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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1] 어린시절 : 외가와 신식교육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09:52
조회
108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30-33쪽.


[1] 어린시절 : 외가와 신식교육

김재준이 아홉 살쯤 되었을 1910년경, 그의 외가 동네인 함경도 경원 함향동에 신식 교육기관이 세워졌다. 외가 쪽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여 만든 사립 소학교인 향동학교였다. 김재준은 외사촌 형들이 그의 부모를 찾아와 적극적으로 설득한 덕분에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30리가량 떨어진 함양동의 학교까지 집에서 걸어 다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모와 떨어져 외가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김재준은 나이도 있고, 집에서 글도 깨쳤기 때문에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를 가르친 선생은 친척인 김희영이었다. 김희영은 열렬한 민족지사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일반 과목뿐만 아니라 조선의 현실과 독립운동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한일합방의 부당성, 개화파 사람들의 활동, 이준 열사의 할복 등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사천 년 역사와 이천 만 민족이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느냐? 지금도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 제발 여러분은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대를 이어 싸워라.”

이는 김재준을 포함한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민족애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2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향동학교 시절 김재준은 기독교에 관심이 생겨,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전도인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한 학생에게 부탁하여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생은 예수가 유대인으로 하늘나라를 가르치다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기독교를 세웠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재준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나 일시적인 관심일 뿐이었다.9)

9) 앞의 책, 210-211쪽

향동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던 김재준에게 다시 신학문을 접학 해준 사람 역시 외가 쪽 친척이었다. 외사촌형인 채규홍은 그를 고건원에 새로 세워진 공립 보통학교의 3학년으로 편입하도록 강권했다. 그리하여 김재준은 다시 외가에 머물면서 2년 동안 이 학교를 다녔다. 고건원은 항동에서 20리가량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걸어서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살 아래 외조카이자 같은 반 급우였던 채관석과 함께 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쓸쓸함을 덜 수 있었다. 김재준은 졸업할 때에 역시 최우등이었고 도지사 상까지 받았다. 어려운 한문을 어려서부터 읽었던 덕분에 소학교 공부가 그에게는 매우 쉬웠고, 더구나 그는 이미 항동학교에서 소학교 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이었다.

고건원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일본인이 교장으로 있었지만, 김재준을 담임한 한국인 교사는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민족애를 불어넣는 말을 하기도 했다.

“너희들은 왜족이 아니라, 조선민족인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제 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김재준의 마음에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보통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에 외가 쪽 사람들은 김재준에게 또 다른 교육의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그의 나이 13살부터 16살까지 3년 동안 회령읍에 있던 간이농업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회령은 그의 집에서 사흘 정도 걸어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다. 농업학교에서는 농업과목뿐만 아니라, 조선어와 한문도 가르쳤다. 특히 한문을 가르치던 최 선생이란 분은 조선의 역사, 퇴계, 육곡, 이 충무공 등의 글을 읽어 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애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이곳에서의 성적도 우수하여 김재준은 졸업할 때에 최우등상과 도지사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