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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제5호] 추모예배 설교 - “유한과 무상” / 이장식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0:15
조회
736

[제5호] 추모예배 설교

“유한과 무상”
(전도서 9장 11-12절)

이장식 목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전도서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유한성과 무상을 읊는 산문시와도 같은 것이다. 고대 희랍의 에피큐리안 철학을 통속적으로 쾌락주의라고 말하지만 실은 회의주의자들이었다. 회의적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사물을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면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들은 오랜 전통을 가진 희랍철학의 진리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되었다.

구약의 전도자는 세상을 관찰한 결과 세상만사가 무상하고 한계가 있어서 반복을 거듭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 지혜와 선과 의와 같은 가치도 그것들을 제약하고 억압하는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없음을 실토하고 있다. 즉 빠르다고 해서 경주에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니,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가미에 걸리는 것처럼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와 힘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회의하지 않으며 우주의 유목적성(有目的性)을 무신론적으로 회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을 알아 달라고 말한다(전도서 11:9).

오늘 우리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19주기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동안 그의 생애와 신학과 사상에 대한 많은 글들이 나왔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체적인 이해보다는 부분적인 이해들이 많은 듯 하다. 그의 생애의 평가를 위해서는 그의 인생철학 또는 처세철학을 파악해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말은 “지혜”를 두고 하는 말이며, 지혜는 진리와 같은 말이며, 그것은 불변의 것, 즉 항존하는 것을 말하며,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지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조석으로 또는 바람이 부는 대로 달라지는 사람도 있다.

“장공”이라는 아호를 김재준 목사님이 언제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셨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가 그 아호를 자기의 인생철학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하시고 애용하신 것만은 사실이다. 장공은 높고 끝없는 숭고한 진리와 지혜의 영계를 상징하는 말이며, 그것은 땅에서 높이 솟아오를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날아 올라 갈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전도자의 관찰처럼 그러한 사람이라 해서 모두 장공의 소신대로 올라가 날라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생애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1985년 경에 나는 김재준 목사님의 댁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는 모든 일로부터 떠나서 조용히 계신 때였고 쇠약한 몸을 가지고 계셨다. 이때 그는 종이와 붓을 가지고 나오셔서 한 폭의 글월을 써 주셨는데, “朋鳥飛雲外 渺茫無際”라는 글월이었다. 즉, 큰 새가 구름 바깥으로 저 멀리 훨훨 날아가니 그 자취도 묘연하고 끝없이 가는데도 없다는 말이다.

그가 이 글월을 쓰신 때는 그가 이 세상에서 신학이고, 정치이고, 또 교회이고, 국가이고, 다 손을 떼고 이제 남은 그의 영혼이 수정같이 맑고 맑은 영계로의 상승(上昇)을 대기하시는 심정을 나타내신 글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2년 후 타계하시고 그 후에 나는 아프리카 먼 대륙으로 떠났다.

중국 고전의 역서(易書)에 있는 말에“하늘 높이 날아 오를 독수리가 날개를 덮어놓고 땅에 앉아 있다”고 한다. 이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생애와 그의 처세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장공은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의지와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는 때때로“잔인한 그물”에 걸렸고“올가미”에 걸렸었다. 그는 조예 깊은 한학의 지식과 구약성경과 신학 전반에 대한 깊고 올바른 지식과 식견을 가졌었지만 조선신학교 교육을 억압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의 그물과 조선총독부의 올가미에 걸려서 신학교육을 제대로 실시하거나 신학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신학교 건교이념과 지향한 신학의 학문적 발전이 저지되어서 신학교 수명의 연명에 급급할 수 없었다.

8·15 해방이 되어서 모든 것이 자유롭게 되어 조선신학교가 한국교회의 재래의 신학사상과 교육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시작하였을 때 1947년 봄 학생들이 놓은 올가미에 걸렸고, 보수적인 교권주의자들이 친 보수주의적 잔인한 그물(이단 논쟁)에 걸려서 그의 신학 연구와 그가 할 수 있는 공헌의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아무튼 1954년 이후 기장의 출범을 계기로 한국신학대학은 자유롭게 신학교육을 실시해 갈 수 있었고, 6.25 동란 중에 납북되어 가신 송창근 박사님의 뒤를 이어 학장으로서 신학교육의 중책을 맡을 수 있는 분이 장공이었으나, 그 동안의 이단논쟁과 교단분열 와중에서 부득이 함태영 목사님이 학장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過程)에서 장공은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고 의기도 소침하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함태영 목사님이 언제나 학장실에 계시지 않고 심계원장으로 관청에 계셨으므로 신학교 안에서는 김재준 목사님이 실질적으로 학장의 역할을 하셨다. 그러다가 1959년에 함태영 학장 후임으로 장공이 학장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 군사정권이 60세 정년제를 실시하게 되자 장공은 또다시 군정이 친 잔인한 그물에 걸려서 참으로 오랜만에 맡게 된 학장직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로 그는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되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정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과거에 그는 이런 운동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으나 교회와 신학의 개혁정신이 정치개혁 운동에 접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조용한 개혁사상가였지 소위 운동가(actionist)는 아니었다. 이 방면에 관한 장공의 활동을 다루는 연구가들이 유의해야 할 점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장공이 살아 온 생의 여정을 통해 그의 인생살이의 지혜와 그가 고수한 진리를 캐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가 고전 한학에서 배운 천도(天道)에 대한 깊은 외경(畏敬) 즉, 하늘을 두려워하는 경건과 구약성경 연구에서 얻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Fear of God)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그것이 그의 겸비와 온유와 함께 그의 신심과 사고의 심연(深淵)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신비가도 아니었고 웅변가도 아니었으나 그의 생각과 말의 뜻은 깊었었다. 그는 글을 잘 썼지만 말재주나 말장난을 일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하늘을 두려워하고 순종(順天)하였으며, 아래로 사람들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높이며, 남을 해치지 않았고 원수를 미워하지 않았다. 높고 넓은 하늘 같은 마음이었다. 중국의 고대 성왕들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순천(順天)하는 신심을 가지고 백성을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생각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서 정치하기를 바랐다. 이것이 땅을 잘 다스려서 하늘을 이루고자 한 地平天成의 왕도정신이었다.

나는 장공의 이러한 경건을 엿보고 있었다. 그를 치고 괴롭혔던 한국교계 인사들이나 그를 해롭게 한 정치세력들에 대해서 그는 악담 한 마디 하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장공을 존경은 하겠지만 닮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장공의 일생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그의 특이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선비로서의 성품이다. 그는 한학에 정통한 선비였다. 이조시대에 선비들은 주로 초야에 묻혀 살면서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막고 조정에 호소하거나 백성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그들을 대변하며 변호하다가 고난을 당하였다. 중앙 조정의 대신들도 선비였지만 높은 자리와 부귀를 탐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동자동 시대의 조선신학교의 경건에도 이물질이 섞여 들어왔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경건도 선비정신이다. 정직성, 진리애, 정신적 자유, 교화(敎化)의 덕이다.

구약성경에 예언자들이 선비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율법과 정치를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왕과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귀족들의 악정과 착취와 타락을 규탄하다가 고난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선비는 선과 악, 의와 불의 및 진리와 허위를 구별해서 악과 불의와 허위에 항거하여 도의(道義)를 바로잡아 나라와 사회를 바로 세우고 보존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청빈하고 결백하고 물욕과 탐심을 멀리하고 거짓이 없었다. 장공은 일생 청빈생활을 하셨고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장(長) 자리를 탐내지 않으셨고, 한 마디로 성경에서 경고하는 모든 탐심을 멀리하셨다. 장공이 나에게 다른 간단한 글월을 주셨는데 “慾淡輕心”이라는 말이었다. 욕심이 적으면 마음이 가볍고 편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소신이며, 또한 그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도서의 저자는 세상만사가 무상하고 헛된 것 같지만 카오스(혼돈)로 생각지 않고 만사를 초월하여 만사를 살피시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이 유한하고 무상한 시간의 세상 넘어 영원에서 세상만사를 원격조정 하시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잔인한 그물이 많고 작고 큰 올가미도 많지만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이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이처럼 전도서의 결론이 되면서 적극적인 교훈을 인간에게 주시는 말이 11장 4-9절에 있다. 즉 바람이 불어가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또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하겠지. 그래서 너는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씨를 뿌리지 못하고 또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면서 거두어들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드리라. 하나님께서 너의 씨 뿌리는 일과 거두어 드리는 일을 살피시고 너의 하는 일을 심판하신다.

(2006년 1월 24일 장공 김재준 목사 19주기 추모예배 설교)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5호] 2006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