 종교계를 대표해서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을 맡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정부의 언론 탄압이 심하여 단순한 보도만 하도록 강요되던 시대였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하고 신문사로 넣은 압력 때문에 축출당하기도 했으며 깡패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신문사가 말을 듣지 않으면 광고주들을 협박하여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다. 광고는 신문 경영의 생명줄이기 때문에 광고를 막는 것은 곧 신문의 폐간을 의미했다. 힘들여 쓴 기사는 편집국장이나 중앙정보부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다. 5ㆍ16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정치 안정을 시킨 뒤 곧바로 민정 이양을 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으며,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겨우 15만 표 차이로 당선된 박정희는 그런 방식으로 정권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시절 김재준은 주변의 강요로 마지못해 ‘국민재건운동’의 부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추대하는 자리에서 퇴장하지도 못하고 취임의 변을 몇 마디 했다.

“지금 ‘정부로부터 국민에게’라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은 거의 기계적으로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정부에’의 하의상달은 거의 단절됐다. ‘일방통행’은 민주적일 수 없다. 이런 마당에서 이 국민운동이 국민의 의사와 소원을 정부에 전달시키는 ‘하의상달’(下意上達)의 구실을 할 수 있따면 그런 조건에서 취임을 승낙한다. 그것이 안 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

그는 박정희에게 직접 전달한 민의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실망했다. 그러던 중에 현역 장교가 사무국장이 되면서 군대식으로 이 모임을 운영하자 그만두었다.

이 무렵 김재준은 지문각 출판사를 통해 『성서해설』이란 책을 출판했다.(1963년)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성경해설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이루어졌다. 한 달 안에 탈고해 주어야 한다고 다그치는 바람에 급하게 원고를 썼다. 이 책은 창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번역물 이었다. 구약 부분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앤더슨(B.W. Anderson)의 책을, 그리고 신약 부분은 독일의 신약학자 불트만(R. bultmann)의 책을 주로 참고했다. 이 책들은 일반적인 성경 개론서들처럼 성경본문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씌여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김재준도 그런 관점을 따랐다. 이 책은 몇 달 안에 다 팔렸지만, 지문각의 도산으로 인하여 재판을 발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1963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에 백낙준 박사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세계교회협의회에는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교회협의회는 인도 측 인사들의 입김이 세어서 인도항공(Air India)을 이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비행기가 자주 없었기 때문에 동경을 거쳐 인도 봄베이에서 열흘쯤 머물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네바로 가서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는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던 때라 회의에까지 반미감정이 들끓고 미국을 성토하는 장이 되었다. 지루한 회의가 끝나고 혼자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다. 귀로에는 일본에 들러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65년 1월 정부는 우리 젊은 군인들을 월남전쟁에 파병했다. 6.25전쟁 때 월남 의용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데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었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보냈던 것이다. 정부는 다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다. 미국의 극동아시아 군사, 외교정책 중의 하나는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묶어 소련, 중국, 북한과의 대치선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은 1962년부터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간의 각종 현안들인 대일 보상청구권, 평화선, 제일 동포 법적 지위문제 등을 협의하면서 타협하고 있었다. 이에 야당, 학생, 일반 국민들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이 격화되었다.

1965년 7월 초, 김재준은 한경직, 이해영, 강신명, 문재린, 송두규, 이태준 목사등과 함께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계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을 초교파적으로 전개했다. 처음에는 6, 7명에 불과하던 사람들이 점차 늘어 각 교파 교역자들이 거의 가담했다. 그는 성명서, 공개서한 등의 문서를 초안했다. 반대운동 막바지에는 영락교회당 안에서 공식예배와 강연회를 가졌다. 예배 형식이 아니고서는 당국의 집회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었다. 예배당이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한경직은 설교를 하고 김재준은 강연을 했다. 한경직의 설교는 1만 명 가까운 청중들을 울리며 매혹시켰다.

김재준은 강연을 통해 “일본이 일로 전쟁 이전에, 39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단하여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사실과 러시아가 이에 불응하자 일로 전쟁을 준비에 광분했던 사실을 말하고 다음으로 일본은 지금도 침략 야심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군사, 정치 경제의 순차적 지배라는 종전의 순서를 경제, 정치, 군사의 역순서로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금후의 한국은 미국 자본 아래 있는 중남미와 비슷하게 그보다도 더 나쁘게, 일본 경제 침략의 제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 경고했다.”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65년 8월 계엄령 하에서 한일 협정을 맺었다. 김재준은 이러한 협정이 한일합방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한신대학과 기장 총회는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기하기 위하여 김재준에게 몇 가지 직책을 맡겼다. 한신대학은 그를 1965년 4월 명예학장으로 추대했고, 기장 총회는 50주년을 맞이하는 같은 해 9월에 총회장으로 추대했으며, 다음 해에는 한신학원 이사장(1966-1970)으로 추대했다. 그는 총회장으로 일본 기독교단을 방문했다. 그는 그 곳에서 하야네[比屋根], 다까야나기[高柳] 등 옛 스승들과 일제말 조선신학원에서 가르쳤던 미야우찌를 만났다. 그는 환영예배에서 일본말로 연설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경한인교회의 이인하 목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관계의 소외 때문이라고 본다. 모든 은구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간관계가 화해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관계 개선에 중심적으로 노력해야 하겠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물 교류, 연구 재료 교환, 교회사 공동연구, 신학생과 신학 교수 교류, 안식년 해당 목회자 초청 목회 실습과 시찰, 공동 선교 그리고 이런 사업을 가능케 할 기금 설정 등등이 있을 수 있다. 한일 관계에서 일본 교회의 ‘사회와 속죄’ 운운하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통해 하나님은 이미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죄과를 용서하고 친교와 협동을 당부하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일본 교회로서는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태도 개선, 일본 국가의 성격 갱신에 중점적인 선교 목표를 두었으면 하고 기대한다…….”

김재준은 그 길로 캐나다로 가서 몬트리올 맥길신학교에서 열리는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에 고문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이 대회에 참석하면서 이방인과 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회의에서 논의되는 내용이 부유한 서구 사회와 수천 년 지내오면서 성숙한 서구 교회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부조리한 한국의 현실과 아직도 전통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를 생할할 때에 이런 논의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69년 박정희는 집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헌법을 고치려 했다.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2번 이상 못하게 되어있는데, 그 헌법에 손을 얹고 선서한 그가 이제 헌법을 고쳐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62) 준비위원회가 모이던 날 친구인 김상돈이 집으로 찾아와 자기 차에 태우고 데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곳에는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꽈 차 있었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에 들어갔는데 의장을 뽑는다고 공천위원회가 구성되고 김재준이 의장으로 호명 되었다. 그는 두세 번 거절했으나 이 모임은 한 달 후에 있을 정식 발기인 대회 준비에 불과하다고 강청해서 그때까지만이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62) 김재준은 훗날 이 모임을 통해 자신의 사회참여의식이 강화되었다고 고백한다. “나의사회참여의식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때부터 강화되었다. 그 전에는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것이 ‘짐’(burden)이 되어 나를 누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김재준, 「범용기」, 4쪽)

한 달 뒤에 정식 발족한 투쟁위원회에서는 그를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사퇴 운운하는 것은 박정희 앞에서 약점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말하지 않았다. 실행부가 모일 때 사퇴하고 퇴장까지 했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모이지 못한다고 해서 다시 들어가 계속했다. 자신은 정치에 야심도 없고 사회적인 명망도 있으며 자유 민주주의에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의장으로 추대했다고 생각했다. 즉, 모임을 위하여 그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응결력이 된다면 기꺼이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람의 사회생활이란 이용당하면서 이용하는 양면이 함께 있다는 것을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인테그리티(Integrity)를 지킬 줄만 알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재준이 투쟁위 위원장직을 맡자 청와대 측은 「대한일보」 김연준 사정에게 압력을 넣었다. “당신 신문사 논설위원이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이라는데 사장으로서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김재준에게 논설위원직을 계속 맡기고자 고심하다가 마침 런던에서 열리는 YMCA 세계대회에 김은우 논설위원과 함께 여비를 주어 보냈다. 청와대의 압력을 피하기 위하여 외국에 잠시 나가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그 회의에 참석하고 런던에 열흘쯤 머물다 자녀들이 있는 캐나다 토론토로 갔다. 토론토에 도착하자 강원룡에게서 빨리 귀국하라는 전보가 왔다. 투쟁위원회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는 이튿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투쟁위에서는 국회투표를 몇 주일 앞두고 대규모 시민집회를 열었다. 효창공원에서 열린 6만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는 장준하가 사회를 보고 김재준이 개회사를 했으며 야당 정치인들이 연설을 했다. 특히 김대중의 연설은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시가행진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김재준은 서대문 구치소로 면회를 갔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고?”
“괜찮습니다. 고생이 무슨 고생입니까? 저희 걱정은 마시고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주십시오. 나가면 저희도 또 하겠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지만 명랑하고 씩씩하게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바로 한국의 소망이라 생각하며 고마워했다.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밤낮 의사당에서 농성을 하고 회의진행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장인 이효상은 밤 12시에 집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공화당 의원 몇 사람과 함께 뒷문으로 나가 길 건너편에 있는 제3별관으로 갔다. 제3별관은 앞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뒤로 돌아 판자로 된 뒷문을 뜯고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3선 개헌안 통과라고 속사이며 방망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이들은 각 신문사에 통고하고 도망쳤다. 박정희의 지령대로 날치기 통과를 시킨 것이다. 박정희는 새벽 3시에 이 안에 서명한 후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이어진 국민투표도 엄청난 부정과 조작으로 치러졌다.

민권투쟁위원회 경기도 발기대회에. 김재준은 5.16 군사쿠데타로 한신대 학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난 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점점 더 깊이 관련되어 갔다.

박정희의 의도대로 3선 개헌안이 통과되니, 이제 투쟁위의 목표는 사라졌다. 따라서 부득불 위원회를 해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쑥스러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김재준에게 함께 정당을 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고 거부했다. 침통하고 좌절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해체식에서 김재준은 위원장으로서 간단하게 인사했다.

“이제부터 장기적인 국민 민주화 계몽운동에 각자 있는 고장에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에 미력이나마 장기 봉사할 작정입니다.”

김재준의 투쟁위 활동을 두고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는 말도 많았다.

“목사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목사가 왜 정치인들과 어울리느냐?”
“순수하게 교회 지도자로서 호소하면 함께 할 수 있지 않느냐?”
“투쟁위라는 이름에서 ‘투쟁’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인의 성미에 거슬린다.”

그럴 때마다 김재준은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 정부에서 하는 대로 하는 친여적인 형태는 정치가 아니고 정부의 잘못을 충고하는 것만이 정치 관여냐?” “헌법은 국민이 자기들 주권을 수호할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에 그걸 양보 또는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의 양보 또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를 위한 투쟁을 회피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려 왔노라 하지 않았는가?”

투쟁위 활동을 할 때 김재준은 기독교계 월간 잡지인 「기독교 사상」 주간으로 있는 박형규 목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박정희가 아무래도 3선개헌을 해서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것 같다. 지금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군부 독재하에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잡지를 통해 개헌반대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제자들을 길렀는데 막상 이런 위기에 처해서는 선생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면서 제자들에 대한 섭섭한 심정도 내비쳤다. 그리하여 박형규는 그 다음 달 호에 ‘개헌론’이라는 특집을 꾸미게 되었고, 개헌반대논쟁에 참여했다.63) 또한 박형규는 김재준에게 이문영, 서광선, 현영학, 이극찬, 홍동근 등 자기의 친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1970년 9월에 창간한 『제3일』이라는 잡지의 동인으로 함께 일했다.

63) 박형규, 「장공과의 만남과 억지 제자의 변」, 『장공이야기』, 333-334쪽.

김재준이 동인들과 함께 『제3일』이라는 잡지를 간행하게 된 것은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의 해방 직후 질식할 것같이 답답한 시절에 작은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마음에서 혼자 간행했던 『십자군』이라는 잡지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6.25이후, 4.19와 5.16을 거쳐 오늘에 이른 한국은 이제 무엇인지 석연치 않은 데가 너무 많다. 경제가 놀랄 만큼 성장했다는데 사계(斯界)의 소식통들은 텅 비어있다고 한다. 고층건물이 날마다 올라가지만 그건 변태현상(變態現像)이라고도 한다. 민주주의라는 간판은 있는데 민주정신은 어느 지상에서 증발(蒸發)했는지, 어느 지하에서 새어 나갔는지 자취가 날로 희미해진다. ‘자유’라는 단어는 간접침해(間接侵害)랄까 음성압력(陰性壓力)이랄까 하여튼 무언가의 중압 때문에 저절로 위축(萎縮)되어 간다. 하나님의 의(義)와 사랑을 대언(代言)한다는 교회도 대체로는 꿀 먹은 벙어리같이 포만(飽滿)해 있다. ‘복음’이란 것은 역사에서 유리(遊離)된 전당에의 자장가인 줄 생각하는 신자가 많다. ‘사랑’은 불의에의 관대(寬大)라고 오전(誤傳)한다. ‘평화’는 충돌회피라고만 생각한다. 기골(氣骨)없는, 얌전하기만 한 행동보류(行動保留)가 신자의 높은 덕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복음’같이 전투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악의 세대에서 ‘사랑’, ‘평화’, ‘정의’ 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수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3일’을 약속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같은 뜻을 모아 이 ‘작고 고요한’ 소리를 『제3일』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그가 『제3일』이라는 잡지의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제3일에 있었던 예수 부활의 희망이 우리 민족에게도 피어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 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다음 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하고 무덤을 해친다. 예수에게서 이 ‘제3일’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해치고 영원에 작열한다. ‘제3일’,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

19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대결하는 국민투표일을 앞두고 서울 종로 YMCA 회관에서는 민주수오국민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여기에서 김재준은 이병린, 천관우, 함석헌, 지학순과 더불어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 협의회는 박정희의 독제에 대한 항거와 부정불법선거에 대한 경고, 그리고 국민투표에 대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촉구하기 위한 결의문도 채택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온갖 금권, 관권 등을 동원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을 94만여 표 차이로 겨우 이겼다. 그리고 그 해 12월 대통령 권좌에 불안함을 느낀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구속, 수감, 가택 연금 등 탄압을 자행했다. 또한 다음 해인 1972년 12월에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구회 해산, 정당정치활동금지, 집회금지, 언론보도 사전검열, 대학 휴교, 군법회의 설치 등을 강행하면서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이것은 자신이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영구통치를 하겠다는 의도였다 1973년 12월 백낙준, 함석헌, 김재준, 유진오, 이인, 천관우, 지학순, 김수환, 한경직 등 기독교계와 사회 각 계층 원로 15명이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을 자유민주주의 국민헌법으로 되돌려놓으라는 건의서와 면담 요청서를 보냈지만, 박정희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이를 무시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준은 1971년부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할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기관원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