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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호] 축사 - “믿음으로 산 자유인” 長空을 생각하며 / 강원용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8:40
조회
633

[제1호] 축사

믿음으로 산 자유인長空을 생각하며

장공에 대한 호칭은 목사, 박사, 교수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내가 장공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타이틀이 없던 중학교 선생님 시절이었다. 정확히 1936년 은진중학교 성경 선생이셨을 때다. 그때부터 50년간 항상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나로서는 장공을 어떤 분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해야 정확할는지 모르겠다.

나의 중학시절 장공 선생님은 성프란시스를 존경하고 순교자들의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셨으며 글도 쓰시어 세 권의 책을 썼으나 출판 금지를 당했다. 그 시절 그분의 부친이 함경북도 경흥에서 별세하셨다. 부친은 물론 불신자였고 그 지역은 유교 전통이 뿌리 깊은 지방이었는데 장례식을 어떻게 치루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그 지역에 살던 불신자인 양반들이 “김재준처럼 믿는 기독교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송창근 목사의 간곡한 권유로 조선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47년 미국인 선교사들과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신신학 시비가 붙으면서 그의 신학이 문제되어 신학자 김재준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그분은 스스로 신학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6․25전쟁 후 그분은 신학자 생활을 청산하고 거제도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작정하셨다. 그때 내가 찾아가 신학교 재건을 권유하니 “전쟁 때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나는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에 관한(About God) 공부를 하고 가르쳤다’고 할 생각”이라며 다시는 신학자 생활은 안 하겠다고 고집하신 일이 있다.

그 이후 다시 신학교로 돌아왔으나 5․16혁명과 함께 교수직에서 물러나셨으며, 1969년 3선개헌 때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 지도자로 알려졌으나 그분은 그런 호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신 날은 추석 전날이었는데, 나와 오랜 시간 이야기하는 중에 “이제 여생을 극히 자유롭게, 특히 자연을 벗삼아 살겠다”고 하셨다. 그분은 漢學에 조예가 깊고 서예가이면서 문장력이 탁월하셨다.

나는 50년간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곁에서 늘 지켜본 바로는 장공을 바르게 이해하고 ‘장공은 곧 이런 분이다’ 하고 규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장례식 때 “믿음으로 산 자유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분은 믿음으로 산 자유인이었기에 젊어서 좋아하셨던 성프란시스와 같이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보고 사랑하며 산 분으로서 우리 나라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풍류도(風流道)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온 분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은사인 장공을 존경하고 그의 뜻을 이어가려는 후배들이 장공이 살아온 여러 모습 중 어느 한 부분만을 확대 해석하는 기념사업은 안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특히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갈 21세기 정보화시대, 즉 인터넷 사이버시대, 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에 의해 지금까지 보지도 알지도 못하던 세계와 새로운 무한 광대한 우주를 알게 되고, 한 마을에서, 한 지구에서 우주의 시대로 바뀌어져 가는 대전환기에 중세기 시대의 지동설(地動說)에서 보여주던 교회의 폐쇄적인 역할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長空이라는 호에 나타난 대로 확 트이고 열린 모습을 바르게 이해해 가며 그분이 이루지 못한 뜻을 우리가 사는 새 시대 속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해 가는 후배들이 되기를 바란다.


강 원 용 목사
(본회 이사 / 평화포럼 이사장)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2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