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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5] 조선신학원 교수 : 조선신학원은 세워야 한다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4:40
조회
1239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02-118쪽.


[5] 조선신학원 교수 : 조선신학원은 세워야 한다

장로교회 총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신학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와 연결되어 지역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한편에서는 서북 지방인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상도의 대구 지역이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에 적극 동조하면서 총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적인 신앙을 옹호하는 서울, 경기 지역과 이에 동조하는 호남 지역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지역적 색채는 일반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신학적ㆍ지역적 갈등이 교회 안에 심화 안에 심화되는 동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도 거세어졌다.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사참배 참여해야 했다. 일제의 집요한 공작과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라고 주장하면서 선동했던 박응률, 이승길, 김일선 등 일부 목사들의 주도로, 장로교 총회는 부끄럽게도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 참여를 가결했다.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목사 등과 선교사들은 반발은 거셌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선교사들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이미 지난 3월에 폐쇄했고, 평양신학교도 5월에 무기 휴학을 선언한 상태였다.

장로교회 총회가 끝나고 얼마 뒤, 선교사들은 총회 본부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평양신학교를 폐쇄시켰다.30) 이러한 결정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선교사들의 불쾌감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평양신학교를 폐쇄한 뒤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한국인 교수로 있던 박형룡, 남궁혁도 망명했다. 단 하나밖에 없었던 한국 장로교회 목사양성기관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30) 평양신학교는 원래 총회 본부와 선교부에서 공동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선교부의 폐쇄 결정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평양신학교가 폐쇄된 다음 해인 1939년에도 선교부가 신학교를 재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평양과 서울에서는 거의 동시에 신학교 개교 내지는 신설 움직임이 일어났다.31) 먼저 평양에서 1939년 3월 3일에 총회 신학교육부가 모여 평양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운영하기로 하고 선교부에 이를 청원하였다. 여기에는 평양신학교의 건물과 시설들을 넘겨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부는 이를 거부했다. 신사참배 가결로 선교부의 신뢰를 잃은 총회가 평양신학교의 재산을 내놓으라고 한 것은 무리였다.

31)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344-345쪽.

서울에서는 비슷한 시기인,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는 신학교 설립을 위해서 50만원(당시 미화 25만 달러)에 상당하는 부동산과 경상비 10만원을 헌금했다. 김대현은 원래 전당포를 소규모로 경영하였지만, 영등포 쪽에 사놓은 부동산의 지가가 뛰어 벼락부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신앙심이 돈독하여 십일조를 김필헌(金必獻)이라는 이름으로 저금했는데, 반드시 헌금으로 바친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기성회뿐만 아니라, ‘창립준비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위원장에는 채필근 목사, 실무에는 송창근 목사가 맡았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설립 추진은 쉽지 않았다. 신학교 설립에 대한 교회 안의 여론 분열 때문이었다.

한편에서는 신학교를 재개하거나 설립하는 것이 선교사들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상숭배에 굴종하는 배교행위라고 주장했는데,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이 그룹의 선두에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선교사 시대는 지났고 이제 조선 사람의 손으로 신학교의 운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절대 다수가 이에 동조했다.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그룹의 내부에서도 의견이 둘로 갈렸다. 한편에서는 선교사들의 전통을 따르자는 서북 교회 지도자들과 이남의 동조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때에 세계 교회의 신학적 방향과 수준으로 도약하자는 서울 이남의 신진 엘리트 그룹이 있었다.

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곧바로 총독부에 신청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총회인가를 먼저 받고 신청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신청만 하면 곧 인가를 해준다는 했다. 그러나 총회의 인허 없이 총독부의 인가부터 받는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9월 총회까지 약 반년을 미루기로 했다.

드디어 1939년 총회에 조선신학교 설립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총회는 평양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하여 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난 3월에 총회 신학교육부가 결의한 평양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총회 폐막 직전에 평양의 윤원삼 장로는 긴급 발언을 요청하여 조선신학교를 대변하는 발언을 했다.

“이 교회의 수난기에 총회 산하의 현직 장로가 교회를 지키려는 충성으로 50만 원의 사재를 주의 제단에 바쳤는데 총회로서 감사와 격려의 표지는커녕 냉대와 질시로 대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제단의 성금까지 교권 다툼에 희생된다면 금후 어느 신도가 충성을 보이겠느냐!”

이것은 신학교 개교문제를 놓고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요약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액을 헌금한 장로를 인정해 주지 않고 도리어 험담이나 하는 자들에 대하여 같은 장로로서 느끼는 울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총회는 김대현 장로로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조선 신학교는 사설 기관으로 인가 수속을 계속 진행시켜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 추진이 시작된 1939년 3월부터 이 일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고 있었다. 이 일에 깊이 관계 되어 있는 송창근이 김재준을 끌어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서울은 만주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고, 학기중이라 회의 참석이 불가능했다. 그 해 7월 송창근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자신은 1937년에 일어난 수양동우회(흥사단)사건으로 입건, 보석중이고 일제의 경고를 받아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설립 사무를 그만두고 만주 무순교회 목사로 갈 생각 이라는 내용이었다. 송창근은 조선신학교 설립을 위해 이미 서울에 거주하면서 실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김재준에게 대신 해달라는 격려의 전보였다. 송창근은 김재준이 서울로 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라는 편지를 그 뒤 수차례 더보냈다.

여름방학이 되자 김재준은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 평양, 황주, 함흥, 서호 등지를 다니며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에게 인사도 하고 그의 아들이자 친구인 김영환도 만나 신학교 설립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용정에 돌아와 있을 때인 9월 18일에 장로교 총회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평양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급히 열기로 하고 조선신학교는 설립을 받을 수 있거든 해보라는 정도의 인허 아닌 인허가 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틀 만인 9월 23일에 전보를 받았다. “조선신학 교수로 초청 지급 상경”이라는 내용이었다. 송창근이 김천의 황금정교회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신학교 설립을 위한 실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9월 25일 은진중학교를 사임하고 곧바로 혼자서 서울로 왔다. 가족들은 한동안 용정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자신의 후임으로는 청산학원을 졸업한 고향 후배이자 평양 장대현교회 조사(전도사)겸 숭혜여학교의 교사로 있었던 안희국을 추천하였다.32)

32) 안희국, 「부단 없이 생동하는 바닷물 같으신 분」, 『장공이야기』,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352-353쪽.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김재준은 김대현 장로를 찾아 갔다. 그는 천식이 심하여 성북동 송림 숲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천식증이 심하여 성북동 송림 숲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편지 몇 장을 내놓으면서 회답을 써달라고 했다.

신학교 설립 반대 그룹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선교사들이 신학교 문을 닫고 갔는데 당신이 신학교를 새로 한다는 것은 선교사에 대한 의리로 보든지 신앙적 양심으로 보든지 배교에 가까운 잘못이 아니냐”고 꾸짖는 것이었다. 이를 읽은 김재준은 무어라 회답을 써야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마 김 목사가 당장 답장 쓰기는 어려울 거요!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이 성경구절을 생각했소!”

김대현은 이 말과 함께 「전도서」 3장의 말씀을 보여주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나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이것을 본 김재준은 다음과 같은 암시를 느꼈다.

“선교사 때와 지금이 때가 같지 않으니 때를 따라 헐기도 하고 새로 세우기도 해야 하나님의 새 경륜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평양신학교는 헐어야 하겠고 조선신학교는 세워야 한다는 ‘때’의 요청에 내가 응답한 것뿐이다…….”

그는 이런 방향으로 회답을 대필해 주었다.

10월 13일, 그는 조선신학교 설립 사무에 착수했다. 얼마 후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설립인가 신청이 동시에 총독부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신학교는 총독부에서 인가해 주기로 선약했었지만 평남도지사가 평양신학교 인가를 적극 지원중이어서 총독부가 난처한 입장에 선 것이었다.

여러 가지 루머로 떠돌았다. 평양이 유리하다, 서울이 유리하다, 둘 다 인가한다 등등. 그러나 다음 해인 1940년 2월 9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에만 인가를 내주었다.

총독부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 조선신학교 측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지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전국 교회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전체 교인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 중심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총회에 반발한 서울 이남의 교회들이 서울에 신학교를 세우고 교단 분열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신학교 측은 1년마다 갱신하는 강습소 인가라도 얻어 신학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강습소 인가는 경기도청의 권한이었다. 인가 승인은 신청 18일 만인 1940년 3월 22일에 ‘조선신학원’이란 명칭으로 나왔다. 총독부에서 경기도를 버리고 평안도에 신학교 설립을 승인한 것에 대한 불만이 경기도청으로 하여금 인가 승인을 신속히 처리해 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김재준은 경기도청에 가서 직접 인가 서류를 받아왔다. 비록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인가였지만 신학교육을 시작할 수는 있었다.

인가장을 받은 기쁨도 잠시 다음 날 김재준은 고향으로 향해야 했다. “부친 위독 급내 형”이라는 전보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보는 주소지 이동으로 여기 저기 돌다가 이틀 늦게 도착되었고, 부친은 3월 23일인 그 날 별세했다. 고향에 내려가 77세로 생을 마감한 부친의 장례를 치렀다. 부친을 기독교로 인도하지 못한 김재준의 마음은 무거웠다. 부친은 여전히 위정척사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금수(禽獸)라는 양이(洋夷)의 종교에 미혹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1940년 4월 개원식과 함께 조선신학원이 시작되었다. 교사는 승동교회 예배당 아래층이었다. 원장이자 설립자인 김대현 장로의 짧은 취임사는 김재준의 마음에 와 닿아 그의 머리에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그 취임사에는 신학원 설립 반대 목소리에 대한 부담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돌봐 주신다는 신념을 나는 내 경험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신학교’란 간판으로서 처음부터 크게 벌이는 데 두려움을 느껴 왔었는데, 이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초라하게 작은 기관으로 출발하게 됐습니다. 나무 자라듯 오래오래 더디 자라는 생명일수록 더 견실한 법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이소성대(以小成大)’를 원합니다. 이제 이 적은 ‘조선신학원’이 꾸준히 자라 전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에 유명한 신학교로 결실할 것을 확신합니다. 적은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장례는 더욱 결실합니다.”

개원식을 하면서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교육이념 5개항을 발표했다.33)

① 우리는 조선 교회로 하여금 복음 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 뿐 아니라, 학적·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게 할 것. ②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찬(硏鑽)을 경(經)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③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諸)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④ 성경연구에 있어서는 현(現) 비판학(批判學)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연구의 예비지식으로 채택함이요 신학수립(神學樹立)과는 별개(別個)의 것이어야 할 것.
⑤ 어디까지나 조선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은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할 것.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악모략(憎惡謀略)과 교권이용(敎權利用) 등은 조선 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런 논쟁을 피할 것.

33)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십년사』, 193-94쪽. 유동식(『한국신학의 광맥』, 205쪽)과 송길섭(『한국신학사상사』, 346-347쪽)은 이를 따른다. 그러나 『한신대학 50년사』(21-22쪽)는 약간 다르게 소개하는데, 특히 1번과 2번이 주목할 만하다. “1. 우리는 조선신학교로 하여금 복음 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 2. 조선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김경재(『김재준 평전』, 71쪽)는 이를 인용한다.

조선신학원은 한국 교회의 복음선포실력과 신학사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갖추도록 하는 데 기여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가장 복음적이고 칼빈적이며 자유로운 신학교육이 경건의 훈련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교육에 대한 이상(理想)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또한 근본주의 신학을 선호했던 선교사들이 주도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에 대한 불만족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확동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은 세계 신학을 호흡하는 신학교육을 선교 초기부터 거부했었다. 그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충실한 신학교육을 했었는데, 여기에는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정도의 학교를 경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보내도록 한다”거나 “장차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다”거나 “전도자의 교육에 전력해야 한다”는 등의 신학교육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전도를 통한 기독교의 양적 성장에는 기여했지만, 신학의 사상적 발전과 교육에는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또한 1896년 리놀쯔 선교사에 의하여 제시된 한국 목사훈련 요강 중 신학교육의 질과 관련된 부분만 보자면, “…… 미국에 보내 교육시키지 말 것(적어도 선교사업 초기에 있어서는) …… 한국 신자의 문화와 현대 문명이 진전함에 따라, 한국 목사의 교육 정도를 높일 것, 그가 국민의 존경과 위신을 확보하기에 족한 정도로 일반보다 높은 교육을 시킬 것. 그러나 동떨어지게 높아서 남의 선망을 자극시킨다든가 분리감을 주는 일은 없도록 할 것 ……” 등이었다. 즉, 한국 목사들의 신학교육의 수준을 미국이나 유럽 등 기독교 선진국 수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받지 못한 평신도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점차 높여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 목사와 평신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좋은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했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역사를 쓴 백낙준 박사는 이 정책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 정책 전체가 선견지명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자존심과 자신감을 가진 인물은 교육받은 지도층에서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 교역자들은 필경은 선교사 자신들이 한국 교회를 위하여 세운 사업을 계승할 인물들이다. 한인교역자의 지적 수준과 교양적 성격은 높은 차원에서 인상되어야만 한인교역자와 선교사 간에 불쾌한 비교나 넓은 간격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인교역자들의 지식정도를 낮추잡아 놓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선교사 자신들은 대학교육과 신학교 교육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그들의 후계자가 될 한인교역자의 교육 정도는 교인들의 지식수준보다 약간만 높아야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 신흥청년들은 일본과 기타 외국에 휴학하여 신문화와 과학을 교육받고 있는 반면에 한국 교회의 교역자들은 근대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인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한국이 교역자들은 선교사들이 바라는 ‘존경과 권위’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정반대의 현성을 초래하였다.”34)

34) L. G. Par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Korea, 1832~1910, Pyeng Yang: Union Christian College, 1929, 205쪽;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227쪽.

조선신학원의 개원은 김재준에게 감격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의 느낌을 훗날 이렇게 표현했다.

“1940년 4월 조선 사람의 손으로 조선신학교가 서울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교되었다. 이것은 조선 교회 50년 사상(史上)에 있어 처음 되는 기록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이날부터 참된 의미의 조선 교회가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只今)까지에 다른 기관은 모두 조선 사람에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신학교만은 기어코 선교사들이 경영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 우월권을 유지하려면 조선 교역자의 질을 선교사 이하의 선에 정지시켜야 될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신학교육을 완전히 선교사가 독점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조선 사람으로서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고 선교사가 일제히 귀국한다는 것은 비록 전쟁에 의한 불가피의 사태라 할지라도 벌써 선교사집권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35)

35) 김재준, 「한국신학대학의 역사적 위치」, 『한국신학대학보』 3집, 1957, 5쪽.

조선신학원이 “참된 의미의 조선 교회의 시작”이라고 단정한 그의 말은, 1940년 4월 이전의 조선 교회의 과거 역사를 모두 부정하거나 부재(不在)로 단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었다.36) 그러나 조선신학원이 조선인의 손으로 세워져, 세계 신학의 흐름에 맞추어 자유롭게 신학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최초의 신학교였다는 점에서는 한국 신학교육사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것임은 분명했다.37)

36) 민경배는 이 표현을 김재준이 “한국교회사의 과거 전부를 ‘부재(不在)로 단정하고, 이 단절된 교회사의 새 시작을 다짐하면서 그 주역으로 자처했다”고 비판했다(『한국기독교회사』, 448쪽 참조). 37) 길섭, 『한국신학사상사』, 347-348쪽;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전망사, 1982, 204쪽.

김재준이 조선신학원을 통하여 신학교육의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교수진 구성이었다. 그리하여 해외에 유학한 사람들을 교수로 청빙하려고 노력했고, 가능한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부산 동래의 윤인구는 일본과 호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프린스턴과 영국 에딘버러에서 잠시 청강하고 돌아와 호주 선교부가 경영하는 복음농민학교를 맡고 있었는데, 합류하겠다고 응답했다. 미국에 유학한 조희염은 조선신학교 설립 논의부터 열심이었지만 원산에 자리를 잡아 올 수 없었다. 송창근은 아직도 보석중이어서 어려웠다.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은 신사참배반대로 일제로부터 설교 금지조치를 당한 후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교수직을 사양했다. 그리하여 결국 윤인구와 김재준만 정교수로 초빙하기로 함태영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이사회에서 결정했다. 강사로는 전필순(신약), 이정로(신약), 현제명(음악), 김창제(웅변술), 갈홍기(종교철학), 야무구치(일본의 언어와 사상) 등이 참여했다.

교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김재준은 자신의 전공으로 여기고 있는 구약과목뿐 아니라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 등도 가르쳐야 했다. 또한 윤인구가 원장 실무를 보았기 때문에, 나머지 행정일과 궂은일도 도맡아 해야 했다. 그것은 학감일에서부터 청소부일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조선신학원에서도 김재준의 별명은 역시 ‘천지(천지)’ 였다. 강의하면서 학생을 쳐다보는 일이 없이 땅 한 번, 하늘 한 번 번갈아 쳐다보면서 강의했기 때문이다. 교실 뒤편에서는 귀를 기울여도 알아듣기 어려운 낮은 음성, 별로 웃는 일도 없었고 유머가 서툴러 스스로 쑥스러워하는 태도 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짓궂은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38)

“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지으셨습니까?”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김재준은 가만히 있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은 잘한 일이야. 나쁜 놈들이 죽지 않고 모두 오래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나!”

38) 조향록, 「초기 조선신학원 시대의 장공 선생님」, 『장공이야기』, 99-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