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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7호] 추도사 - 장공 김재준 목사 21주기 추도사 / 김이곤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2:52
조회
744

[제7호] 추도사

장공 김재준 목사 21주기 추모사

김이곤 목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끝없이 길고도 먼 하늘, 長空, 그런 그 하늘을 쳐다볼 때면, 늘 長空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오늘은 장공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신지 21년째를 맞는 날입니다. 그 동안 이 맘 때가 되면 늘 목사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줄을 지어 심중에 사무친 追慕의 글들을 올려 왔었습니다. 오늘은 스물한 번째로 부족한 저에게까지 이 영광스러운 순서가 돌아왔습니다.

21년 전, 한양대학교병원 병실을 찾았을 때의 그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운명하시기 한 이틀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 자세가 조금도 전혀 흩으러 지지 않은 꼿꼿한 자세이셨다는 것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만, 그보다 제게 있어서 더 인상적인 것은, 별로 유명하지도 못하고 또 한신 외곽지를 떠돌던 나 같은 사람에게마저 매우 정중한 자세로 그리고 임종 이틀 전의 그 피곤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그냥 누워 계시지 않으시고 일어나 앉으셔서 문병 온 이 부족한 소외된 제자의 손까지도 다정하게 잡아 주시고 신학과 교수들과 비신학과 교수들 사이에 내재해 있는 그 첨예한 긴장관계를 걱정하시면서“학교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씀하시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어찌 그때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운 장공 목사님! 목사님께서 그토록 염려하셨던 신학교는 지금 개교 이래 처음으로, 선교사의 손으로가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의 힘으로 그것도 장공 선생님께서 사랑하여 키우셨던 제자들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산하의 支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수유리 캠퍼스에 우뚝 <장공관>이라는 이름의 “본관”을 신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버거운 작업이지만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공 목사님을 사랑하시었던 그것만큼 우리 한신 신학교육도 또한 똑같이 그렇게 사랑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제2의 코페르니쿠스 시대라고 하여도 전혀 무리가 아닐 만큼, 정말 혁명적인“새 천년 기의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 이미 우리의 時空을 거의 완전히 장악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것은 거의 모두가 다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대세이고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설정하신“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善이고 正義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우리는 우리의 옛 이념만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으로 삼고 그것이 유일한 선이라고 아직도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의 기독교사회는 new millennium의 불가항력적인 변화요구 앞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서 이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전날의 그 시행착오를 또다시 여전히 되풀이하려고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돌아볼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극입니다.

장공 목사님!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새삼, 목사님이 너무 그리워집니다. 무덤을 열어젖히고 우리 시대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주셨으면 정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는 또한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시대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가 해결하여야 할 “우리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어느 하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우리의 理念的 獨善은 그 도가 지나쳐서 불회귀의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아, 이 희망 없는 우리들! 장공 목사님, 이 불쌍한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1950년 5월호「십자군」誌에 쓰신 “성서비판의 의미와 그 결과”라는 논문은, 놀랍게도, 반세기 전인 그 때부터 이미 장공 목사님은 21세기를 새롭게 만들어 갈 분명한 “代案”을 갖고 계셨고 그것을 조금도 모호하지 않은 논리로 또박또박 설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 조용하고 너무 여린 소리로만 오해되어, 목사님의 그 “세미한 소리”(왕상 19:11~12)로부터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저 대예언자 엘리야의 귀와 같은 그런 귀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아서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낡은 理念만을 자화자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장공 목사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서가 바로 그 계시 자체는 아니다. 단지 그 계시를 신앙고백의 방식으로 “증언하는 책”일 뿐이다. 이 증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그 하나님은 전혀 전적으로 “긍휼의 신”(“엘-라훔”)이시므로 그의 그 말씀 계시 속에 하나님은 일관된 인간구원의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나 결코 치우치지 말고 성서를 “하나님의 살아있는 구원의 말씀”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그 일” 만을 우리 기독교 지도자의 유일한 사명과 유일한 선교적인 과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左도 右도 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善이기 때문이다.

라고 힘주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의 신학>을 바르게 수립하는 일, 그 일만이 새 시대의 사명이라는 것이 목사님의 遺志였음을 우리가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은 <위기가 곧 기회>임을 웅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의 기회를 우리가 또다시 놓친다면 우리는 정말 역사의 죄인이 되리라는 두려움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장공 목사님! 우리에게로 오셔서 우리의 가슴 가슴에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 주십시오. 그리고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하사엘에게로, 예후에게로 그리고 엘리사에게로 달려가게 하소서(왕상 19:15~16). 그렇게 하여 주님 나라의 건설을 파괴하고 있는 오늘의 이 “反 성서적” 교회주의 환상과 그리고 한 쪽으로만 치우친 우리의 이데올로기 우상화의 환영을 깨뜨려서 이 땅의 교회들이 모두 오직 주의 말씀 위에만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목사님의 독려가 지금처럼 이토록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가 과거엔 별로 없었습니다. 굽어살피시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 속에 찾아오신 부활의 우리 주님처럼 목사님께서도 우리 속으로 찾아와 주소서!

(2008년 1월 24일 장공 김재준 목사 21주기 추모예배 추모사)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7호] 2008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