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長空 회보

[회보 제13호] 강연 - “정치ㆍ경제의 변환기 속에 기독교인의 역할” / 함세웅 신부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1:04
조회
805

[제13호] 강연회 - 제14회 장공기념강연회

“정치경제의 변환기 속에 기독교인의 역할”
- 김재준 목사님을 기리며 -

함세웅 신부
(청구성당 주임사제)

1. 기억과 성찰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사상과 정신, 신앙과 삶을 기리며 이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뜻을 같이하며 저도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의 삶을 문익환 목사님 등 그 후계자들을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우리 시대에 김재준 목사님과 같은 용기 있는 증언자, 선구자를 새삼 갈구합니다. 오늘날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은 일그러진 교직자들의 삶을 대면하면 짜증스럽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 더욱 김재준 목사님을 기리게 됩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삶과 신앙을 저는 이 자리에서 많은 목사님들과 신자들 그리고 한신대학교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이 기회에 한신대학교의 목사님들과 모든 구성원들이 김재준 목사님의 정신을 과연 제대로 잘 이어받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또한 김재준 목사님의 삶을 기리며 개신교와 가톨릭이 새롭게 만나 함께 성찰하는 기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 한평생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하여 늘 하느님 안에서 고민하시고 성찰하셨듯이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가톨릭 사제로서 제 신원과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톨릭의 체제와 제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로서 가톨릭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가톨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1974년 지학순 주교님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역사현장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정의로운 청년학생들과 억울한 형제자매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사님들을 만나 시대를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고 하느님 안에서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은총의 귀중한 체험이었습니다. 기독교회관 이 자리가 바로 일치와 연대, 투신과 현장체험의 그 자리입니다. 이에 저는 오늘 김재준 목사님의 삶을 길잡이로 제 자신과 가톨릭공동체의 삶을 되돌아보며 오늘의 한국현실, 특히 정치․경제의 변환기 속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생각은 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김재준 목사님의 말씀과 같이 조개껍질을 깨고 역사현장에 나서는 회개와 투신의 삶이기도 합니다.

2.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실천적 교훈-연민, 연대, 실천

11월 3일 오늘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82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광주중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을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데서 발단한 이 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에 전국에서 200여 학교 6만여 명이 참가하여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투쟁을 펼쳤습니다. 이로 인해 582명이 퇴학, 2,330명이 무기정학 그리고 1,642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에 신간회는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이 운동을 지원하다가 간부 전원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이날을 학생의 날로 정해 기념해오던 중 1961년 박정희 5․16군사반란 후 유신독재시기에 이를 폐지하고 2006년 9월에 학생독립운동일로 다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새삼 군사독재정권의 반민족, 반민주적 역사관을 확인하는 구체적 사례입니다.

오늘 우리는 끈끈한 민족의식과 연대의식을 되새기며 이웃과 동고동락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깨닫고 누가복음 10장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실천적 교훈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묵상합니다. 강도에게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은 누구이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성전으로 향한 사제와 레위인은 바로 현실의 아픔과 불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과 주님' 만을 크게 부르는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교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모두 여전히 예수님께서 무섭게 꾸짖으신 당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마태복음 15:7-9, 이사야 29:13)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21)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후 최후의 심판 비유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의 핵심적 기준이 바로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 대한 사랑과 구체적 실천임을 분명히 듣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 정치, 경제 등 구체적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뿌연 관념의 미래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의에 저항한 청년학생들의 열정과 투쟁, 그리고 뜻있는 노동자, 농민들의 항쟁, 무엇보다도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적 결단 속에서 복음의 가르침과 힘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복음의 이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항일 독립투쟁사에서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운동 나아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통일운동과 염원 속에서 확인합니다. 성경은 완결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도 여전히 하느님께서 백성들과 역사현장 속에 개입하시고 말씀하시는 현재의 이야기 그리고 미래의 길잡이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여전히 불의에 저항하며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민초들의 삶 속에 계속 현존하시며 이끄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 역사와 현실 속에서만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성경은 한낱 문자일 뿐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예수님과 같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생(降生)과 육화, 비움과 낮춤(kenosis) 그리고 갈바리아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그 예범입니다. 강생과 비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새 생명의 부활, 영광의 미래가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핵심을 잊고 있거나 때로는 놓치고 있습니다.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교훈은 바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이 나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민족의 고통과 아픔, 아니,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과 아픔, 하느님의 고통과 아픔임을 깨닫고 나아가 실천을 통해서만 구원과 부활이 가능하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핵심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와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김재준 목사님의 확신과 신념 그리고 믿음과 맥을 같이하는 가르침입니다.

3. 관료체제의 교계제도를 넘어선 신앙과 은총

1990년대 중반 서울 장위동 성당에서 사목 봉사 할 때 한 신자 부인이 제게 들려준 그 남편의 말이 지금도 계속 제 귓전을 때리고 있습니다. 부부 중 한 사람만이 신자인 경우에 가톨릭에서는 '외짝교우'라고 부릅니다. 외짝교우의 경우 비신자 배우자들을 위해서는 특별단축교리를 통해 속성으로 세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일종의 특혜인 셈입니다. 저는 외짝교우인 그 부인에게 남편이 이번 기회에 성당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 부인은 저를 찾아와 매우 죄송하다고 하면서 머뭇머뭇 하길래, 제가 "괜찮습니다. 무슨 내용이든 편안히 말씀하세요." 하고 안심시키며 재촉하니 마지못해 다음과 같이 남편의 말을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 제 남편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더니, 제 남편은 시큰둥하게 '신부는 그저 바티칸의 공무원일 뿐이야. 내가 왜 바티칸 공무원을 찾아가! 당신이야 태중교우이니 혼자 성당에 잘 다녀요'"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힘들게 전한 그 부인은 거듭 제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부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개성이 아주 강한 분이시네요. 때가 되면 오시겠지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시고 한번 찾아가 뵙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분의 말이 지금까지 제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곰곰이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내가 한낱 바티칸의 공무원이라고! 나는 스스로 하느님과 이웃, 공동체를 위하여 한 삶을 온전히 바친 전적 봉헌의 사제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나 자신의 봉헌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그분의 말을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저는 그분의 말을 가끔 떠올리며 그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바티칸의 관료체제 그리고 교구행정의 일방적 권력체제를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에 기초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생활을 통해 교구행정 책임자인 교구장 주교와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또 제가 바티칸 체제를 성서와 신학적으로 비판하면서 그 외짝교우 남편의 말이 엄연한 사실임을 실감 있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 하느님께 봉헌한 사제이지만 적어도 현실에서, 그리고 이 체제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교구의 한 구성원 그리고 바티칸의 한 말단 공무원으로서 인식될 수밖에 없구나 하며, 그의 지적을 이렇게 겸허하게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늘 새로운 모습으로 응시하고 묵상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새삼 교회공동체의 양면성, '은총과 제도'의 긴장과 마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갈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곤 합니다. 은총의 교회가 우선하면 그 교회공동체는 하느님 앞에 늘 신선하고, 만일 제도적 권력의 교회가 우선하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때묻고 타락하게 마련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늘 되새깁니다. 나아가 교회는 '정결한 창녀'(casta meretrix) 또는 '거룩한 죄녀'(sancta peccatrix)라는 교회론의 표어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 명제 안에 담긴 교회구조의 이중성을 근원적으로 생각하며 거짓교회론, 그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의 이 표어는 넓은 의미에서 복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는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합의된 용어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날 이 표어의 역기능 곧 예수님의 뜻을 교회가 역사를 통해 묘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성성을 이미 선언하셨습니다(마태복음 21:31-32). 그리고 예수님은 오히려 위선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복음 곳곳에서 분명하게 단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세리와 창녀는 이미 죄인이 아니고 구원을 보증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을 보증하고 확인한 그 창녀를 다시 죄녀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2000여 년 동안 교회의 이름으로 저지른 모든 범죄를 오히려 정당화하며 교묘한 술책으로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는 '정결한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위선자 바리사이' 그리고 '사기꾼 사두가이'라고 불러야 하느님과 역사 앞에 더욱 진실하고 정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스스로 '정결한 창녀'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정화되었다고 전제한 교묘한 언어의 유희이며 고차원의 속임수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죄녀'라고 고백하기보다 우리는 모두 위선자, 속이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훨씬 더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무섭게 꾸짖으셨던 당대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바로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의 사제들과 개신교의 목사들이라는 고백과 인식을 통해서만 우리 교회는 정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과 목사들이 먼저 심장을 찢고 뉘우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초지일관(初志一貫) 십자가의 길

김재준 목사님과 송창근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세 분이 함께 미국에서 공부도 하시고 매우 절친한 동료로서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동지처럼 살아오셨습니다. 이 세 분의 삶은 개신교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징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 분 모두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셨지만 그 과정과 생의 마감은 대조적으로 다르게 전개됩니다.

세 분 모두 나라를 빼앗긴 일제치하에서 동족의 아픔과 함께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민하며 사셨던 신앙의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6․25동족상잔의 과정에서 송창근 목사님은 북한군들에게 납치되어 돌아가셨습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상처, 슬픔과 죽음, 그 희생제물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64년과 65년 한일협정반대까지는 다소 갈등이 있었을지라도 그래도 김재준 목사님과 함께 하셨던 신앙적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뒤에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신군부시절에 권력 앞에 무릎 꿇은 부끄러운 삶을 사셨고 자신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싸우시다가 캐나다로 이민 가셔서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더욱 애쓰시다가 1983년에 귀국하시어 한결같이 민족문제를 고민하시며 실천적 교회상 정립을 위해 몸 바치셨습니다. 1987년 1월 27일 박종철 국민 추도회 발기인으로 함께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세 분의 삶을 통해 한반도의 현주소, 한국 개신교의 다양한 예범적 오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친미 수구 반공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송창근 목사님을 기릴 때마다 우리는 오히려 6․25동족상잔의 아픔을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바치셨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3:34)라는 사랑과 용서의 기도를 바로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고백하고 송창근 목사님을 기리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저는 1985년 3월 종로 YMCA 회의실에서 한국가톨릭 200주년, 개신교 100주년을 맞아 숭전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한국기독교의 존재이유"라는 주제 심포지엄에 참여하여 김재준 목사님의 강연을 듣고 '교회주의'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민족공동체의 아름다운 의미를 확인한 바 있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일치를 위한 모색과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도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심포지엄을 준비하는 과정 중 사석에서 노명식 교수님은 자신이 청년시절 YMCA 모임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받았다는 회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경직 목사님이 그 후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정권 시대에 야합한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분노와 함께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지칭한 '여우'가 떠오른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2). 저는 노명식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개신교권에서 이렇게 직언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구나 하며 매우 놀랐고 이러한 비판적 견해를 지닌 신도가 존재하는 한 개신교에는 큰 희망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안에서 이러한 비판의식을 지닌 지성인을 만나기란 별로 쉽지 않습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께서 캐나다로 이민가신 이유를 막연하게 짐작만 할 뿐 왜 꼭 이민을 가셔야 했는지 그 구체적 이유는 잘 모릅니다. 다만 만일 그때 김재준 목사님께서 캐나다로 이민가지 않으시고 국내에 계셨더라면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전혀 다르게 진전되지 않았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어쨌든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 개신교를 풍요롭게 하신 주역임을 생각하며 모범적 목회자, 예수님의 성실한 제자임을 확인합니다.

5. 거룩한 곳에 서 있는 황폐의 상징, 흉측한 우상

우리 주변에는 예배당이 매우 많습니다. 돌아가신 안병무 교수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안 교수님은 한 대화모임에서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면서 하루는 한 친구를 마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이제는 나이가 들었으니 이 친구를 입교시켜야 하겠다는 좋은 뜻에서 "자네나 나나 이제 다 나이 들었는데 지금쯤은 예수님을 믿을 때가 되지 않았나? 친구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네에게 진심으로 권하네"하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분이 "나 솔직히 말해도 되나?" 하길래 "물론이지" 하니까 그 친구 얘기가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인데,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저녁의 서울 거리를 보면 온통 예배당의 빨간등 십자가가 보이는데 나는 그 십자가를 보면 소름이 끼치네!" 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안 교수님은 매우 놀라셨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시고 개신교의 현주소를 새롭게 더 깊이 생각하시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안 교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 사제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전하면서 십자가의 핵심이 우리로 인해 변질되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함을 되새기곤 합니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오늘의 한국교회는 안병무 교수님의 친구 분께서 지적하셨던 소름끼치는 그 현장은 아닐까라는 성찰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저와 동료사제들은 세 차례나 서울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 교회와 시대를 고민하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사목적 방법을 모색했는데 결과는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망함을 느끼면서 "왜 우리는 이런 시대에 하필 이러한 교구장과 함께 지내야 하는가?"라는 한탄과 함께 시편작가의 아픔을 실감하며 하늘을 향해 절절한 탄원의 기도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바로 이문영 교수님이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으실 때 법정에서 크게 외친 성경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들으라."(마태복음 24:15)

거룩한 곳에 서 있는 황폐의 상징인 우상, 그 우상이 그 당시에는 바로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였습니다. 법관과 검찰은 바로 그 우상의 시녀들입니다. 이 교수님은 꼭두각시 재판을 넘어 하느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 우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신앙인의 맑은 눈,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의 칼바르트는 바티칸체제와 교황을 지목하여 묵시록에 언급된 멸망한 바빌론과 연계하여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문득 가톨릭의 관료체제와 권력행정가인 교구장의 모습에서 흉측한 우상의 모습을 확인하곤 합니다. 그것은 또한 제 자신 안에 내재된 죄의 뿌리, 죄성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 점을 겸허하게 고백하셨습니다(로마서 7:19 이하). 개신교의 그 숱한 이른바 대형교회의 수구반공 상업적 목사님들의 열광적이며 때로는 만담적 설교의 모습 속에서도 문득 죄성과 우상의 요소들을 확인합니다. 우상을 식별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목회자와 사목자로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저는 엘리야 예언자의 열정을 떠올리며 묵상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던 엘리야 예언자,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제벨과 맞서 나서고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과 맞서 홀로 싸웠던 예언자, 그 예언자가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 현실에 꼭 계셔야 합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을 기리며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기를 다짐하며 신학생 시절에 배워 익혔던 그리스도인의 자세, 특히 사제의 종말론적 자세와 기도를 늘 되뇌이고 있습니다. 시 구절 같은 영문을 그대로 소개해 드립니다. 목사님들은 미사를 예배로 읽으시면 됩니다.

Priest of God, (하느님의 사제여)
Celebrate this Mass (이 미사를 네가 바쳤던)
As if it were your first Mass (그 첫 미사의 정성으로)
Your last Mass, (너의 마지막 미사,)
Your only Mass. (네 생애의 단 한 번의 미사로 생각하며 봉헌하라)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자세, 그것은 어떤 일에 임하든지 그것이 그 자신 생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그리고 단 한 번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 공동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6. 민주공화국의 분배정의, 성경에 기초한 공유와 나눔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조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조문이 있어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등 역대 독재자들은 전혀 헌법을 따르지 않고 심지어는 헌법의 기본정신을 외면한 채 악의 정치, 탐욕의 정치를 펼쳐왔습니다.

또한 헌법 제119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1항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시장 경제체제 곧 개인과 기업의 사유권 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항은 어떤 의미에서 1항에서 보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개인과 기업의 권리를 공동선의 원리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경제민주화와 분배정의의 원리입니다. 1항의 자유시장 원리와 개인의 사유권은 2항에 의해 공동선에 기초하여 균형 있게 제한될 수 있습니다. 1항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 그 권리가 우선한다는 보조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2항에서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공동선과 공익을 위해서 개인의 권리와 기업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고 유보될 수 있다는 연대성의 원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두 항목은 갈등과 긴장관계에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선익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상호보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실체의 양면과 같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함께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헌법에 명문화된 법조문이 그동안에는 남북분단의 상황과 개발독재와 재벌기업 중심의 반민중적 정책 때문에 사실상 사문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최근 뜻있는 학자들과 법조인들이 이 조항의 제정취지와 배경을 잘 깨닫고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나누어야 하는 창조적 가치를 새롭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산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 농성 200일째 되는 지난 7월 24일 한진중공업 현장 길가에서 열린 제1차 희망시국회의에 참석하여 이렇게 뒤늦게 찾아온 점에 대해 속죄의 기도를 올린 바 있습니다. 이날 이석태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너무 부끄럽다고 고백하면서 바로 헌법 제119조 2항의 깊은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순간 이렇게 기막힌 선언이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왜 우리가 이러한 내용을 이제까지 전혀 몰랐을까 반성하면서 이 조항이 바로 성서의 핵심사항이며 그리스도교의 분명한 가르침임을 깨달았습니다. 헌법 제119조 2항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자비, 정의와 평화, 나눔과 분배, 친교와 일치, 무엇보다도 사도시대 초기에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공유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사도행전 2:44-45)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행전 4:32)

사도들의 이러한 삶에 기초한 철저한 가난과 나눔의 삶은 수도원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무엇보다도 개인과 사유권의 보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사이 우리가 일컫고 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도 사실 개인과 이기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길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위타적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화신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기심과 사익보다는 공동선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나눔과 분배정의 실천이 개인을 정화하고 사회공동체에 새로운 힘과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성령의 작용이며 부활의 원동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수덕과 영성의 첫 과정은 절제와 극기로 모든 탐욕과 소유욕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수덕과 영성적 관점에서 헌법 제119조 2항을 연계하며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여주고 황금만능과 경제 제일주의에 예속된 일그러진 현실문화와 시장경제체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실 헌법 제119조 2항은 바로 십일조의 정신과 상통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7. 십일조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철저한 삶

우리는 십일조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한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각기 자기 몫의 땅을 소유했지만 사제가문의 레위 지파만은 몫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한 지파가 각기 봉헌한 수확의 일정량으로 레위 지파를 연명케 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연대적 나눔을 실천한 모범이요, 교훈입니다. 레위 지파는 오로지 장막과 약속의 궤를 정성껏 모시고 후기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특수 임무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대적 삶, 나눔의 중요성, 계약과 약속에 대한 충실성과 정의실천이 그 어떤 재물이나 소유보다 우선한다는 교훈과 가치를 확인합니다. 자기의 몫을 반드시 희생하고 바쳐야 할 가치체계, 연대적 인간관계가 엄존하고 있음을 성서는 강조합니다. 십일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신명기 14:22, 15:1-18)은 바로 이러한 연대성의 중요성과 가치관을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욕심에 제동을 거는 하느님의 장치이며 공동체의 약속 규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없는 소유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또한 나름대로 정당한 자신의 몫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소유더라도 그 몫 중의 1/10은 반드시 이웃, 곧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십일조의 근본정신입니다. 사실 사람의 소유욕은 끝이 없고 지구와 세상의 재물은 한정되어 있으며 사람의 수는 늘 증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소유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전쟁과 싸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인간 소유욕에 대한 하늘의 제동장치요, 사랑과 믿음을 기초로 한 공동체의 약속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는 바로 이러한 나눔과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연대적 희생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생활의 연대 규범인 십일조의 이 근본정신을 퇴색시키고 십일조가 한낱 종교적 의식과 의무 그리고 과장된 헌금의 방법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공동체는 오히려 부패되고 사이비 종교단체이며 위선의 대명사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습니다. 사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을 퇴색시키고 왜곡시킨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고여 있는 물과도 같아, 필연적으로 썩게 됩니다.

분배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는 무서운 병을 앓게 마련입니다. 그 사회 그 공동체는 암과 같은 큰 병을 지닐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황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다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7:24)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삶을 다음 복음말씀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마태복음 18:6-9)

이 말씀 앞에서 이탈리아의 한 성서학자는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모두 거짓말쟁이며 위선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주일에 예배당과 성당을 찾아오지만, 그 가운데 과연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모두 죄를 짓고 살면서도 우리는 그 누구도 손이나 발을 자르거나 눈을 빼어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이 성서말씀을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고백했을 뿐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적당한 신앙인들이 아니겠습니까? 과장어법의 성서말씀이며 해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적어도 자기 자신이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내려야하는데 우리는 모두 결국 짝퉁 신앙인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10월 23일 주일미사 제1독서는 마침 출애굽기 22장 20절 이하의 약자보호법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 …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약자 편에 계십니다. 약자의 벗, 약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한국현실에서 우리는 많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특히 동족인 중국국적의 조선족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당에서 일터에서 궂은일을 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조선족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말하며 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한때 일본, 쿠바, 하와이, 미국, 중국 땅, 러시아 땅 등 외국에서 힘든 일을 하며 고생하고 무시당했었습니다. 아름다운 인간애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약자보호법은 철저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금융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에게 돈을 꿔주었어도 채권자 행세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 더구나 이자를 받지 말라는 이 명령은 사회정의의 기초이며 아름다운 인간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적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딸, 한 가족, 한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간에 채권채무가 없듯이 이자를 주고받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물론 성서가 지향한 이상적 공동체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우리 사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돈의 노예, 돈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온갖 금융거래, 은행, 이자율정책 등에 근본적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상적 관계는 단순히 주고받는 사랑과 도움의 관계여야지, 이득을 크게 챙기고 더구나 이자를 받는 금융거래는 오늘의 성서가 엄하게 꾸짖고 있음을 우리는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늘 부족하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근원적 자세를 묵상하고 다짐합니다.

8. 탐욕의 악마와 거짓언론에 대한 거부

인권회복과 민주주의 실현 그리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동지들과 함께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저는 약속의 땅을 향한 40여 년의 히브리 백성들의 여정과 연계하여 묵상하곤 합니다.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은 그 백성들이 왜 그렇게 하느님을 배반하며 어리석은 삶을 살았는가라는 큰 의문과 함께 특히 아론과 그 동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겼다는 대목(출애굽기 32:1 이하)에 대해 저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체험한 그들이 그렇게 어리석을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금송아지 이야기가 결코 과거 이야기가 아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묵상합니다. 유다인들이 금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는 유다인들과 함께 우리 후대들을 위한 구체적 교훈입니다. 사람들이 결국 금송아지 앞에서 숭배할텐데 그 때가 바로 심판의 날, 종말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으로도 저는 이해합니다. 온 세상이 온통 금융사업에 매몰되어 마비되고 교회공동체마저도 경제황금만능주의 앞에서 몸살을 앓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경제만능주의의 이 현실이 바로 금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는 우상예속시대임을 고백하며 새삼 회개의 핵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설화를 통해 악마가 거짓말로 인류의 조상을 유혹하여 하느님을 배반케 하고 죄를 범한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우리는 최초의 죄(the original sin)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 최초의 사기(the first fraud), 최초의 거짓말(the original lie)이 있습니다.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원죄의 영향아래 있듯이 이 세상은 사탄과 그 거짓 영향 하에 있습니다. 저는 사탄의 그 거짓말을 지난 40여 년 동안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그리고 KBS 등 관영방송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의 왜곡과 거짓말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그 행간 속에서 저는 어느 날 사탄의 선명한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어렴풋하게 듣고 알고 배웠던 사탄과 악마의 실체를 저는 조선일보의 거짓과 왜곡 보도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사탄과 악마의 거짓말에 맞서 싸우고 그 거짓과 불의를 퇴치해야 합니다. 사탄은 그 존재자체로 사람을 악으로 유혹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악령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악귀를 쫓으셨습니다. 구원과 치유의 일차적 행업이 바로 악령을 쫓아내고 거짓과 죄성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어느 독일 철학자의 말과 같이 신선한 음식이 사람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듯 사실 사람의 건강한 정신함양과 지적 성장을 위해서는 진실한 정보와 바른 소식이 필수적입니다. 상한 음식을 취하면 사람은 병들고 또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짓소식과 왜곡된 소식을 들으면 사람의 정신은 마비되며 그 내면에 손상을 입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조․중․동과 같은 거짓 언론으로 온통 모두 바른 식별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온 국민의 정신을 거짓과 왜곡으로 마비시키는 조․중․동 등 거짓언론과 그리고 KBS와 같은 거짓방송을 퇴치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이며 복음선포의 핵심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을 흐려놓고 마비시키는 거짓신문과 왜곡된 언론을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송두리째 뿌리 뽑는 일,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시대적 책무임을 깨닫고 함께 실천하기를 호소합니다.

9.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The Brockerless Regin of God)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생겨난 것은 결국 교회였다는 많은 신학자들의 성찰과 반성을 마음 속에 새기며 묵상합니다. 또한 1994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20주년 기념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미국 유태인 신학자 마크 엘리스(Mark Ellis)가 제시한 가톨릭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 대해 저는 깊이 생각하고 그 후 계속 그 지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말씀하셨는데 교회공동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브로커들이 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온통 브로커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교 공동체에서 배척당하여 죽으신 복음의 증언을, 그는 사제들이 진정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묵상할 것도 권했습니다. 그는 정의구현사제단 20주년의 삶이 인권회복과 민주화 투신을 통해 과연 얼마만큼 가톨릭교회 공동체를 깨우치고 정화했는가를 물어야 한다면서 오히려 쇄신되어야 할 가톨릭교회를 더욱 살찌게 함으로써 반성할 기회를 놓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교회 내부를 정화해야 한다면서 정의구현사제들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라면 오히려 사제들이 몸담고 있는 가톨릭을 비판하고 과감히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역설했습니다. 저희는 모두 놀랐습니다. 그 강연은 매우 근원적으로 사제들은 모름지기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철저히 추종해야하는 결단의 사람임을 분명하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492년 콜롬부스의 이른바 아메리카 대륙발견과 함께 이루어진 남미에서의 가톨릭 행업을 질타했습니다. 아메리카 발견이란 표현도 사실 이미 인디언들이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었는데, 이러한 표현자체가 서구 침략국의 사관일 뿐이라는 해방신학의 가르침을 우리는 함께 그 이전에 확인한 바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가톨릭이 남미에서 저지른 무자비한 살상과 비인간적 만행에 대해 가슴을 찢고 뉘우쳐야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자행한 유다인 등 많은 타민족에 대한 1942년의 학살 곧 홀로코스트에 대해 서구의 모든 그리스도교가 크게 뉘우쳐야 함도 역설했습니다. 교회론과 교회역사를 근원적으로 파헤치며, 지적하고 세계 그리스도인 모두의 회개를 일깨우는 근원적 고발이며 신선한 처방이었습니다.

10. 마무리-"2012 생명평화기독교행동" 그 대열에 함께 하며

지난 8월 30일에 향린교회에서 발족한 "2012 생명평화기독교행동" 창립출범식에 참석하여 저는 생동감과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제1부는 예배이기에 김상근 목사님은 제게 2시 30분까지 오면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2시 예배에 참석하고자 저는 조금 일찍 왔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은총의 시간, 은총의 체험이었습니다. 예배모임에서 큰 생동감과 힘을 얻고, 기도와 설교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특히 이 모임이 회개의 자리, 회개의 시간임을 강조한 점과 이른바 대형교회 목사님들에 대해 장사치 같다는 지적과 반성, 성전정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후려치시며 내쫓으신 사실, 무엇보다도 중세 가톨릭의 불의한 구조에 대해 신학적 이의를 제기했던 마르틴 루터의 행업,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저는 한 사제로서 한국 가톨릭의 부끄러운 현실에 대하여 깊이 반성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명동 개발 사안만 하더라도, 불의한 개발에 맞서서 향린교회는 상인, 주민, 노동자들과 함께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반면, 명동성당은 정부와 권력에 힘입어 아니, 그 불의한 권력과 야합하여 뒷거래를 통한 특혜로 불의한 개발의 대표적 상징으로 지탄받고 있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개발은 불의한 독재자, 미국 등 불의한 제국주의의 경제침략의 한 방법임이 분명하며 이미 1968년 메델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이를 공적으로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2011년 그것도 1970-80년대 민주화의 성지로 평가받았던 명동성당이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며 오직 외적 성장만을 지향하는 개발에 눈이 멀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그리고 갈바리아 언덕에서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도대체 뭐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하면서 속죄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2012 생명평화기독교행동”창립 출범예배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구체적 실천을 다짐했습니다. 특히 "생명의 빛, 평화의 향기를 온 누리에"라는 주제와 함께“예수님의 12제자운동에 함께 참여합시다”라는 초대와 호소를 눈여겨보았습니다.

12시에 기도하고, 12일에 1끼 금식하고,
12년에 투표하고,
12명에게 전파하자.

12숫자는 성서문학에서 완결의 숫자입니다. 이 호소를 읽고 들으면서 저는 이 체험과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를 그리고 교우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2012 생명평화기독교행동”이 개신교를 넘어 가톨릭과 온 겨레 공동체 그리고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뿌리내리도록 기도드렸습니다.

불의한 권력, 불의한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 권익을 위해 투쟁하고 힘을 모으고 노동자 농민 등 어려운 형제자매들을 돕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룩하고 나아가 4대강 불법사업을 타파하고 제주 강정마을의 바다를 지켜 자연과 생태계 보존을 위해 힘쓸 것도 다짐했습니다. 특히 부산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노동자의 염원을 더 크게 외치고, 강정마을에 사실상 미국 해군기지 건설을 꾀하고 있는 망국적 발상을 송두리째 뿌리뽑아 동양과 세계 평화 실현을 위해 다 함께 더욱 노력해야 할 책무를 되새겼습니다.

이 귀중한 체험을 저는 우리 사제들과 함께 나누며 모두 생명평화 운동의 구성원이 되도록 다짐했습니다. 생명과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이상과 목적 그리고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꼭 민주주의의 물줄기를 바로 세워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앞당겨, 아름다운 미래를 실현하도록 국민들과 함께 뜻을 모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위 글과 사진은 2011년 11월 3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14회 "장공기념강연회" 원고와 사진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3호] 201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