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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호] 장공 사숙(私淑)하기 - “자기 진실”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8:46
조회
596

[제1호] 장공 사숙(私淑)하기

자기 진실

長空 김재준

사람이란 것은 ‘되어진 그대로’의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요새 새삼스럽게 느낀다. 자기가 그것을 볼 줄 모르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아 버린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제1심’에서의 ‘유죄판결’이어서 그 순간, 벌써 모면할 수 없는 ‘자기 결단’의 기회가 상실된다.

‘되어진 그대로의 자기’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을 들라면 원인, 근인, 근본적인 것에서 말단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수다스럽게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 항용(恒用) 많이 보는 것은 ‘마스크’ 때문에 생기는 ‘자기 도취’라고 할 수 있다. 제가 만들어 썼든 남이 만들어 씌워 주든 간에 그것이 자기를 가리워 주는 한, 자기는 안전하다는 거짓된 안도감에서 부진실한 자기의 ‘온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덧붙여진 것들’이 ‘자기 진실’을 위하여 몹시 거추장스럽다는 것을 불평해 보지 못한 사람은 ‘위험신호’앞에 선 ‘맹인’과 같다. ‘되어진 그대로의 자기’에게는 당치도 않은 ‘감투’를 뒤집어쓰고 서투른 ‘무용’을 하노라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진다. 하긴 상당히 교묘하게 춤춰서 남들까지 도취시키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덧붙여진 것’들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에게는 너무나 벅찬 ‘선택권’이 부여되는 때, ‘덧붙여진 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용케 가리워 내지 못하고 그만 ‘마각’(馬脚)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 요새 모모 요직에 있는 누구라는 크리스천이 여차여차한 과오를 범했다고 떠들썩하는 ‘특종 뉴스’를 듣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요직’이라거나 ‘크리스천’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덧붙여진’ ‘가면’이었고 ‘있는 그대로’의 그는 따로 있는 것이었다. 다만 요새 와서 어쩌다가 그 ‘가면’이 벗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드러난 것뿐이다. 이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진실을 살려서 ‘재출발’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너무 영리해서’ 자기 자신까지도 속여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자기 진실’이 무시당하는 일이 있다. 우리는 이조 말의 ‘유명’한 이모 씨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일청, 일노 전쟁을 지내고 ‘현실’은 불가피하게 일인의 판국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것을 만회할 길이 없는 바에야 그 ‘현실’이 가져오는 색다른 ‘영화’를 딴 놈에게 물려줄 필요는 무어냐 하는 ‘영리’한 판단이 그로 하여금 ‘원리’ 대신에 ‘현실’을 택하게 하였다. ‘무너진 성황당’임을 자인하면서도 여전히 ‘일편단심’을 노래하고 선죽교에 혈흔을 남긴 정 포은 선생과는 대조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현실’은 우리에게 ‘불가피적’인 요청으로 강박한다. 정치에는 ‘자금’이 필요하고 사회사업, 교육사업 등에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것을 정상적으로 얻을 길은 없다. 그러니 이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정상’이 아닌 다른 한 길이 강요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원리’를 떠난 ‘현실’이 그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것만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마스크’ 속에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온전히 혼자서 벌거벗은 자기’로서 영원자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출처 : <金在俊 全集> 제4권 228-229쪽

*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2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