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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3호] 추모사 - 장공의 추모기도 / 박근원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4 19:23
조회
943

[제3호] 추모사

“장공의 추모기도”
- 장공 김재준 목사 17주기 추모예배 추도사 -

박근원 목사
(한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

저는 이 시간 조금 색다른 신앙의 유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추모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저밖에 모르는 이야기,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알아야 할 이야기, 우리 후학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조금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장공 선생님께서 군사정권에 의해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에서 강제로 퇴임 당하신 후 25-6년 동안 사시면서 우리 사회와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장공 선생님께서 이 기간 동안 기장 교단을 위해서 남겨 주신 가장 큰 두 가지 유산에 대해 조금 색다른 평가를 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기장 예식서를 만드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에 신앙고백서가 된 ‘신앙고백선언서’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엄청난 신앙의 유산을 기장 교단과 후학들에게 남겨 주신 장공 선생님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신앙고백선언서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예식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장 교단이 작년에 교단 50주년 행사를 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기장 교단이 예식서를 세 번 만들었는데, 첫 번째는 장공 선생님이 1964년에 집필하신 포켓판 예식서, 두 번째는 기장 교단 25주년 행사 때인 1978년에 제가 편집한 예식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기장 교단 희년 행사를 하면서 펴낸 <희년예배서>입니다. 이렇게 기장은 예식서가 세 개 있는데, 그 중에서 1978년에 편집한 예식서는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예식서를 편집해달라는 교단의 의뢰를 받고 펴낸 것입니다. 이것을 편집할 때 아무런 자료가 없는 황무지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장공 선생님이 1964년에 만드신 예식서가 있었는데, 종로서적에서 이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지형(紙型)을 분실해서 오랫동안 재판하지 못하여 결국 기장 교단의 예식서가 없는 상태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 25주년에 맞추어 새로운 예식서 편집을 제가 책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예식서를 편집할 때 모체가 된 것이 바로 장공 선생님께서 집필하신 예식서입니다. 장공 선생님께서 집필하신 예식서는 그분이 2년에 걸쳐서 손수 작문하신 것입니다. 이 예식서는 영어나 일본어로 된 예식서를 가져다가 그냥 베껴놓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때까지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예배와 예식이 일본 것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방에 검은색 표지로 나와 있는 예식서의 대부분이 일본 것인데, 그런 것을 장공 선생님께서 그냥 베끼셨겠습니까? 그래서 손수 작문을 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의 신앙을 담아서 만든 예식이니까 진짜 한국적인 예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지구촌 시대에 ‘일본이 어떻다’, ‘중국이 어떻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합니다. 일본에는 우리보다 기독교가 25년 먼저 들어갔는데, 일제 침략기가 있기는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예배는 우리 역사관과 마찬가지로 철저할 정도로 모두가 일본색입니다. 우리들한테 전수된 것이니까 감사하고 발전시키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세탁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공 선생님께서 만드신 예식서를 보면 이러한 일본 것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하신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 아는 얼굴들인데도 사회자가 “누가 나와서 추모사 하겠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도 순서담당자를 한 사람씩 소개하는 일본의 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도 일본에서 온 것이고, 이러한 추모식 때 검은 옷을 입고 흰 장갑을 껴야 하는 것도 일본의 군국주의나 천황제의 의식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흰 장갑을 끼고 예식을 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본과 우리 나라밖에 없습니다.

장공 선생님께서 1964년에 만들어 놓으신 예배서는 일본의 의식을 받아들여 한국 목사들이 만들어놓은 기존 예식서의 때를 전부 벗겨내서 순수하게 ‘우리의 예식’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1978년에 예식서를 만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장공 선생님의 예식서를 능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공 선생님의 예식서의 내용을 그대로 담아서 윤색하고 다듬어 펴냈습니다. 더구나 가정예식 같은 부분은 매우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했는데도, 장공 선생님의 성숙한 신앙적인 표현에 미칠 수 없어 거의 그대로 담았습니다.

그런데 놀랄 만한 것은 자료를 여기저기에서 수집하다 보니 저자의 이름이 빠지기도 했겠지만 예장 통합측에서 쓰고 있는 표준 예식서에 수록된 추모기도가 장공 선생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장공 선생님께서 쓰셨다는 것을 알았으면 넣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 기도문은 정말 신앙적으로 잘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공 선생님은 기장을 위해서만 공헌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해서 공헌하신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추도식을 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습니다. 독일, 영국, 미국, 어느 나라에도 추도식이 없기 때문에 누가 창작을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장공 선생님이 작문하신 이 추모기도는 한국 교회 역사에서 아주 대표적으로 기억되고 역사에 기록해 두어야 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는 이러한 장공 선생님의 유산을 담아보려고 무척 노력했고, 예장 통합측에서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기장 <희년예배서>에는 이것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25년 전에 예식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후학들에게 맡겼는데, 출판된 예배서를 보면서 제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장공 선생님의 가정 예식문 같은 정말 좋은 것들을 조금 다듬어서 넣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기장 <희년예배서>는 세계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역사의 변증법적인 발전 차원에서 예식서의 완성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만, 실제 현장에서 ‘Doing Theology’를 하면서 후학들이 선배들과 은사들이 만들어 놓은 예식문 같은 것을 다시 다듬는 신학적인 작업을 계속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 ‘추모사’라기보다는 1962 ~63년도 장공 선생님의 신앙이 표현된 그분의 작품인 예식서의 추모기도를 눈뜨고 명상해볼까 합니다. 이 추모기도는 “영원하신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세 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틀은 예장 통합측 표준 예식서에도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시간 장공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그분의 추모기도를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죽음과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영원한 희망을 갖게 하시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언제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오니 감사드리나이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고 ○○○씨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불러 가신 그 날이어서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여 모였습니다. 고인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안식을 감사드리나이다. 고인의 유족과 고인과 관계된 모든 이들, 모든 일들을 이 날 이 시간까지 믿음 안에서 붙들어 주시며 이끌어 주시고, 앞으로도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감사드리나이다.
용서의 하나님,
우리가 고인을 통한 하나님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없어 그 뜻을 펴지 못한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옵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인에게 다하지 못한 모든 정(효도, 우정, 신의)을 생각하며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여기에 우리들, 죽은 이나 산 이들 모두에게 하늘의 영원한 복을 허락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고인의 삶을 영원히 이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널리 펴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2004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