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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1호] 장공기념강연회 -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 박형규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08:07
조회
657

[제11호] 장공기념강연회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 장공과 제3일 -

박형규 목사
(본회 고문 / 기장 증경총회장)

長空기념사업회에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참 고맙고 가슴 설레는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준비를 하려고 내게 있는 장공의 책들과 관련된 책들을 이것저것 뒤지다 보니, 아차 나는 정말 아직도 철이 들든 노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기야 나는 본래 약간 모자라는 사람이고 그래서 장공께서도 나의 이런 점을 좋아하셔서 자기가 직접 가르친 훌륭한 제자들이 있음에도 좀 까다롭고 힘든 일을 꾸미실 때는 꼭 나처럼 약간 모자라는 사람을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朴正熙가 三選改憲을 하려고 칼을 빼들고 국민을 위협할 때였습니다. 특히 언론에 대한 위협이 대단할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기독교 사상》의 주간이었고 또 서울YMCA《시민 논단》의 위원장이었습니다. 뜻밖에 장공께서 찾아오셔서《기독교 사상》은 뭐하는 잡지고《시민 논단》은 왜 생긴 거냐고 호통을 치시고 가셨습니다. 물론 나는 알아차렸지요. 그래서 당시 기독교서회 총무이셨던 조선출 목사와 YMCA 총무 전택부 선생의 양해를 얻어《기독교 사상》은 개헌론 특집으로 꾸미고,《시민 논단》은 삼선개헌 찬반토론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 나는 장공에게 떠밀려 장공의 반독재투쟁의 최전선에 서게 된 거지요. 그때 청와대에서 말단 비서로 있던 친구가 “자네 이름이 리스트에 올랐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해 줬습니다.

그 후 저는 기독교방송 상무로 방송에 관계되는 일을 하게 되고 동시에 도시빈민 조직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이미 인천과 영등포에서 조화순 목사와 조지송 목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산업선교 운동을 연결하고 가톨릭쪽의 비슷한 활동을 통합해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를 발족시켜 신·구교가 힘을 합쳐 사회적 약자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과 권익이 그들의 조직된 힘에 의해 쟁취되는 것을 도우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회가 민주화되고 政權이 民權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우리의 사회선교는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권을 쟁취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저는 아마 정열이 가장 왕성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방송국 일만해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어째서 이런 저런 일에 관여하고 장공께서 《제3일》을 내시겠다고 동지들을 모울 때는 제게 연락하라고 비서노릇까지 시키셨습니다. 그 당시 제 사무실이 넓었고 종로5가 기독교회관 맨 윗층에 있었음으로 교통도 좋고 여러 가지 불온한 모임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방송국에 간 것이 1970년 4월이고《제3일》 창간호가 나온 것은 같은 해 9월입니다. 그리고 나는 71년 朴正熙가 3선 대통령이 된 지 석 달 만에 방송국에서 쫓겨났습니다.

《제3일》의 편집 모임은 여기저기 식당을 빌려 모이기도 하고 간혹 목사님댁에서 모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그때 모인 분들 중 아직도 땅에 붙어있는 분은 몇 명 없을 것입니다. 잡지이름을 《제3일》로 하는데도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결국 장공의 歷史神學에 따라 지금은 민주주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때이지만 3일 후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민주주의는 반드시 살아난다는 뜻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장공께서 돌아가시기 전 1986년에 그 분이 제게 주신 두 가지 선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해 5월 入院하고 계실 때 주신 주재용 교수가 엮은『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인데 거기에 표지를 넘기면 “慕義如飢渴”이라는 붓글씨가 있고, 退院하신 후 9월에는 제게 水洲라는 雅號를 주시면서 水天壹碧 流砂成洲라 쓰시고 그 뜻은 逆流하는 물이 모래를 쌓아올려 큰 섬(洲)이 되게 한다는 것이라고 해설의 글까지 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87년 1월 27일 오후 해가 지고 어둠이 땅을 덮었을 때 너무나 조용히 영혼의 고향으로 떠나셨습니다. 葬禮節次가 다 끝나고 나는 그 분이 쓰시던 방에 홀로 앉아 앞으로 나는 長空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하면서 遺物을 정리하는 중 그 분의 座右銘이 적힌 額子를 발견하고 그것을 내 수첩에 적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 기념강연회를 하라는 지명을 받고 약간 당황했습니다. 과연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을 맡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疑懼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장공 선생께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심부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수락은 했습니다만 막상 글을 쓰다보니 後悔莫及이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장공께서 돌아가신 그 나이입니다. 역시 老欲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방법이 없을까 하고 이것저것 뒤지다가 장공께서 주신 책을 펴 보았더니 거기에 답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장공사상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었고, 특히 제가 부제로 붙인 “제3일”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평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기념사업회의 사업으로 이 책을 재출판 하든지 아니면 그 내용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골라서 독자들이 쉽게 구입해 볼 수 있는 문고판으로 만들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 죄송합니다. 이 책을 엮은 주재용 교수는 엮은이의 말 중에서 “그 어른이 지금까지 80여 평생을 어떻게 살아 오셨으며, 무엇 때문에 살고, 왜 살았는지를 나름대로 찾아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책을 엮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이 나온 지 20년이 훨씬 지난 오늘의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잃어버린 20년을 말하고 군부독재보다도 더 무서운 “신종플루”보다도 더 괴상한 “신종개발독재”하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먹구름 사이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 長空과 같은 분이 계셨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글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우선 이 책의 제2부 장공의 사상을 集約한 글들이 있는 “나의 생각 나의 믿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장공의 사상 특히 神學이 집약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맨 끝 부분“종교와 역사”는 장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장공은 배달민족의 역사와 종교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儒敎, 道敎, 巫敎, 佛敎, 天道敎, 天主敎, 改新敎 등 우리민족의 종교문화의 興亡盛衰를 자기의 성서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해석하고 또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종교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이탈하여 하나님께로 간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안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아니,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권능으로 변화시켜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종교인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역사를 창건해 가는 종교인 것이다(p.116). 장공의 신학은 이 한마디로 집약될 수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다음으로 “제3일”의 신학을 언급해야겠는데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책 제3부에 조성기 교수가 거의 완벽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제3일’의 광명 부활은 ‘제1일’의 암흑과 고난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감격이다. ‘제3일’신학은 ‘제1일’신학을 떠나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으니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역사는 동시대적인 그리스도가 일하시는(operate) 영역이다.……다이나믹하면서도 그리스도론적이다(p.248~9).” “북한 동포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인간이라는 개방된 객관성에서 공감대를 넓히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갖고 겸허한 마음으로 인간 구원, 인간 회복의 차원에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여 투쟁보다 민족화해로 민족의 동질성을 찾는 통일정책을 세워야 한다.……더 나아가 장공의 인간화 운동은……복지사회를 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뤄지는 민주한국 건설을 위한 민주화 운동의 신학으로 이어진다(p.254).”

“장공의 민주화 운동은 민족과 교회의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명해 볼 때 더욱 절실해 진다.……전 인류 구원 경륜을 위한 선민 이스라엘이 편협한 배타주의로 예수를 배척함으로 진리의 등대가 예수 이후 이방 민족으로 옮겨 가게 된 유대민족의 실패를 거울삼아……8.15와 6.25, 4.19가 지니는 하나님의 심판과 사죄의 은총을 깊이 헤아리고……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민족의 화해와 교회의 각성, 역사에 책임 있는 참여를 (장공)은 촉구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장공의 교회 갱신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장공은 한국의 개혁교회가 “다시 고정적이고 관습적인 낡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됐고, 그래서 이제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소개하는 타락한 교회상에 대한 장공의 묘사는 신랄하다. “대량 생산적인 교인, 제조공장의 교회상, 판매시장 확장이랄 수 있는 선교 형태, 세일즈맨으로서의 설교자, 고층건물 자랑인 귀족화된 교회모습, 막대한 예산과 그것을 능가하는 다액 납세운동, 교역자들의 고액봉급, 교인들 중에 백만장자, 고급 관공리, VIP의 많음을 영광으로 아는 귀족화된 교회에 지게꾼, 빈자, 나그네, 여성, 탄압받는 젊은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p.260).”

장공은 “제3일”에서 “생활 신앙인”, “생활 종교”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말씀은 동참 행동이요, 사건인데 교회 현실은 무사주의와 현실을 혼동하여 健德이란 미명하에 불의와 악행에 비굴한 미소를 파는……죽은 믿음으로……침묵의 불신앙으로” 깊이 빠져버린 것을 통탄하셨다. 그리고 이른 교회들을“풍선을 탄 교회”라고 풍자하시면서, 교회는 “역사를 향하여”, “역사 속에서”안이한 행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친교(Fellowship of His Suffering)로서 불기둥 구름기둥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고 외쳤다. 나는 지금도 조용하지만 날카롭고 무서운 그 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1호] 2010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