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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1호] 추모예배 추도사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 오재식 원장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07:49
조회
761

[제11호] 추모예배 추도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오재식 원장
(아시아교육연구원 / 전 월드비전 회장)

제가 김재준 목사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49년입니다. 서울 안동교회에서 경기중학 성화회가 강연회를 열었는데 강사님이 김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는 중앙중학 4학년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강연 제목은 스펭글라의 ‘서양의 몰락’이었습니다. 중학생인 저에게 그 제목은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 제목을 풀어서 우리 어린 마음에 새 꿈을 심어주신 것이 김 목사님의 해설이었습니다. 그때 이래 목사님은 제 삶의 선도자이셨고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요, 신앙생활의 구름기둥이셨습니다.

저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주일학교 훈련을 받고 월남해서는 함석헌 선생님의 YMCA강의에 빠졌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김형석 선생님의 인도로 기독학생운동을 시작했었는데, 마침내 강원용 목사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 것입니다. 53년 피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저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김재준 목사님이 담임하셨던 경동교회에서 김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주일학교 교사로서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상철 목사님이 주일학교 교장님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원용, 이상철 두 목사님 뒤에 계시는 김재준 목사님을 뵙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님의 후배들이 만든 선린회의 활동이 제가 속했던 학생연수원인 신생숙에 까지 손을 뻗어서 조향록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학생운동의 선배이신 김정문 선생을 중심으로 기독교사상연구회가 매주일 오후에 모였는데 김 목사님은 자주 나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970년《제3일》을 창간하실 때에 그 준비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제3일 아침의 놀라움과 감동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제1일과 제2일의 고통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의 그 말씀은 1974년 해외에서 제3일을 속간하실 때의 감동으로 이어졌고, 아직도 제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1971년 초 일본에서 해외근무를 시작했고, 김 목사님은 1974년 캐나다의 이상철 목사님에게로 이주하신 후 10년을 돌아오지 못한 채 해외생활을 했습니다. 그 동안 김 목사님은 한국의 기독교 동지들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해외활동에 늘 앞장을 서 주셨습니다. 이미 칠순의 고령임에도 세계 각지에서 모였던 동지들의 모임에 참가하시고, 끝이 보이지 않던 군부와의 싸움에 피곤을 느끼는 저희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이 집중하셨던 한신대의 교육과정에 참가하지 못했고 또 교단들의 정치판도에서도 외각에서 맴돌았습니다. 따라서 김 목사님의 학문적 지혜를 조직적으로 전수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교회와 교단정치의 와중에서 겪으신 김 목사님의 고통을 더듬기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연들로 해서 김 목사님 곁에 있을 수 있었고, 또 제 삶의 어르신이고 스승으로 모시는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김 목사님의 따님 김혜원 씨와 저의 아내 노옥신은 주일학교 친구요 대학교의 동창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1977년 해외생활에 지치신 김 목사님께서 그렇게 가고 싶어 하셨던 서울까지는 못 가시고 일본의 저희 집에 오셔서 3주간을 지내셨습니다. 저희들은 모처럼 시간의 여유를 가지신 김 목사님으로부터 살아오신 발자취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유교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신 것, 송창근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시던 일, 한경직 목사님과의 우정으로 해방 후에 을지로 중심으로 각각 교회를 세우시던 일,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끌려들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동경까지 와서 가족이 있는 서울에는 못 가시던 외로움, 학문하시는 목사님이 서재를 떠나서 떠돌기 3년, 민주화운동의 많은 국내 동지들이 겪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 매일같이 붓으로 한지 위를 거닐던 목사님의 기도하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수줍어하시는 그 얼굴이, 말씀하실 때에도 눈을 내리뜨시는 겸손이,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스승의 걸음이었습니다. 학식과 경험과 지혜를 그리고 내공이 쌓인 고집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부드러움을 김 목사님은 잘 관리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기를 비울 수 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였습니다. 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비움의 카라스마였습니다. 그것은 시대의 울부짖음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겸손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 앞에서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하는 용기였습니다. 열린 마음으로‘예’와‘아니오’를 가릴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반대운동부터 김재준 목사님은 시민들의 외침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69년의 3선개헌반대운동, 71년의 공명선거와 민주수호국민운동 그리고 73년의 반유신시국선언 등으로 이어지는 군부통치반대운동에 김 목사님이 몸을 던지신 것은 군부세력의 힘의 논리에 ‘아니오’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 앞에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겸손이었습니다. 학계의 수장들, 종교계의 좌장들, 그리고 김 목사님 주변에서 강성 카리스마로 큰소리치던 명성들도 서슬이 퍼런 권력 앞에서는 감히 ‘아니오’를 못하던 때에 김 목사님은 밑모를 비움의 두려움을 이기시고 ‘아니오’하고 나섰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1987년 박종철 사건으로 새해의 문을 여시고 가벼운 걸음으로 새 길을 떠나셨습니다. 김 목사님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그 해 말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바람으로 퍼져나가서 거리마다 ‘아니오’의 물결로 흘렀습니다. 함석헌 선생님과 나란히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신앙지성인의 자세를 세워서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여시어 행진에 참가하지 못하는 줄밖의 사람들을 포용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어떤 일에 대해서 입장을 정하는 것이 이념적 독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입장을 정할 때에는 각자의 삶의 시간과도 연계되는 것이어서 서로간의 결정의 시차를 인정하자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현장에서 운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에게는 김 목사님의 열린 마음이 미지근한 것 같았었는데, 운동의 진행과정을 돌이켜보면 그런 포용력이 있어서 오히려 운동의 폭이 넓어지고 또 전략적 대응의 융통성도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한신에 몸을 담았었지만 김 목사님은 한신에다 가둘 수 없는 자유하는 지성인이셨습니다. 김 목사님의 성서 바로읽기의 고집으로 새로운 교단이 생겨났습니다마는, 그것이 다시 교권주의의 유혹에서 허덕이는 오늘의 모습을 보시면 김 목사님은 또다시 ‘아니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살아보세’로 민주주의를 매도했던 군인들 앞에서 ‘아니오’라고 외쳤던 김 목사님이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지는 ‘선진화 민주주의’를 보시면 주님 앞에 엎드리고 ‘저들의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70년대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던 개발경제의 환상이 다시 우리들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국론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민주주의의 주체와 절차를 접으려는 발상이 정치풍토를 포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교권확장의 유혹에 빠져서 예언자의 자세를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성인들은 각각 제 길을 찾아 흩어졌고 그들을 광장에 모을 시대적 영감이 없습니다.

김재준 목사님, 우리가 다 40년 전에 겪었던 일인데 힘 있는 사람들의 독선과 교만이 합리주의의 탈을 쓰고 다시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 이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저희들을 위해 기도드려 주십시오. 당신의 그 조용한 미소로 우리를 선동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비움의 카리스마로 우리를 채찍질 하시어 우리도 모든 특권을 버리고 당신께서 그랬던 것처럼 알몸으로 예수님 앞에 서게 하십시오.

김재준 목사님, 당신을 기리며 모여 앉은 우리 가슴을 당신의 삶의 발자취에 감동으로 충동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겸손과 기도가 이 수유리에서 다시 한번 퍼져나가게 해주십시오.

(2010년 1월 25일 장공 김재준 목사 23주기 추모예배 추모사)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1호] 2010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