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長空 회보

[회보 제6호] 추모사 - 장공 김재준 목사 20주기 추모사 / 조원길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1:02
조회
1174

[제6호] 추모사

장공 김재준 목사 20주기 추모사

조원길 목사
(본회 이사, 남성교회 명예목사)

“사람이 어려울 때 한 마디의 명언이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 전(前) 동경대 총장 남바라 시게루 박사의 말입니다.

“나는 북해도 농촌 출신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촌감삼(內村鑑三) 선생이 경영하는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이때 그분으로부터 받은 교훈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1949년) 저희교회에 남주석(南周錫) 목사님(본교 8회 졸업생)이 부임하셨습니다. 설교 때나 공부 시간에 자주 송창근 박사와 長空 金在俊 목사님의 신앙과 인격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때 깊은 감동을 받은 저는 長空 선생님께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즉시 회답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내 곁에 올 날이 있을 것이다.”

드디어 1953년 1월 강구고등공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남주석 목사님과 상담을 했더니 한신대에 선과가 있는데 거기는 고등학교 졸업을 못해도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즉시 부산 남부민동 임시피난학교를 찾아갔다. 아침 일찍 학장님 임시 사택을 방문했다. 잠옷을 입으신 채 나오신 長空 金在俊 목사님께서는 나를 보시더니 ‘너는 아직도 어리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면 내가 본과에 입학시켜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한마디가 나의 운명을 바꿔주는 동기가 되었다.

그 후 저는 포항동지상고 야간부에 겨우 입학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3년의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에 드디어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입학시험문제를 보아서는 도저히 합격할 자신이 없었으나 長空 목사님의 은총으로 합격되었다. 왜냐하면 3년 전 부산에서의 약속한 것을 실천해 주신 것을 나중에 어느 교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장공의 바로 살려는 노력 10가지 중 두 번째가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이 한마디가 오늘의 제가 서기까지 가슴에 품고 살게 된 가장 귀한 명언이 되었다. 그 후 수시로 長空 목사님은 제게 '의리 없는 인간은 시장 잡배보다 못하다' 고 가르쳐주셨다.

1958년 군에서 제대하고 2학기 등록을 하려니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휴학을 하고 귀가하려던 차에 마지막이 될지 몰라 長空 목사님에게 인사 드리러 갔더니 캐나다에 외유중이라기에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런데 며칠 후 서무과 최등립 집사님이 부르시기에 갔더니 학장님의 편지를 보이면서 내 봉급을 가지고 조원길이 등록시키고 식비는 내가 귀국하면 갚아줄 터이니 선처해 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땅 위에 어느 누구에게인들 이러한 인격을 배울 수가 있겠는가?

몇 개월 후 귀국하시게 되었다. 잔디밭 교정에서 교수님들, 직원, 그리고 전교생들이 환영회를 가졌다. 학장님은 간단한 답사를 하시고 느닷없이 ‘여기 조원길이 어디 있나?’ 저는 감히 나를 찾을 줄을 상상도 못했다. 주저하고 있을 때 친구 김대식이 날 보고 ‘학장님이 너를 부른다.’, ‘여기 조원길이 있습니다.’, ‘이리 나오라.’ 하시더니 책 한 권을 주시면서 “영어공부 잘해라” 그 책이 바로 M.Luther저(著) <Here I Stand>이다.

며칠 후 학장님이 부르시기에 갔더니 ‘너 식비가 해결됐어, 매 월말에 이화여대 약대 한초덕 교수를 찾아가면 얼마를 주실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보스턴대학에서 유학 중인 이영찬 목사님이 자기가 지도하는 미국교회 청년들이 장학금을 준비했는데 이 돈을 누구에게 줄까 하고 長空 목사님께 연락이 왔기에 마침 잘됐구나 하시고 저의 식비로 지급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영찬 목사님 내외의 은혜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974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사당동 소재 닭장을 개조하여 만든 남성교회에 처음 부임했다. 몇 개월 후 제 친척 되시는 어느 분이 대학교 이사장으로 계시는데 그분이 제 교회로 와보시더니 유학까지 갔다 와서 이런 어려운 목회를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대학교 총장으로 가자고 했다.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다. 마침 설날이라 수유리로 학장님께 세배를 하고 ‘총장 자리가 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이야기하자, “총장 자리가 무엇인데 목회지를 떠나려고 하느냐?” 내가 그때 총장 자리를 따라 갔더라면 몇 년이나 견디겠으며, 그 후에는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 소식에 의하면 長空 목사님께서 망명 차 캐나다로 가셨다기에 행여나 살아생전에 뵈옵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마침 부흥회를 인도하는 초청을 받고 토론토에 갔다. 추운 겨울날 드디어 두 내외분을 만났다. 노사모님이 손수 만든 커피를 대접받고 지난날의 고마웠던 은혜를 나누고 돌아설 때 마침 함박눈이 쏟아져 뜨거워지는 내 눈시울을 감추지 못했다. 현관에 서서 내 모습이 살아질 때까지 배웅하시는 두 분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나는 일찍이 6.25 동란으로 16살 때 아버님을 잃고 오늘날까지 고독과 외로움 속에 살아온지라 長空 목사님의 깊은 사랑을 받고 한 걸음 두 걸음 눈길을 밟으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임종직전 長空 목사님과의 마지막 유언이 떠오릅니다.

“학장님, 학장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그래, 꼭 한 가지 있다. 평생토록 한 교회에서 떠나지 말고 섬겨야 해”

이제 장공 목사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이 땅에서 제가 어떻게 보답할까요?

고린도전서 13:12 말씀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학장님 저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저로 하여금 저 낙원에서 학장님 곁에 저를 앉혀주시고, 땅 위에서 갚지 못한 은혜를 영원히 보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저의 소원의 기도입니다.

(2007년 1월 25일 장공 김재준 목사 20주기 추모예배 추모사)



두 장의 사진은 한국동란(1951~1953년) 시기에 부산 남부민동 지역에서 조선신학교 신학교육의 장으로 동란이후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간 지도자 양성에 매진했던 현장을 나타내고 있다(위쪽사진-조원길 목사님 뒤편으로 보이는 흰색 건물은 당시 김재준 목사님께서 사택(舍宅)과 교사(校舍)로 사용했던 건물, 아래쪽 사진-한국동란 시기 부산 남부민동 지역 조선신학교에서 채플을 드리는 모습).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6호] 2007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