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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제8호] 강연 - “본향을 향한 순례자의 길” / 연규홍 교수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4:17
조회
683

[제8호] 장공의 삶과 영성

“본향을 향한 순례자의 길”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과 영성-

연규홍 교수
(본회 학술위원 / 한신대학교)

1.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을 따라

 

김재준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창골에서 태어났다. 유학자인 아버지 김호병(金虎炳)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배우고 들과 산을 품으며 자랐다. 그가 신학문에 접한 것은 그의 나이 9살 때였다. 그는 산골에서 벗어나 도회지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16살 되던 해 회령의 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 장공(長空)은 첫 직장으로 회령군청 재무부 직세과를 선택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가난한 삶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결혼 후 그는 웅기의 금융조합으로 자리를 옮겼다.

웅기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의 관문이었기에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만우 송창근(晩雨 宋昌根)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송창근은 웅기에 요양하러 내려왔다가 장공의 미래적 가능성을 보고 서울로의 유학을 강력히 권하였다.

서울은 그에게 많은 실망을 주기도 했지만, 그에게 인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곳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그가 예수를 믿고 거듭남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아주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가리웠던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욕심쟁이가 되었습니다. 굶은 놈이 밥 먹듯 성경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기쁨이 넘칩니다. 화평이 옵니다. 위대한 미래가 눈앞에 전개됩니다.‘보라,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하는 실감이었습니다. (김재준,“순례의 길”,「십자군」제6호[1952. 2.])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예수처럼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을 살고자 그는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신학에 관한 큰 꿈을 갖게 되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학문이다. 그가 거듭나기 전에 읽었던 성경은 단지 하나의 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은 그에게 “이상한 책”,“언제나 새로운 책”,“가리우면서도 드러난 계시의 책”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어떻게 올바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장공의 신학여정과 영성세계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서울 생활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낙향 후 3년 동안 근처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는 신학의 꿈을 더욱 간절히 키워 갔다. 일제하에서 민족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과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교육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장공은 1926년 일본 유학을 결단하였다.

일본 아오야마(靑山) 신학원을 졸업하고, 28살이 되던 해 그는 미국으로 더 큰 배움의 세계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프린스톤 신학교를 거쳐 웨스턴 신학교에서 그는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1932년 봄에 귀국하였다. 해외 유학까지 마친 한국교회의 일꾼이었지만, 장공을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장공은 교회도 신학교도 아닌 숭인상업학교 교사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서와 신학 연구에 몰두하여,「신학지남(神學指南)」에 수준 높은 글들을 기고하면서 필명을 넓혔다. 그 가운데 장공의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란 글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보수주의 신학의 선봉장인 박형룡 박사에게 장공이 성서를 파괴하는 고등비평적인 방법을 쓴 자유주의 신학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형룡 박사를 위시한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장공은 신학 문제에 있어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장공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숭인상업학교를 사임하고, 국외(國外)라 할 북간도 용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캐나다 선교부가 세운 은진중학교에 몸을 담고 그는「십자군(十字軍)」이라는 개인잡지를 통해 내면에 불타는 그의 한국교회 개혁과 민족교육의 원대한 구상을 발표하였다. 특히 그는 순교자들의 생애를 연재하며 자신의 신학과 영성세계를 굳건히 세워나갔다.

2. 조선인에 의한 세계적인 교역자 양성의 큰 꿈

 

장공이 한국교회사의 표면에 나서서 공헌하게 되는 것은 1940년 조선신학교의 설립에서부터이다. 1901년 세워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교회 목회자 양성기관이었다면, 조선신학교는“조선인에 의한 세계적인 교역자 양성”이란 교육 목적을 내걸고 자립적 재정구조와 신학교육의 독자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 속에는 장공이 꿈꾸어 왔던 민족 교육이념과 신학사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을 지역 패권주의를 내세워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선교사들의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이며, 또한 자유주의 신학에로 한국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과연 그러한 것인가? 아니라면 장공은 어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조선신학교를 태동시켰으며, 그것은 과연 1953년 교단 분리로까지 갈 만한 이단적인 신학사상을 교육한 것일까? 그리고 장공이 1960년 이후 민주화, 인권운동을 통한 역사참여가 그의 신학 사상과 민족 교육이념과는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가?

3. 하나님 말씀의 자유적 영성

 

장공이 한국교회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한국교회를 성서의 문자 우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 말씀의 자유함을 확보한 것이다.“나는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며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딤후2:8) 한국교회는 성서를 매우 사랑하는 전통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서 해석의 미숙과 오류를 이유로 언제까지나 선교사들의 교리적, 교권적 해석에 묶여 있을 수많은 없었다.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역사비평적 성서연구 방법론은 성서의 내용인 계시적 사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단, 그것을 담고 있는 계시의 양식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성서를 성서되게’, 즉 그것이 무엇에도 종속되거나 갇힐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역사비평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성서가 비판됨으로써 그 진가가 상실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종래의 불순한 진애(塵埃)가 일소되고 그 본질적인 것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사이비적 신학자들이 자기가 추상해 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편한 대로 성경을 왜곡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문학적 - 역사적 비판의 결과 그런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경기자의 본의가 무시를 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김재준,“성서 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십자군」[1950. 2.])

성서에 대한 바르고 건전한 이해가 없이는 한국교회가 참으로 바르고 건전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해석과 선포에 봉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장공이 축자영감설을 반대한 것은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인본적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자유에 근거한 학문과 경건이라는 개혁교회 전통을 이어가는 영성세계가 있는 것이다.

4. 하나님 말씀의 통전적 영성

 

장공이 한국교회사에 기여한 두 번째 공헌은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립을 계기로 하나님 말씀의 통전성을 지향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장로교회는 제37회 총회를 열고 불법적으로 조선신학교 출신들에 대한 목사 안수 제한과 함께, 김재준과 이에 동조한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를 제명 처리하였다. 따라서 이듬해에 제38회 호헌 총회로 모인 조선신학교측 교회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⑴ 우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조선 역사와 조선교회의 토양에 심어 그리스도 자신의 영적, 윤리적, 사상적 교통을 우리 생명체에 화신하게 힘쓴다.(4항)
⑵ 우리는 전인적인 생활 신앙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에 책임적으로 참여한다.(5항)
⑶ 우리는 역사와의 상관관계에서 신학의 가변성과 그 강조점의 전위를 인정한다. 교권에 의한 소위 정통신학의 독재는 복음의 율법화와 교회의 정체성을 조장한다.(6항)
⑷ 신학은 교회의 봉사자요, 교회는 인간, 특히 피압박 계층의 봉사자다.(7항)
⑸ 우리는 우리 역사의 그리스도화에 적극 공헌한다. 그것이 최선의 선교 방법이기도 하다.(8항)
<크리스챤 신문>, 1985. 7. 13.

“우리는 온전한 복음을 생활의 전 영역에 증거한다.”복음의 영역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까지 넓혀져야 한다. 즉, 복음은 신앙생활만이 아닌 생활신앙으로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나야 한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교회만이 아닌,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인 것이다.

장공의 하나님 말씀의 통전성의 지향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이분법적 신앙구조의 극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본래 기독교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 내세와 현세,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등 이원적인 신앙구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은 항상 이 두 극 사이의 긴장을 적절히 조화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복음 이해에서 이분법적 신앙구조는 극히 배타적이며 반문화적이고 타개적인 것이 되었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세의 천당 갈 준비과정이나 지옥에의 유예기간으로 간주되었다. 이곳에 한국교회가 역사 현실에서 유리와 도피를 가져온 근본 이유가 있다. 장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제 이 한국을 우리의 소재(素材)로 받았다. 우리는 한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의 역사를 조성하며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의 천국 역사로 변질시키는 업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 자신의 당면 과제는 주어진 이 한국 역사를 어떻게 그리스도의 바탕으로 화(化)할까 하는 일념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고를 버리시고 인간 역사 안에 성육신하셔서 이 역사의 구원을 위하여 그 피의 최후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 땅에 묻힌‘한 알의 밀’이 되신 것 같이 크리스천이 역사 안에 보냄 받은 것은 역사에서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그 전 존재를 쏟아 그리스도의 속량 의지에 충성하는 데 그 소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어진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각 부분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 조형이념(造型理念)이 되며‘혼’(魂)이 되게 하는 데 책임적으로 전력해야 한다. (김재준,“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십자군」[1950. 6.])

따라서 이 점에서 장공은 교회가 서 있는 세상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세상을 위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세상을 하나되게 할 교회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다름을 포용하지 못하고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고 분열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 복음의 통전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된 교회를 나누는 분열의 죄까지도 지었다.

그러나 장공은‘가인에게 죽임 당한 아벨’처럼 이단으로 정죄되어 쫓겨났지만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로 받아들이고 한국교회가 함께 교단 분열의 죄책을 고백하고 하나되기 위한 철저한 자기 부정(否定)의 계기로 승화시켜 나갔다. 여기에 장공의 하나님 말씀의 통전적 영성이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역사 참여와 교회 일치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에 의한 자기 부정과 거듭남을 통한 인격과 삶의 통전성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의 역사참여와 일치 운동이 이 땅에 하늘의 씨앗을 심어 가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5.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영성

 

장공이 한국교회사에 기여한 세 번째 공헌은 그가 1961년, 교수직을 강제 퇴임 당한 이후 한국 사회의 권위적 통치 권력 하에서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확보한 데 있다. 장공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수의 길에서 현장에서 실천으로 교육하는‘행동하는 교육자’가 되었다.

1960년 4․19혁명을 무산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5․16 군사정권을 향하여 장공은 두려움 없이 민주화를 외쳤다. 특히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은 그에게 한국 민중의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는 역사의 희망을 갖게 하였다. 장공은 이 때 민중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역사의 희망을 전하는「제3일」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그에 의하면「제3일」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삶은 오늘도 내일도 내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아 십자가에 죽여 무덤에 가두고‘이제 됐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하며 무덤을 헤치고 예수를 부활시켰다. 예수에게 제3일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이다. 이날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며 기독교도 없다. 새 역사는 이날에 시작된다. (김재준의「제3일」창간호)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한국교회가 로마서 13장 1절을 근거로 권력에 굴종할 때, 장공은“제3일의 신학”으로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지켰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독교 정치윤리를 제시한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만“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어떠한 개인이나 조직에 이것을 맡길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출20:3)이거나,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붉은 용(계12:3)의 횡포인 것이다. 장공에 따르면 예수 운동은 절대적 권력에 대항하며 그 권력 하에서 압제당하고 파괴된 인간들을 치유하며 자유케 하는 해방운동이다.

예수 인간 자유 운동은 인간을 그 근원적인 포인트에서 노예화하는 인간 이상 하나님 이하의 악마적인 세력자를 정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오늘로 말한다면 구조악이라든지, 자기를 신격화(神格化)하여 압제와 횡포를 일삼는 독재 권력이라든지……그리고 그는 병자를 고쳤다. 그것은 육체적 파괴 세력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운동이었다.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 일으켰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한 것이다. 그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것은 도덕적, 율법적 강박에서 인간을 자유하게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 (김재준,“인간 운동”,「제3일」13호)

장공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무엇에게 맡길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 죽는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예수가 한 것처럼 세상의 절대 권력과 맞서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장공이 1970년대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인권,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 투쟁한 역사 참여의 영성에 있는 것이다.

장공의 영성 세계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말씀의 회복, 즉 하나님 말씀의 자유함을 회복하고 말씀의 통전성을 지향하였다. 하나님 말씀은 비록 창조하신 세계를 영과 육,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별은 하지만,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전성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지배 권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역할을 허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신성화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에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공은 1987년 세상을 뜰 때까지도 인간의 권력과 물질, 그리고 이념에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지키기 위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다. 그 누가 장공을 무엇이라고 말하든 장공 김재준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교회 개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일생 동안 추구한 민족 교육자로,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21세기 한국교회의 개혁과 주체적 형성을 위해 빛을 던져주는 예언자적 사상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07년 11월 9일 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CSKC)의 제1회 신앙공개강좌(레익뷰한인장로교회)에서 강연한 원고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8호] 2008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