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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2호] 권두언 - “꿈을 품게 한 장공과의 만남”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08:35
조회
529

[제12호] 권두언

“꿈을 품게 한 장공과의 만남”

조원길 목사
(본회 이사장 / 남성교회 원로목사)

일본의 정치학자요, 교육자인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박사가 종전 뒤 동경대학 총장으로 취임할 때 그의 취임사 중에 “모든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슬플 때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名人의 한 마디를 기억하고 결단하면 운명이 바뀐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 북해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시절 마침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개인 사설학원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우찌무라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때 우찌무라 박사는 어린 제자들에게 정직과 성실은 인생의 운명을 바꾼다고 가르쳤다. 어린 난바라는 우찌무라 스승의 이 한 마디를 평생 가슴 속에 새겼다.

내가 강구고등공민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나를 어릴 적부터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신 남주석 목사님(한신대 8회) 사택에 갔다가 우연히 한국신학대학 학보를 보았다. 거기에 쓰인 김재준 학장님의 글 “목적영감설과 축자영감설”에 대한 글을 읽고 그 글의 깊은 내용은 잘 몰라도 이 글 전체를 통하여 김재준 학장님의 인격이 내 마음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김재준 학장님이 계시는 부산 임시교사로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내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니 고맙네. 앞으로 나와 같이 공부할 날이 있겠지.” 간단한 내용의 답장이었다. 나는 사실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김재준 학장님 곁에서 무엇이든지 배우고자 열망이 있어 남주석 목사님과 의논을 했더니 한신대에 선과(選科)가 있기는 한데 입학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하시기에 나는 바로 그해 겨울 부산 서구 남부민동 임시교사로 찾아갔다.

아침 해가 뜨기 전 일찍이 사택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더니 학장님께서 외투만 입으시고 문을 열어 나를 맞아주셨다. “제가 조원길입니다”하고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학장님께서 “자네는 아직 어리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내가 본과(本科)에 입학시켜 주겠네”하셨다. 나는 이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3년을 하루같이 처절한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김재준 학장님의 말씀 한마디만 기억하고 살았다. “쾌락한 근면은 뽕잎을 비단으로 바꾼다”는 속담이 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꿈같이 지나고, 1956년 꿈에 그리던 한신대 본과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험지를 받아보니 내 실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며칠 후 면접시간이 다가왔다. 교수들이 나의 성적을 보고는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이때 김재준 학장님이 몇몇 교수들에게 귓속말을 하시더니 나보고 수고했으니 나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합격하였다. 그 후에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학장님을 언제부터 알았느냐고 하기에 이제까지의 사연을 다 이야기했더니 자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합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분이 바로 당시 교무과장인 김정준 교수님이었다. 나는 김재준 학장님의 말 한마디와 김정준 교수님의 은총 신학을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산다.

나는 한때 총회 추천으로 한국찬송가공회 위원으로 활동한 일이 있다. 이때 각 교단대표들 사이에 김재준 목사가 작사한 <어둔 밤 마음에 잠겨>에 하나님이란 단어가 없다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여 그 후에 나는 4절을 내 스스로 작사하여 우리 교회에서 국가기념주일과 매주일 예배를 폐회할 때 <어둔 밤 마음에 감겨> 찬송을 부르면서 나간다. “푸른 강산 우리조국 하나님 지켜주시는 나라, 새벽마다 저녁마다 부르짖는 기도소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 반석 위에 섰네, 조국을 사랑하는 자여 영원한 파수꾼이어라.”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는 내가 사단법인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직분을 맡은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 믿고 남은 삶을 온 힘을 다해 성실히 봉사하기로 작정한다.

위 사진은 필자가 한국동란(1952년) 시기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 뵙기 위해 찾아간 부산 남부민동 한국신학대학 김재준 학장님의 임시 사택이다(필자 뒤 1층 건물).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문을 여시며 필자를 맞아 주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사진촬영 - 2003년).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2호] 2011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