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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8] 신학교육의 마지막에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6:24
조회
1159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61-178쪽.


[8] 신학교육의 마지막에

6ㆍ25전쟁이 끝난 후 한국신학대학이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 동자동 캠퍼스로 복귀하자, 김재준도 상경했다. 동자동 교정과 살던 집은 난리를 겪은 것치고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교실은 붕괴 직전이어서 통나무를 지주로 세워 받쳤다. 쓰레기통이 되었던 우물도 청소를 해서 맑고 시원한 물이 고였다. 그가 살던 사택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창문은 부서지고 책과 가구도 다 없어졌지만 그런대로 수리하여 쓸 수 있었다.

담임목사로 있는 경동교회도 재건해야 했다. 부서진 예배실을 수리하고 필요한 비품을 마련하는 데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학교일에 전념하고 교회는 강단을 맡는 정도였기 때문에 심방이나 모든 교회일은 교인들이 맡아 했다. 교인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예배실로 쓰던 기숙사 2층을 넓혔고 그래도 감당할 수 없어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이때 설계도를 공짜로 그려주는 건축사가 있어 도움을 얻었다. 건축헌금이 모자랐지만 마포교회 장로이자 실업가인 김병문 씨가 경동교회로 옮기면서 이를 메워 주었다.

학교, 교회, 집 등을 재건하는 와중에도 김재준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비난과 비방은 거세어졌다. 갖가지 악성루머도 있었다. 김재준은 성경에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씌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탄생설화를 후세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예수의 기적이나 부활과 승천 등을 믿지 않는다. 성경무오설을 부인한다. 선교사를 배척한다 등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김재준은 성경파괴자이고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라며 선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몇몇 순진한 교인들은 김재준을 ‘마귀’라고 생각하여 무서워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전쟁 때에도 김재준이 공산당 선전원 노릇을 한다, 이북을 다녀왔다, 적기를 들고 가두행진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등의 유언비어도 있었다. 하루는 부산에 사는 어떤 교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는 하나님께 밤낮 없이 간구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김재준을 하루속히 불러가 주십시오’ 하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6ㆍ25가 터져서 목사님들이 모두 부산 지방에 피해서 생명을 보전했습니다. 그러나 김재준은 서울에 남았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나 보다’하고 흐뭇해 했습니다. 그런데 또 살아있다니, 이제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 목사를 죽여 달라고 기도했다는 평신도의 편지내용은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재준에 대한 유언비어가 일선 목사들을 통해 강단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유포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목사들 중 세계 신학의 조류에 무지한 자들이 근본주의 신학을 얼마나 맹종했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재준은 전국을 돌며 진실을 알리는 순회강연을 하기도 했다.

1954년 캐나다 연합교회 외지 선교부 총무인 갈리하가 한국에 왔다. 그는 한신대학의 교사 신축비로 1만 달러를 지원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김재준은 부통령이자 한신대 학장이던 함태영, 이사장 김종대, 캐나다 선교사이자 한신대 교수인 스코트 등과 함께 학교 이전 부지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러다 수유리 화계서 부근에 일본인들이 고급 주택 후보지로 확보했다가 버리고 간 귀속 재산이 있음을 알고 이를 불하받았다. 설계비도 받지 않은 강윤 건축사, 인천 판유리공장 최태섭 장로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3년여의 공사 끝에 수유리 캠퍼스를 마련했다. 그러나 교직원 사택과 기숙사는 아직 없었다.

1957년 수유리 캠퍼스를 마련하고 동자동 캠퍼스를 매각하자, 학교 사택에 살던 그는 갈 곳이 없었다. 1954년 5월부터 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누군가는 캠퍼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먼저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마침 학교 대문 안 개천가에 옛날 빈농이 살던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단칸방에 장판은 있었지만 불은 안 들었다. 천장에는 쥐들이 밤새 소란을 피웠다. 화장실도 거적때기를 반쯤 두른 것으로 참으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김재준은 대장염, 이질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엑스레이 촬영을 한 의사들이 위암을 의심하면서 수술하려 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두 달 만에 몸을 회복하고 퇴원했다. 과로와 불결한 환경 때문에 지치고 아픈 몸을 쉴 수 있는 기간이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집에 돌아 온 그는 쥐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으며, 이후로 쥐들은 사라졌다.

퇴원하기 직전, 캐나다 연합교회 갈리하 총무가 다시 방한했다. 그는 방한중 김재준을 문병하면서 건강을 위해서 캐나다에서 1년간 요양할 것을 권했다. 왕복여비, 1년간의 유숙비와 잡비는 캐나다 측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갈리하는 총회와 학교 이사회에도 말하여 허락을 받아 주었다. 그리하여 김재준은 1958년 여름 캐나다로 갈 수 있었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캐나다의 각 교파가 에큐메니칼 정신에 의하여 통합된 하나의 교단이다. 이 교단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각국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역을 분할하는 협정을 맺을 때 함경도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기로 하여 해방 전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었다. 그들은 미국의 북장로교나 남장로교의 선교사들보다 신학적으로 훨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리하여 김재준이 장로교 총회에서 목사직을 제명당할 때에 이를 부당하게 여겼고, 김재준과 한신대, 그리고 기장 측에 선교 협력을 아끼지 않고 지지와 지원을 보냈으며, 1955년에는 기장총회와 동등한 조건으로 선교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신학적으로나 교회정치에 있어 선교사들로부터 자유롭고 자립적이어야 한다는 김재준의 사고가 반영되었음을 물론이었다. 또한 김재준과 오랜 친분관계에 있으면서 그를 믿고 지지해 준 스코트 선교사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캐나다로 가기 전 김재준은 막내딸을 결혼시켰다. 또한 그가 세운 경동교회의 담임목사직도 제자인 강원룡 목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는 홀로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에 1년간 머물면서 그는 주로 토론토의 YMCA 본부 숙소에서 지냈다. 그러면서 캐나다 연합 총회, 중서부 지역의 대화(conference), 해외 선교부 연차 대회 등에 참석했다. 총회에 참석할 때에는 폐회 직전에 연설할 기회도 얻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교에 관해 짧게 언급했다.

“교회는 선교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선교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선교의 개념과 방법에 창의적인 재정리와 재고가 요청되는 것뿐이다. 한국 교회 자체도 선교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선교할 고장이 반드시 외국이어야 할 필요는 없겠다. 그 비용과 부담이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한국 안에도 복음이 증거 되지 않는 고장이 많다. 전라도, 경상도 해안에 흩어진 크고 작은 섬들, 강원도 산골 - 거기에 버림받아 못 사는 백성, 도시 변두리의 빈민촌 - 우리 바로 이웃에도 우리의 선교 지구는 수두룩하다. 그리고 38선은 미래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적격자를 뽑는 ‘시험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공동체로서 기독교회는 총 연합하여 책임적인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한다. 38도선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특히 미래 세계의 문제이다…….”

그는 총회와 남선교회, 여선교회 등으로부터 청주 세광고등학교 교사 건축비 6만 불, 한신대학 교사 신축비 3만 불, 총회 선교비 3만 불 등을 모금하기도 했다.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와 선교부는 기금을 지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①우리 선교부서로는 최선의 성의를 보인 것이며 어려운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다고 해서 한국 교회에서 마치 캐나다 연합교외에는 일 년 열두달, 돈이 주렁주렁 열리는 ‘돈 나무’라도 있는 것같이 생각하면 큰일이다. 그런 착각이 없기를 바란다. ②총회에 나가는 돈은 어떤 특정 사업에 집중적으로 써주기를 바란다. 각 지 교회가 골고루 나누어 가진다면 한 교회에 몇 십 불, 몇 백 불밖에 배당되지 않을 것이니 흐지부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나 단체에 집중적으로 투입된다면 그 교회나 기관은 그 돈을 밑천으로 자립·자활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후일에 우리가 가서 보더라도 한 놀라운 기념탑이 될 것이고 우리도 자랑스러울 것이다.”

김재준은 캐나다 연합교회 외지 선교부 총무인 갈리하 박사의 주선으로 벤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까지 김재준은 박사학위가 없었다. 웨스턴신학교에서 받은 석사학위가 전부였다. 그래서 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젊은 교수들의 위세를 떨치던 1950년대 중반, 박사학위가 없다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외국 박사 학위를 가지고 모 일류대학에서 봉직하던 젊은 교수는 공개강의 석상에서 “김재준 목사님은 교육자인지는 몰라도 학자는 못 된다. 그는 독일어 원서도 못 읽는다”는 유치한 말을 내뱉게도 했다. 그것을 들은 그의 제잗릉느 화가 나서 찾아와 성토했지만, 김재준은 담담하게 “그 교수 말이 맞다. 나는 학자는 못 돼! 독일어 공부를 한다, 한다 하면서 차일피일 게으름만 피우고 여태껏 독일어 원서를 자유롭게 읽지 못하거든!”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54)

54) 이우정, 「날마다 죽음을 사는 심정으로 사신 분」, 『장공이야기』, 67-68쪽.

1959년 9월 귀국한 그는 그 달 22일에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학장 취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왜 새삼스럽게 학장 취임식을 이제 하느냐고, 사실 그는 그동안 학장직을 맡지 않았다. 조선신학원 세우는 데 기여했고 그동안 학교의 정신적 지주이자 기장 교단의지도 세력이었는데도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송창근이 납북된 뒤 학장직을 계승한 함태영 목사는 부통령직에 있는 동안에도 학장직을 계속 맡았었다. 그리고 김재준은 1954년부터 지금까지 부학장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한신대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붙여준 김재준의 별명은 '천지'(天地)였다.
천장과 강의 노트만 번갈아 보면서 강의했기 때문이다.

김재준의 학장 취임과 더불어 학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곪아온 비리가 터지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학교는 대한민국 부통령 함태영이라는 “이름만의 거물 학장 밑에서 학교의 재정과 운영이 말로는 이사회의 책임 아래에 있다고 하나 처리되기는 서무과장(조선출 목사)이 손으로 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학교장, 이사장의 인장을 자유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대담하고 불성실한 행위가 점점 노출되어 학교는 큰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그 중에도 경리 비리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김재준은 경리책임자를 두둔하려다가 학장으로서의 책임을 추궁당해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55)

55) 전경연,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분」, 『장공이야기』, 368쪽

김재준은 학장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1년 동안 캐나다에 머물 때 모금한 돈으로 인하여 학교와 총회가 시끄러워졌다는 것을 알고 매우 실망스러워했다. 신학교육의 자유와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새로 태어난 기장 총회와 한신대였건만, 캐나다 교회가 보낸 헌금을 통해 이익을 챙겨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신대학에 보낸 3만 불은 조선출 목사가 부산 수입 창고에 있다고 하는 ‘애자’(전신주에 쓰는 물건)를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면 된다는 거간꾼의 말을 믿고 줬다가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에 대해 총회와 학교 이사회, 설립자, 교수 등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갈등을 일으켰다. 여기에 교회정치가 개입되고 지방색이 나타나 지저분한 싸움으로 번졌다.

총회에 보낸 보조금 2만 불을 놓고도 분쟁이 일어났다.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던 돈은 여기저기 나뉘어졌고, 못 받는 교회에서는 왜 안주냐고 따졌다. 한신대에 보내 온 또 다른 3만 불을 놓고도 총회에 먼저 넣으라는 둥, 김재준이 맘대로 한다는 둥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돈을 놓고 싸우는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그는 개탄했다.

“나는 기장 교회들의 조속한 건설과 발전과 자립을 위해 밤낮 염원을 올렸다. 돈만 있으면 문제없이 여름 초목처럼 무럭무럭 자라리라 믿었다. 그래서 큰돈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얻어왔다. 돈과 함께 탐욕이 따라왔다. 전에는 가난해도 긍지를 갖고 의좋게 돕고 같이 걱정하고 격려하던 동지 목사들이 이제는 아웅다웅 싸운다. 교권 욕이 풍선같이 부푼다. 신학교도 총회도 마찬가지다. 돈을 얻고 친교를 잃었다. 욕심이 사랑을 먹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교회는 역시 은혜와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은혜와 진리가 교회의 양식이요 그 터전이다. 교회는 ‘맘몬’의 사동(使童)일 수가 없다. 돈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돈을 쓸 줄 아는 능숙한 청지기에게만 적용된다.”

그는 너무 괴롭고 좌절감에 휩싸여 학교를 떠나 은거했다. 전남 광주 백운산 계곡에 있는 평심원이라는 요양원에서 얼마 동안 지냈다. 그는 거기에서 한신 학생을 만났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소명감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소명감을 얻으려고 혼자 산에 들어가 철야기도도 해보고 난신고행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했다. 김재준은 이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네가 네 본위로 하나님을 불러 내리려는 것은 오만하다. 그건 너 자신을 위한 ‘영적 탐욕’이다. 믿음이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풀 자라듯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성장하고 열매 맺는 장기 공작이다. 지금은 초조하고 불만스럽고 의혹에 차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믿음 자체를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된다. 그런대로 꾸역구역 계속 하노라면 긴 세월 안에서 몰래 몰래 자라는 것이다. 신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라.”

그 뒤 그 학생은 신학교에 돌아가 졸업하고 좋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한다.56)

56) 신종선, 「지금도 마음 속에 깊이 살아 계시는 분」, 『장공이야기』, 136쪽 김재준은 『범용기』에서 이 학생이 신종선이라고 적고 있으며, 그와 소명감에 대한 상담은 한 적이 있지만 평심원에 간적은 없다고 하면서 기억의 착오라고 추정한다.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권(强勸)이 커져갔다. 하는 수없이 서울로 오기는 했지만 한신 캠퍼스에 들어가는 것ㅇ느 싫었다. 그리하여 경동교회 창립 교인이자 실업가인 신당동의 박억섭의 저택에서 지냈다. 피곤할 때면 언제든지 와서 쉬라고 했는데 이제야 편하게 정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신학생들이 들이닥쳐 남치하다시피 택시에 태워져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 복귀한 지 얼마 후 그는 맹장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정준, 조선출을 불러 애자사건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너무 소심하고 옹졸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나서지 못해서 더 큰 고통을 겪게 한 것을 많이 후회했소. 도리어 자기변명의 해명서 내기에 급급했으니 부끄럽기 한이 없소 마음에 두지 말고 용서해 주기를 바라오.”57)

57) 강신정, 「그리스도의 발자국만을 따라 사신 분」, 『장공이야기』, 18쪽.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학교 행정의 책임을 맡은 자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이것은 애자사건 때문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번민했던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애자사건으로 학교가 시끄럽던 때 4ㆍ19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연락이 제대로 안 되어 4월 25일 대학 교수단 데모 날에야 시내에 들어가 행진대열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는 시청 앞 광장 연좌데모 학생들이 “민주국가 건설하라”, “매판자본 물러가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이 시민들에 비하면 얼마나 선각자인가를 마음속 깊이 느꼈다. 이때만 해도 그는 훗날 박정희정권 등에 항거했던 ‘정치의식’은 없었다.58)

58) 안병무, 「현대를 그대로 호흡하는 사상가」, 『장공이야기』, 345쪽

4ㆍ19의거가 지나고 학교가 정상수업을 하던 날 오랜만에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 김재준은 설교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어제할 수 없었다. 평소 목소리도 크지 않고 발음도 분명하지 않았는데 이제 울면서 설교를 하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설교가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 기성인들을 용서해 달라. 너희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가 길거리에 나서지 않게 하마. 너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나서겠다. 너희는 이제 공부해 달라.”59)

59)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장공이야기』, 260-261쪽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부인 공덕귀 여사와는 오랫동안 아는 사이였다. 공 여사는 송창근 목사가 김천의 황금정교회에서 시무할 때 전도사로 동역했고 한신대 여자부 사감 겸 강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었으니 오랫동안 맺어 온 인연이었다. 윤보선 대통령 또한 피난 시절 한신대를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즉석에서 달려가 축하를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경무대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의 성미와 잘 맞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용기를 내어 드디어 경무대를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 단 둘이 대좌하는 내내 장면 국무총리가 국사를 자신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불평만 듣고 돌아왔다.

장면 정권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김재준은 장면이 군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고 느꼈다.

“8ㆍ15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진짜 공정 선거를 거쳐 민의를 대표한 정부는 장면 정권이 처음이 아니었던가! 그 정권은 장면 개인의 것이 아니요 국민의 정부가 아닌가? 그러므로 반란 군인들이 아무리 협박한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그 정권을 반란자들에게 송두리째 내줄 권한이 그에게 과연 있는 것인가! ‘역적 반도야 물러가라! 나는 삼천만 국민으로부터 위인 밭은 나라의 주권을 역적에게 내어 줄 수 없다!’ 고 호통 한 번 하고 죽었어야 할 것이 아니었는가! 인간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숭고한 절개적 행동이지만, 고려 말 사육신들을 따라 행동할 수는 없던 것인가!”

5ㆍ16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은 김재준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이해 9월 전국 대학의 총ㆍ학장 중 만 60세 이상 된 사람은 모두 사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국의 대학을 장악하려는 군인들이 교육법이나 학교의 정관 등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해 9월 26일에 만 60세가 되니 강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을 지켜온 한신대학, 이제 학장으로서 학교를 위해 열심히 일해보려던 때의 타의에 의해서 학교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 당시 딸 셋은 이미 출가했었지만 아들 셋은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도 없이 학교 사택에 살고 있었지만 이제 학교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다행히 수유리 하천 부지에 새로 지은 간이 주택이 있어 그리로 이사를 했다. 82평의 집터에 건평이 14평이니 정말 작은 집이었다. 건넌방 서재는 작아서 많은 책들을 제대로 놓을 수도 없었고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돈이 없어 입주금 얼마를 우선 내고 매달 그 나머지를 나누어 갚아 나갔다.

김재준은 집 한 채 없이 가난하게 교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그가 가난했던 이유는 젊어서 성 프랜시스를 동경하여 청빈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서울 유학 시절부터 미국의 웨스턴신학교에서 그의 신학수업을 마칠 때까지 고학으로 공부했다. 고학은 곧 고생의 연속이었다.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 중에 공부한 김재준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냥 있지 못했다. 돈이 없어 등록을 못하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대신 내어주거나 밥을 굶는 학생들의 식비를 보태주었다. 그것도 드러나지 않게 돕곤 했다. 그래서 그의 가난은 청빈(淸貧)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도와 준 숱한 일화들 가운데 하나만 들어보자.

한 학생이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면서 하직 인사를 하러 김재준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에 1년간 요양하러가 있었다. 이 학생은 작별의 편지를 써서 캐나다로 보냈다. “캐나다에 계시는 김재준 목사님께 …… 더 이상 공부할 형편이 못 되어 고향에 내려가려 하는데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후 기숙사에 있던 그를 서무과장이 찾았다. 서무과장은 항공우편 하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거 큰일났다. 학장님이 캐나다에서 조원길 학생에게 이달분 월급을 등록금으로 내주라 하시면서 도장까지 찍어 이렇게 보냈으니 학장님의 가족들은 이 월급을 기다리고 있는데 큰일났다.”

김재준은 학장 월급으로 이 학생의 등록금을 대납하라고 인감도장을 찍어 위임장을 보낸 것이다. 그 학생은 그 돈으로 등록하여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60)

60) 조원길, 「장공 목사님의 퍼주기식 제자 사랑」, 『장공이야기』, 226-227쪽

김재준의 돈에 관한 이러한 태도 때문에 가족들은 무던히도 고생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그는 가족들에게 무능한 가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분여 사모의 고생은 누구보다도 컸다. 이런 일화가 있다.

김재준의 얼굴을 모르는 타교 학생이 특강 강사 교섭을 위하여 수유리 한신대 사택인 그의 집을 찾아갔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약속도 없이 찾아갔다. 허술한 집 주변의 텃밭에는 허름한 옷을 입고 채소를 가구고 있는 식모 할머니 같은 분이 있었다.

“김재준 목사님 계십니까?”
“지금 안 계십니다.”
“그럼 사모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그 할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고 옷을 여미며 말했다.

“내가 목사님 부인이오.”

가난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분여 사모에게 김재준은 하늘이요, 천사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목사 중에서 부인으로부터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분은 아마 김재준 목사일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61)

61) 김호식, 「너희들에게 득이 된다면 나를 이용해도 좋다」, 『장공이야기』, 3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