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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3] 큰 마음 큰 뜻을 품고 : 미국유학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3:38
조회
1308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68-77쪽.


[3] 큰 마음 큰 뜻을 품고 : 미국유학

김재준의 미국 유학 역시 송창근이 이끌었다. 청산학원을 졸업할 무렵 송창근은 이미 미국 프리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유학중이었고, 김재준을 위해 그 학교의 입학 허가서와 1년 장학금 200불을 받아 보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권과 여비였다. 그는 먼저 여권을 해결하고자 동경에서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는 피어선학원 기숙사에 머물면서 「창세기」 강의도 하고 유학수속도 할 수 있었다.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발급되는 여권을 받기 위해서는 두 달이 소비되었다. 재정보증은 승동교회의 김대현 장로와 이재향 목사가 서주었다.21) 김대현 장로는 막역한 친구 김영환의 부친이었기에 가능했다. “겉으로는 온순한 척하면서 속은 다소 음험하다.……”라고 씌어진 본적지 신분조서도 종로 경찰서에 도착했다.

21) 김대현 장로는 훗날 김재준이 설립에 참여하고 가르치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설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한다.

여권을 만든 다음에는 여비가 필요했다. 미국가지는 가는 뱃삯은 거금이었다. 송창근의 경우를 보면,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가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서 마련해 줄 정도로 뱃삯은 큰 돈이었다.22)

22) 만우 송창근 선생 기념사업회 편, 『만우 송창근』, 서울:선하도서출판사, 1978, 31쪽.

김재준의 형이 금융조합에 밭을 저당 잡히고 50원 대출 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교회 측에 부탁도 해보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선교사 추천도 아니고 정식 장학생도 아닌 개인에게 장학금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함북노회 수양회에도 가보았지만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평양신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받은 홀대였다. 서울로 오는 청산학원 동창생인 시인 김동명의 집에 들러 빼앗다시피 큼직한 여행 가방을 얻어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윤치호를 찾아갔다. YMCA를 통하여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이끌었던 윤치호는 미국에 유학 가는 과학도와 신학도에게 여비를 준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복차림에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윤치호는 소탈하고 평민적이었다.

“무슨 공부를 할 건가?”
“신학입니다.”
“어느 신학교?”
“프린스턴에 입학돼 있습니다.”
“그럼 가서 공부 잘하게!”
“감사합니다. 무슨 일러 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미국 한인 사회란 좀 복잡하고 갈래도 많은데 서로 자기편에 끌어들이려 할 걸세. 내 생각으로는 아무 그룹에도 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잘 알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윤치호는 김재준을 친히 데리고 은행에 가서 100원을 찾아 손에 쥐어 주었다. 이제 태평양을 건널 여비가 마련된 것이다.

김재준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1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4일이 지난 후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미국 대륙에 발을 딛기도 전에 다시 똑딱선을 타고 입국 심사소가 있는 엔젤 아일랜드(Angel Island)로 가야 했다. 3등 칸에 탔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어렵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상륙할 수 있었다. 도착 당일 배에 마중 나온 백일규라는 교포의 도움 덕분이었다. 프린스턴까지의 여비가 문제였지만, 다시 백일규의 도움으로 버클리의 싼 여관방에서 지내면서 샌프란시스코 구경도 하고 대륙횡단 급행열차도 탈 수 있었다. 백일규가 교포들에게서 100불가량을 거두어 표를 사주었는데, 이 돈은 얼마 후 송창근이 다 갚아주었다. 송창근은 김재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프린스턴까지 올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여름방학 동안 일하여 돈을 모아 놓았던 것이다.

프린스턴 역에는 김선두 목사의 맏아들 김성락과 한경직이 마중 나와 김재준을 반겼다. 프린스턴신학교에는 이들 외에도 한국인으로 유하영이 특별학생(special student)으로 있었고, 송창근이 졸업반에 있었다.

김재준은 프린스턴신학교의 대학원 코스에 등록했다. 1928년 9월 가을학기였다. 그에게 있어 이곳에서의 공부는 강의나 토론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영어가 서툴러 강의를 재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세미나 토론에도 제대로 기어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강하는 과목은 주로 근본주의 신학자이며 신약학자인 메첸(Gresham Machen)을 비롯한 보수신학 계열 교수들의 강의였다. 김재준은 청산학원에서도 자유주의 신학 일변도로 공부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주로 보수주의 신학을 택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23) 1922년 5월 뉴욕 제일장로교회의 목사이자 유명한 설교자였던 포스딕(Harry E, Fosdick)은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하의 설교에서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자 1923년에 메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를 반박하며 정죄했다. 이번에는 다시 자유주의 신학적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1,274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어번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을 선포했다. 이렇게 되면서 장로교회는 보수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1929년에 총회가 근본주의자들을 제명하고,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고 메첸을 교장으로 세웠다. 그리고 새로운 장로교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만들고 소수파로 전락했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을 따라나섰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메첸이 죽자 그의 추종자 사이에서 다시 이론투쟁이 일어나 10년도 못 되는 동안 세 개의 교파로 갈라졌다.

23)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325쪽.

김재준은 메첸 등 보수계열 교수들의 강의를 많이 들었지만,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극단적 정통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고민하는 발악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신학수업을 처음 받았던 청산학원의 영향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는 청산학원의 자유주의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청산학원을 졸업할 때, 자유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자유주의도, 극단적인 보수주의도 모두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김재준은 송창근, 한경직과 맹우(盟友)가 되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인물 양성이 필요하며, 이는 곧 자유로운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송창근은 목회신학, 한경직은 신약, 김재준은 구약을 전공하고 학업을 마친 뒤 함께 일하자는 꿈도 나누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년을 보낸 뒤, 다시 송창근을 따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2학년에 편입했다. 1929년 9월이었다. 송창근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번 편입학에도 그의 도움이 컸다. 애초부터 송창근 없는 김재준의 신학공부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신학수업 마지막까지 송창근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그는 프린스턴신학교 가까이에 있는 무명용사의 무덤에서 한국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했던 김성락 등과도 헤어져야 했다. 웨스턴 신학교에서 그는 송창근과 1년 동안 기숙사 방을 함께 섰다.

1785년에 시작된 웨스턴신학교는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직영 신학교였는데 ‘웨스턴’이라는 교명을 갖게 된 것은 1825년부터였다. 웨스턴(western)은 ‘서쪽의’라는 뜻인데 이렇게 이름 붙여진 이유는 당시 서부개척이 이루어지기 이전이어서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 시가 미국의 서부였기 때문이었다. 웨스턴신학교는 소속교단이 북미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통합되면서 1958년 피츠버그-크세니아신학교(Pitt-sburgh-Xenia Theological Seminary)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피츠버그신학교는 현재 미국 장로교회(P.C.U.S.A.)소속 신학교 중 하나이다.

미국 유학시절. 김재준(왼쪽)과 송창근(오른쪽)은 한경직과 함께 절친하게 지냈다.

김재준은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인 웨스턴에서 학비, 기숙사비를 모두 면제받고, 장학금도 300불이나 받았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주는 장학금보다 100불이 더 많은 돈이었다. 문제는 식비였다. 여름방학 동안에 식당과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번 돈 300불로 식비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다행히 기숙사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졸업 때까지 보장되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치고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웨스턴신학교에서는 학부 과정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전공은 구약학을 선택했다. 이 학교가 구약학이 좋다는 평도 있었다. 그는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구약개론, 구약원전강독 등 구약학 과목은 모두 들었다. 부전공은 조직신학을 택했다. 학업성정은 우수하여 한 과목만 B+학점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A학점을 받았다. 1932년 졸업식 때에 김재준은 신학사(S.T.B.)와 신학석사(S.T.M.)학위를 겸해서 받았다. 히브리어를 잘한 덕분에 히브리어 특별상도 받았다.

그의 신학사 졸업논문은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이었다.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후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구약학 분야의 이스라엘 역사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슈(issue) 중의 하나였다. 신학석사학위논문은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었다.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구약성경 처음 다섯 권, 즉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대한 비평과 아모스, 호세야, 미가, 이사야 등 주전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을 다룬 것이었다. 모두 구약학과 관한 것으로 그는 구약성경 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졸업할 무렵 한국의 어느 선교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직장소개와 관련하여 신학노선을 묻는 것이었다.

“네가 학업을 마쳤으니 귀국해야 할 텐데 네 신학노선을 알아야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기에 편지한다. …… 네가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야 취직이 될 것이니 그렇기를 바란다. 속히 알려 달라. …….”

김재준은 곧 답신을 보냈다. 자신은 근본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도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 …….”

그 뒤 편지 왕래가 없었지만, 이 선교사는 안식년 때에 일부러 김재준을 찾아왔다. 그의 좁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이야기했지만, 폭넓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을 선호하면서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한 김재준은 박사 과정을 밟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미국의 경제공황이 실업자를 양산하고 학교의 재정을 악화시켜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장학금은 모두 끊기고 아르바이트마저도 구하기 힘들어 고학은 불가능했다. 이때 송창근은 웨스턴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아일리프신학교(Iliff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경직은 프리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결핵으로 요양원 생활을 하다가 회복되어 귀국하는 중에 있었다. 김재준도 귀국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