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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호] 長空 회상기 - “장공(長空)을 생각한다” - 김영환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8:48
조회
665

[제1호] 長空 회상기

장공(長空)을 생각한다

김 영 환
(대구노회 공로목사)

1. 조선신학교에 가기까지

1948년 겨울쯤으로 생각된다. 대구 남산교회에서 김재준 목사님의 강연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참석했다. 그때 나는 대구 농림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 목사님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지만 목사님의 존함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뵙고 싶어서 열심히 참석했다. 그 강연은 매우 진지한 분위기였다는 것과 질의․응답 시간이 매우 소란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후 나는 초등학교 교사 채용시험을 쳤고 강습회를 거쳐 1949년 3월 대구 근교에 있는 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고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계획은 1년간 준비해서 다음해에 김 목사님이 계시는 ‘조선신학교’에 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버님도 원하시지 않는 나만의 계획이었고, 할아버지는 김 목사님을 이단으로 규정하시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셨기에 더더구나 입밖에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왜 김재준 목사님이 계시는 조선신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했는지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1950년 6월 5일 나는 예정대로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김재준 목사님의 문하생으로 신학교육을 받았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긍지와 감사하는 마음은 오늘까지 변함이 없다.

2. 내가 받은 사랑

1984년 김 목사님이 YMCA 초청으로 대구에 오셨다. 저녁에 강연을 하시고 다음날 아침 대구에 있는 문하생들이 환영 조찬모임을 마련했다. 화기애애한 사제지간의 모임이었다. 끝날 무렵 선생님은 수첩을 꺼내 주소와 이름을 쓰라고 하셨다. 몇 주 후에 조그만 소포가 와서 풀어 보니 김 목사님이 쓰신 한자 성구였다. 내게 주신 성구는 마태복음 13장 31-32절이었다. 곧 족자로 만들어 벽에 걸고 회갑 설교집 첫머리에 사진으로 실었다. 이 족자는 우리 집 가보로서 증손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 그 후 나는 목사님으로부터 격려의 편지도 몇 통을 받았는데 모두가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소장품이다.

3. 내가 받은 선물

『장공 이야기』를 통해서 한결같이 느낀 것은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 인생과 목회에 그 어른이 주신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첫째로, 선생님은 나에게 기록하는 능력을 주셨다. 글재주가 없는 내가 선생님을 따라 기록 설교를 하다 보니 기록하고 정리하는 능력이 생겼다. 교회와 노회의 역사서, 사진첩, 두 권의 설교집과 회고록, 18권의 주보철과 수백 편의 설교 원고 등 많은 글들이 37년 동안의 목회 열매로 남아 있는데, 이 모두가 목사님께서 주신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나는 세 교회에서 37년 동안 목회했다. 선생님을 본받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그 어른이 가르쳐 주신 목회를 나의 두 아들이 이어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셋째로, 내가 은퇴한 후 영지교회는 나에게 ‘명예목사’라는, 대구노회는 ‘공로목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이 이름을 은사이신 장공 선생님이 주신 이름이라 생각하며 한신대에 평생을 바치시면서 한번도 그 이름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촌부처럼 사시다 가신 은사의 뒤를 계속 따라 살려고 한다.

장공을 은사로 모시게 해 주시고 장공으로 말미암아 한평생 복에 겨운 삶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2002년 5월 12일『장공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2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