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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9호] 추모사 - “구만 리 장공 훨훨나는 자유인” / 서광선 목사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4:59
조회
714

[제9호] 추모예배 추모사

“구만 리 장공 훨훨나는 자유인”

서광선 목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저는 김재준 목사님이 창설하신 기독교장로회 교인도 아니고 소속 목사도 아닙니다.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목사입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이 창설하시고 교수님으로 강의하신 한국신학대학 출신도 아니어서 교수님의 그 많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의 반열에도 끼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 조직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박사님의 구약학회의 회원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것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아니라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원, 김재준 목사님이 1930년대 신학공부를 미국서 하실 때 치열하게 신학이념 논쟁을 한, 그 자유주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프린스턴 후배 명단에도 낄 수 없었습니다.

이토록 여러 모로 자격도 없고 연고도 없는 저에게 김재준 목사님의 추모예배에 초청해 주시고, 추모의 말씀까지 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동안 외국생활을 하는 동안 김재준 목사님의 추모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같은 학교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으러 오신 박형규 목사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 재준 목사님이 어떻게 이단으로 몰려서 파면당하고 한국신학대학을 세우고 기독교장로회를 창설하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박 목사님의 말씀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이후 김양선 목사님이 쓰신『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를 읽고 한국교회 분열의 역사를 보다 자세하게 배우게 되면서,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과 신념과 용기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신학도로서 김재준 목사님과 같은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는 못 된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신학자, 신학적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어 귀국한 해가 바로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획책하고 있을 때이고, 김재준 목사님이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사울 왕처럼 사람들이 등을 미는 바람에 이에 반대하는 국민운동본부의 장으로 일하실 때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가 열리면서 김재준 목사님이 저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동인 신학잡지를 하나 낼 터이니, 동인들 모임에 나와 주시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김재준 목사님의 춘추는 만으로 69세, 저는 새파란 39살이었습니다. 30세 차이가 나는 대 선배가 새까만 후배에게 잡지를 함께 하는 동인으로 불러 주시는 데 감격한 나머지 사양도 못하고 나가서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월간 신학잡지,『제3일』의 동인이 되어 매달 모여서 편집회를 하고, 글을 쓰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김재준 목사님의 첫 말씀이 있습니다. 저의 인사를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 "박형규 목사한테서 유니언 시절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 양반이 동인으로 추천하더군. 한국에 와서 일하게 된 것 환영해요.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배운 대로 말하고 배운 대로 가르치고, 신념을 굽히지 말고 소신대로 잘 하시오." 옆에 계신 분들이 "아니 또 젊은 사람, 목사님처럼 고생하고 불행해 지는 걸 보려고 그러십니까?" 하시던, 농담 섞인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때 초면에 저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살고 말하고 가르치고 하면서 불행하게 느끼거나 좌절되지 않고 오늘까지 이렇게 김재준 목사님의 추모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김재준 목사님의 기도의 은혜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1970년, 한국정치의 추운 겨울이 닥쳐오는 것을 몸으로 느끼신 김재준 목사님은『제3일』창간호 권두언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 무서운 침묵 속에서, 작은 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고 외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아주 소수파에 속하는 [증언자]들이다.…교권자들이 예수에게 '좀 침묵을 지켜 달라' (요사이 말로 '미네르바야, 허위사실, 유언비어 퍼뜨리지 말라')고 했을 때, 예수는 '내가 잠잠하면 이 길 가의 돌들이 부르짖고 나설 것이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산 분화구 같이 치밀어 오르는 '신의 대언'으로 되기 때문이다.…(1970년 9월 창간호, 3쪽). (요사이 말로 하면 2008년 봄 작은 촛불 하나가 화산 분화구처럼 타오르는 것을 김재준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장기집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로 온 나라의 입과 귀를 막으면서 1974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제3일』은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결국 같은 해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시면서『제3일』해외판을 복간하여, 1981년 6월까지 총 60호를 계속 발간하셨습니다. 그 이후 귀국하셔서 전두환 대통령 치하에서도 잠잠하시지 않고 조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다가 1987년 6월 항쟁도 못 보시고, 유신헌법이 폐기되는 역사도 못 보시고, 박종철 군을 앞서 보내시고는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으시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감히 두 가지 제언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김재준 목사님이 시작하신『제3일』을 복간하자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창간 동인이었던 분들, 박형규, 이문영, 김경재, 김용복 등 몇 분과 김재준 목사님의 한신대 후배 제자들 중 몇 분이 복간위원들이 되어 몇 주 안에 모여서 시작할 수 있지 않겠나 제안해 보는 것입니다. 1970년 창간호에서 쓰신 것처럼, 오늘날 이 무서운 침묵을 강요하는 어둡고 추워지는 때에 우리의 작은 소리, 촛불처럼 작은 불꽃이, 어두움을 밝혀 주고, 침묵의 함성이 되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둘째 제언은 김재준 목사님이 1953년 대구 서문교회에서 한국전쟁의 한 복판, 피난지에서 4월 24일, 한국 장로교 제38회 총회에서 '목사직에서 파면 당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지' 당했습니다.(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이제는 이 불행한 과거사를 청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파면선고를 취소하고, 복직시킴으로서, 동시에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통합하는 역사를 만들 수 있는 화해의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하시면서 "나는 (갈라진 것이) '분열'이 아니라, '분지'라고 설명했다. 나무가 자라려면 줄기에서 가지가 새로 뻗어 나가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천사무엘,『김재준: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58쪽에서 재인용). 이제 나무가 많이 자라서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거목이 되었으니, 하나의 나무로 그 큰 가지에 새들이 모여 들고 나무 그늘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쉬고 가도록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디아서 5:1)" 바울 사도의 당부입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스승에게 바치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구만 리 장공 훨훨 날아다니시던,…" 자유인 김재준 목사님께서, 삶으로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신학의 자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이 소중한 자유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땅 속에 매장되었다가도 제3일에는 다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일어나 부활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주시고 당부하시고, 아직도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김재준 목사님의 조용한 음성이 다시금 들리는 것 같습니다.


(2009년 1월 22일 장공 김재준 목사 22주기 추모예배 추모사)

(2009년 1월 22일 장공 김재준 목사 22주기 추모예배 사진)

*이 추모사의 제목은 문익환 목사님의 헌시에서 따 온 것입니다. 천 사무엘 저『김재준: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202쪽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필자주.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9호] 2009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