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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3호] “한국 기독교가 민족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리영희 교수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9:36
조회
633

[제3호] 제6회 장공기념강연회

“한국 기독교가 민족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은 2003년 11월 27일 경동교회에서 열린 “제6회 장공기념강연회” 강연 원고를 강연자의 동의를 받아 축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리 영 희 교수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제가 장공 김재준 선생과 만남을 가진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권리를 행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한국위원회가 창설될 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장공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의로운 일을 하시는 그분과 뜻을 같이 하면서 존경하며 뵙고 지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민족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큰 주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민족사회가 달라지려 하고 있고, 또 달라지려면 한국 기독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해야 한다’는 명령형의 수사가 좋지 않다면, “한국교회가 바뀌어야 한국사회가 바뀐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순서를 바꾸어서, “한국사회가, 민족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변해야 한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사회가 바뀌어지고, 또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하나의 다이어그램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남북사회 전체를 하나의 민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이렇게 큰 민족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남의 사회가 북에 작용하고, 북의 사회가 남에 작용하는 상호 변증법적인 작용과 반작용 과정을 꾸준히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북한에 식량을 원조해 주는 형식으로 북한에 대한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공산주의 사회와 기독교가 있는 남한 사회와의 가치 비교에 있어서 남한을 우월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가 있는 사회를 절대 선으로, 종교가 없는 사회를 절대 악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남북 관계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사회라는 큰 덩어리, 즉 남북의 사회가 바뀌고, 이러한 과정에 한국교회가 무엇인가 작용을 하여 변화하게 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남한 사회만의 일방적인 작용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뉴턴의 운동법칙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작은 물체와 아무리 무한대로 큰 물체와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제1법칙으로서 작용이 있고, 반작용이 있어, 서로 주고받는 그런 작용이 원리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남쪽 사회가 북쪽 사회에 작용하는 것만큼 남쪽 사회도 북쪽 사회로부터 작용을 받아야 합니다. 받아야 할 내용이 있고,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를 보면, 남북 관계에서 남한은 정부나 국가나 전체적으로 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북한만이 변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변화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로지 북한만이 변해야 한다’라는 사고로 잘못된 것은 모두 북한에게 돌리고, 남한은 선하고 훌륭하고 우월하고 완벽하고 아름답고 자유롭다는 등의 모든 선한 가치를 남한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선악이 절대화한 현상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조금 더 나은가?’, ‘어느 쪽이 조금 더 못한가?’ 이러한 비교적인 관계는 성립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한의 종교 인구 2,2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불교 인구라고 하고, 1,100만이 카톨릭과 개신교를 합친 인구라고 한다면, 한국사회 속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종교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북사회가 변화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에게 요구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는 세계 교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그 역량을 북한에 작용하도록 발휘하면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기독교의 개교인이나 목사, 교회나 교단이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한국 기독교가 옳게 변하고 있고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촛불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 즉 기독교 전체와 남한사회의 변화를 위한 작용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행동적, 행위적 차원에서 자기 변모를 입증하면서 꾸준히 작용할 때 남한 국가가 비로소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해서 민족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남한사회 내에서(기독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교회 이상으로 큰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단위 구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제계가 큰일을 하고, 정치계도 큰일을 하겠지만, 적어도 정신적, 도덕적, 사상적, 윤리적으로 한국사회가 진실하게 질적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본질적인 변화는 교회에 의한 변화이지, 결코 경제적인 변화가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는데, 2만 달러가 되었을 때, 과연 우리 사회와 우리 개인의 실존적 가치 평가 면에서 두 배 행복한 인간, 두 배 행복한 현실이 되고 그렇게 변화할까요?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주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기독교가 생각하는 변화라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가치를 추구할 때 오히려 만 달러를 가지고도 이만 달러를 가진 사회보다 월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오늘의 주제를 놓고 생각할 때 남북 관계는 접촉에 의한 변화보다 변화를 통한 접촉의 가속화 증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일 통일정책 수립가인 에곤 바르(Egon Bahr)가 말한 것은 접촉을 통한 변화이고, 우리는 그 반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쪽으로는 정책적이고 국가 목표적인 국가행위로서의 접촉을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국민적 사회 기동력으로서의 큰 정신적, 이념적, 가치지향적인 힘을 가진 기독교가 변화를 통해서 접촉을 촉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중간 결론적인 저의 의견을 보태면, 한국 기독교가 외적으로 우리 사회와 국가와 북한에 대해서 대 민족적인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한 자체가 변화해야 하는데, 남한 자체를 변화시키는 그 중심과 시발점과 기동력이 기독교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민족사회를 위해서 큰일을 해야 할 한국 기독교가 너무나 물질화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섭섭한 마음입니다. 1993년 미국 뉴욕에서 발행한 <기독교 연감>(Christian Almanac)에 보면, 그 당시 지구상의 1백 수십 개 나라들을 ‘기독교의 힘’이라는 기준으로 서열을 매겨 놓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교회, 가장 웅장하고 성대한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50개 선정했는데, 그 50개 가운데 23개 교회가 남한 교회였습니다.

또 상위 다섯 번째까지 중에서 세 개가 남한 교회였고, 상위 열 번째까지 중에도 일곱 개가 남한 교회였습니다. 그때가 1993년인데 우리 나라가 어떤 때였습니까? 개인의 삶이나 정치적․사회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교회만 전세계에서 가장 큰 50개 교회 가운데 23개 교회가 들어갈 정도로 비대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섭섭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한국교회가 물질화 되어 가는 이런 경향 속에서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숭상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힘이 강한 사회(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2이라면 가히 ‘종교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임)에서 우리의 생활이 가족, 개인,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황폐하고 무서운 사회가 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주의적이고 오로지 나만의 것, 물질주의적이고 사치와 타락과 방탕의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인간 소외! 소외!

우리가 얼마나 탈피하고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소외를 면해야 자유인이고, 진정한 종교가 지향하는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축복을 받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면에 있어서는 우리 주변과 우리 자신이 아주 소외된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예로, 1996년을 기준으로 공식 통계에 의하면, 1년 동안 남한의 흉악 범죄(절도, 강도, 살인, 살인미수, 강간 등)의 수가 232,000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체 범죄 건수의 18.5%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 18.5%에 포함되지 않은 사건들이 81.5%나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과 인간성,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질적 소유인 재산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가장 반인간적인 범죄이지만 실제로는 입건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은 알려지면 사회문제가 되는 사건들이거나, 권력에 의해서 덮어진 사건들입니다. 다섯 건의 흉악 범죄가 일어나면 그 중에 한 건만을 공식적으로 경찰이 조사를 하게 되고, 그 숫자만 해도 232,000건입니다. 어쨌든 우리 남한에서 전체 국민 260명 중에 한 명이 재소자라는 것은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스위스는 재소자가 한 명도 없는 날이 많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숫자는 아니지만, 600만 명 가운데 한 명이고, 자본주의 중심 국가(사회)인 미국은 221명 가운데 한 명이 범죄로 입건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분에게 한국 기독교에는 ‘십일계명’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의 “십계명”은 그대로이고, 마지막 십일계명에 “미국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일계명”이라고 한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국민, 정부, 모두가 총체적으로 소외의 삶을 산다는 예입니다. 기독교 윤리적으로 소외라는 것은 무엇에서 소외되었다는 통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율적이고 자체적인 결정에 의해서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자기 행동을 규정하고 주재하는 존재가 아닌 구속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소외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족 문제를 생각할 때 앞에서 다이어그램을 그리면서 설명했는데, 한국 기독교가 큰 작용을 해서 민족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인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리영희 교수는 1929년 평북 삭주에서 출생하여 한국해양대학과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신문대학원을 수료하였습니다. 1965년부터 조선일보 외신부장, 1972년부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현재는 한양대 명예교수로서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및 비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자유언론상과 늦봄통일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살아있는 신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등 다수가 있습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4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