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보 제27호] 장공 다시 읽기 - “진실에 심는 자”
[제27호] 장공 다시 읽기
“진실에 심는 자”
(1979, 장공전집 12권)
☞ 이 글은 『장공전집』 12권 210-211쪽에서 발췌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가?
진실이긴 하지만 말했자 효력 없을테니
말하지 말자는 것이 진실인가?
전자는 원리적 진실이고
후자는 효능적인 진실이랄까?
그러나 원리적인 진실이 잠잠하고서
효능적인 진실이 알찰 수 있을까?
그래서 예언자들이 외쳤고
세례자 요한이 메아리 없는 광야의 소리를 외쳤다.
그래서 예수는 복음을 외치고 참패자 같이 죽었다.
그는 죽음에 진실을 심고 부활을 기다렸다.
오늘 -
우리는 남한의 “바알” 제단에 “아니다”하고 외친다.
교회는 “진리”에 순(殉) 하라고 외친다.
남 북의 국토 분단은 강국들의 침략이라고 외친다.
“네가 외친다고 우리가 물러갈 것 같으냐?”
그러나 침략은 자유도 정의도 사랑도 아니니 진리랄 수 없다.
그래서 “진실”은 쉴새없이 “아니다”하고 외친다.
“그게 아니란 것을 누가 모르나?”
“그대가 잠잠해도 우리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잠잠하면 “바알”신은 비계 낀 배 만지며 트림하고
악마는 대소(大笑)한다.
그리고 “말락”(멜렉, 즉 왕이란 뜻의 우상)의 불붙는 제단에는
어린애가 산 채로 공양된다.
안타까운 부모들은 불테두리를 춤추며 돈다.
차마 볼 수 없어서요 즐거워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도 있겠지. 경제 도 성장한다잖나!
꿀벌이 꽃에서 꿀을 빨아가지만
화분을 매개 하지 않나!
인권유린이 인권관심을 일으키지 않나?
불의가 정의를 자극하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 것이다.
차마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보이신 것 뿐이다.
[옛 한신대 수유리 교사 신축때]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7호] 2016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