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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호] 추모사 - “하늘과 땅의 해후” / 이해동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9:05
조회
781

[제2호] 추모사

하늘과 땅의 해후
- ‘장공 김재준 목사 16주기 추모예배 추모사’ -

이 해 동 목사
(본회 이사 /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

우리들의 큰 스승 고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놔두시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지 어느새 16년이 되었습니다. 스승께서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글은 1987년 1월 19일에 고 함석헌 선생님과 공동으로 발표하신 “새해 국민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거기에 나타난 당시의 시대상황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말기로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등으로 정국이 극도의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습니다.

김재준․함석헌 두 어른께서 서두에 “시시각각으로 어두움 속으로 치닫는 정국을 보다 못해 우리는 한국의 늙은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 탄원합니다. (중략) 우리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 주십시오”라고 하시면서, 첫번째로 정부 당국에, 다음으로 학생들에게, 야당에게, 군인들에게, 노동자와 기업주에게, 그리고 끝으로 국민(씨)에게 각각 책망과 격려와 권고로서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정의롭고 평화스런 민주 한국을 건설해 줄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기신 지 여드레 만에 목사님께서는 우리 곁은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6년간은 어쩌면 목사님께서 국민들에게 그토록 간곡한 심정으로 당부하신 그 유언이 국민들에 의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그 해 6월은 위대한 국민행동을 이룬 달이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위 시민혁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결과로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국민의 직접 선거로 바꿈으로써 국민 참정권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세력의 분열과 역량 부족으로 인해 군복만 갈아입은 노태우 정권을 허락하고 말았으며, 3당 야합으로 6월 항쟁은 무색해지는 듯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채 이른바 문민정부를 맞이하게 되었고, 목사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난 1997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우리 국민은 역사상 최초의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역사가 낡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막고 개혁적 방향으로 다시금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의 큰 스승께서는 그 “새해 국민에게 드리는 글” 끝에서 국민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국민(씨알) 여러분! 우리는 이 이상 상전 모시는 종의 시대에 살지 맙시다. 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국민 여러분밖에 이 나라를 바로잡을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스승께서 국민들에게 당부하신 대로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은 괄목할만하게 성숙해졌습니다.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도 이루어냈고, 국난으로 일컫는 IMF 사태도 극복해냈으며, 전 강토를 붉게 물들인 붉은 악마의 함성과 함께 월드컵 4강 신화도 만들었고, 분단으로 말미암아 남북간에 반세기 동안이나 쌓아올린 증오와 갈등의 벽을 넘어 민족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여는 데 힘을 합하고 있으며, 미군 장갑차에 깔려 무참하게 죽어간 효순이, 미선이의 슬픈 사연을 외면하거나 탄식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의 자존과 자주의 불꽃으로 되살려낸 전국 각처에서의 평화적 촛불시위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가위 선거혁명으로 일컬을 수 있는 지난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 참여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16년 전 목사님께서 국민들에게 그토록 간곡하게 당부하시던 그때와 비교하면 국민들의 의식은 매우 성숙해졌으며, 이에 따라서 우리 사회는 놀랍게 변하고 발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국민의 성숙과 사회의 발전은 우연이거나 저절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찍이 목사님과 같은 대 선각자가 계셨기에, 예언자가 계셨기에, 겨레의 큰 스승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엄혹했던 1970-80년대 군부독재정권시절 민주화와 인권회복운동의 중심 세력은 한국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운동의 중심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장의 근원은 다름 아닌 우리의 큰 스승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이 계셨기에 한국교회에 신학화 작업의 싹이 트였고, 신학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신학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이 각성되어 마침내 한국교회가 반독재투쟁, 인권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유신선포 후 이에 저항하다가 최초로 감옥에 간 고 은명기 목사님도 장공의 제자였고, 지난 1월 18일 9주기를 지낸 민족통일운동의 선구자 늦봄 문익환 목사님도 장공의 제자이며, 오는 2월 4일에 1주기를 맞게 되는 1970년대 한국교회운동을 그 중심에서 이끈 고 김관석 목사님도 역시 장공의 제자였습니다. 직간접으로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분들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그 존재와 생애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복음 13:31-32).

목사님은 당신의 자서전『범용기』‘첫머리’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십니다. “내가 받은 기초교육이란 국민학교 4년, 간이농업학교 2년을 합쳐서 6년밖에 없다. 그리고 내 고향이란, 두만강 국경지대 유폐된 산촌이었고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울, 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여기까지 와서 80평생의 마감 고비를 ‘나라와 정의’에 ‘분향’한다는 엄청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나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님은 어김없이 이 땅, 우리 역사에 하느님의 의해 심겨진 겨자씨였습니다. 이 강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뿌려진 하늘 씨앗이셨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늘 씨앗과 같은 목사님의 사상과 삶은 오늘의 교회와 사회와 역사 가운데, 그리고 제자들은 물론이고 착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거목으로 자라 있고, 누룩처럼 번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맺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261장 가사 속에는 복음에 대한 목사님의 이해와 그로 말미암은 목사님의 삶이 담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터득한 복음은 어둠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요, 땅에서 치솟아 하늘에 닿은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삶의 현장에서, 즉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몸을 입고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목사님의 생애는 진정으로 짙은 어둠이 깃든 한국교회와 역사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빛으로 사신 생애였습니다. 땅의 현실을 외면치 않으시고 땅을 끌어 올려 하늘에 잇는 땅의 생명의 일꾼으로, 생명의 씨앗으로 사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당신의 생각과 삶을 진솔하게 그린 수상집을 발간하시면서 그 책명을『하늘과 땅의 해후』(1962년)라고 이름 붙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신 지 16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습니다. 목사님께서 뿌리신 씨앗들 속에, 목사님께서 이룩해 놓으신 업적들 속에, 즉 수많은 제자들의 활동과 그가 일으키신 교회갱신운동과,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정의, 자유, 평화운동 속에 영원히 살아 활동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찬송가 261장의 가사가 목사님께서 지으신 두 절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한 절을 더 지어 보탰다는 것은 상징적인 큰 뜻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삶과 그 제자 문익환 목사님의 삶이 하나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찌 문익환 목사님뿐이시겠습니까? 이 땅, 우리 역사에는 목사님의 삶을 이어 사는 그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삶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의 삶으로도 이어져 스승께서 살아 활동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부족한 추모사를 갈음합니다(2003년 1월 27일).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3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