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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1] 어린시절 : 직장생활과 결혼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0:00
조회
1013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33-38쪽.


[1] 어린시절 : 직장생활과 결혼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김재준은 곧바로, 그의 친척이자 항동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김희영의 추천으로 회령군청 재무부 직세과에 임시직으로 취직하였다. 김희영은 교사생활을 하다가 보통문과시험에 합격해 편입관이 되어 회령군청 직세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김재준의 임무는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양조장관리, 밀주 단속, 담배 무허가 경작 단속 등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당시 공무원들의 술 문화와 성문화가 어떠한지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직세과에 근무한 지 만 3년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의 나이 18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의 풍습대로 집안 어른들이 정해 놓은 신부와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귀가하라는 것이었다. 신부는 김재준의 고향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사는 회암동의 농부 장석연의 맏딸 장분여였다. 그녀는 “성격이 무던히 대륙적이고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말없이 오래 참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결혼의 날짜는 음력 8월 29일로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 나흘 전 회령읍에서 출발하여 120리가량을 걸어서 갔는데, 혼례 전날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집 뜰에서 유교식 전통 혼례를 치렀다. 소위 신식교육을 7년 동안이나 받고 군청에서 근무하는 신식 젊은이였지만, 집안의 유교식 전통은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 지역의 풍습에는 첫날밤 신랑이 신부에게 무언가 첫 말을 해야 하며, 그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신랑 김재준은 신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그러다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공부도 해야겠고 나돌아 다니기만 할 것 같은데 당신은 집에서 어른들 모시고 식구들과 의좋게 몇 해만 기다릴 수 있겠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결혼은 했지만 당분간 함께 살 수 없고, 신부 혼자 시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집을 나가 나돌아 다니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야 이제 이 댁사람이고 당신 사람인데 그런 걸 왜 물으시오?”

유교적인 전통에 익숙한 신부의 답변이었다. 결혼한 이상 신부는 신랑 집에 속하게 되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이기에 순종할 터이니 좋을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결혼하자마자 김재준은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으로 전직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옮겼지만, 그의 세속적인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왜냐하면 아내는 창꼴 집에 두고 혼자 하숙하면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금융조합과 관련된 상인들이나 사회 청년들과 어울리고 술집이나 요정 등을 드나들기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김재준의 삶에 깊이 영향을 준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무역상 겸 잡화상을 하던 30대 청년 김기련을 만난 것이다. 당시 웅기는 무역상으로 가장한 독립투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나 시베리아로 가는 길모이었는데, 김기련의 대성상회도 그들이 활용하는 가게였다. 따라서 김재준이 김기련의 집에 가면 독립투사들을 만날 수 있거나 「독립신문」 등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김기련은 상점을 정리하고 시베리아로 가서 독립군을 가담했다. 이를 본 김재준은 자신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들떴다. 또한, 이ㄹ본인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둘째는 그가 큰돈을 번 것이다. 남만청도의 어느 일본인 간부가 비밀 서류인 나진지역의 개발 설계도를 미리 입수하여 땅을 사두려 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함북도청 서기인 김희영에게 부탁했다. 김재준은 거간꾼을 내세워 당시 헐값이던 땅을 40만평 정도 사주었고 거간료를 톡톡히 챙길 수 있었다.

셋째는 신학수업의 길잡이 역할을 한 송창근을 만난 것이다. 송창근은 12살 때에 집을 나와 간도 와룡동에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경영하던 이동휘 선생의 애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동휘 선생은 운영난으로 학교 문을 닫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소년 송창근은 함께 가고자 했으나 이동휘 선생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송창근은 서울에 있는 피어선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은 여전하여, 3ㆍ1운동 다음 해에 독립의 노래를 작사하여 퍼뜨렸다. 그리고 이 때문에 6개월간 징역을 산 뒤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송창근은 고향은 웅기에서 5리쯤 떨어진 웅상에 있었는데 일찍부터 교회가 서 있던 동네였다. 그는 고향 교회에서 사흘간 특별 강연회 등을 열기도 했다. 김재준은 이때까지도 교회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송창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송창근이 친히 그의 하숙방에 찾아와 인사를 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재준의 백부가 서울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 『학생계』 등의 잡지나 여러 책을 내면서 출판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송창근은 동향 사람인 그 백부와 서울에서 알고 지냈기 때문에 인사차 찾아 온 것이었다.

첫 만남은 그저 인사에 불과했지만, 그 이튿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송창근은 김재준에게 서울로 와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지금 3ㆍ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을 합니까?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십시오!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

김재준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마음이 들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이면 서울 유학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미련 없이 금융조합에 사직서를 내고 창꼴의 부모님이나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웅기항에서 홀로 서울행 배를 탔다. 1920년, 그의 나이 만 19세가 되는 해이자 3ㆍ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였다.

김재준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9세에 서울에 와 3년을 지내면서 신문화를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