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長空 회보

[회보 제13호] 특별기고 - “長空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상” / 이기영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0:41
조회
767

[제13호] 특별기고

“長空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상”

이기영 목사
(전남노회 원로목사)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교회사에서 선교사들의 유산인 근본주의적 교리, 성서문자주의적 해석을 지양하고, 서구 기독교 국가주의를 배격해야 함을 직시하며 해방적이고 자유의 복음을 이 땅의 역사 속에 심고 실현하려는 개혁자적 의지를 가지셨던 분입니다. 그는 성육신적 신앙과 영성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허와 사랑, 청빈과 진리 순례자적 삶을 본보여 주신 스승님이셨고,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의 신앙적 성격은 예언자적이었고, 우리 민족의 살길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여기며 그 소신에 마지막까지 신실하셨던 분입니다.

내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 것은 1961년 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꼭 반세기, 50년 전 나는 20대 중반, 그 때 폐결핵 치료를 받고 요양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수유리 한신대에서는 복잡한 일이 생겨서 장공 선생님은 광주에 내려오셨는데, 백영흠 목사님(광주동부교회), 여성숙 의사(광주제중병원)의 안내로 심산계곡(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 군계지점 ‘가막골’(6․25전쟁 후 빨치산 본부였던 곳)에 요양원, 평심원(장공 선생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고 써주셨음)에 오셔서 한 주간 동안 지내셨던 때였습니다.

나의 신앙형성 순례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왔습니다. 처음 단계는 부흥회와 사경회 등에 열심히 참여하여 배우고 은혜 받은 신앙, 열심히 성경 읽고 확신하는 신앙양식이었습니다. 둘째는 은둔형의 신앙인들과 독서를 통해서 받은 내향적인 수도승 같은 영성 신앙으로, 청빈․겸비․진실․사랑 등의 중요 강령을 확인한 것으로 오늘까지도 이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셋째는 신학수업과 인격과정을 겪었는데,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만남, 지성적 계몽을 받으며 신학적 목회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르고 성실히 배워가며 목회의 길을 가리라고 다짐하며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무엇에, 발길에 치어서 고비를 넘나들며 고단한 목회여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바르고 정직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켜왔다고 여기며 자부하고 있습니다.

한신대의 교수님들이 모두 훌륭하셨고 당시 일급의 신학자들이셨고 배우고 영향 받은 바가 지대하다고 회상됩니다.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장공 선생님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의 글을 읽고 배우며 영향을 받게 해주신 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 장공 선생님은 <제3일>지를 창간하시던 때에 상단기간 편집과 보급판로를 마련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제3일>지는 <십자군>지와는 다른 의미와 성격으로 사회참여와 민주화 회복을 위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십자군>지는 당시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보수신앙과 교권주의자들의 무지와 시대착오적인 점을 지적 선도하며 교회에 계몽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장공 선생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계시로서의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한국교회가 민족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3일>지는 양심과 의를 위해서 고난과 억압, 역사참여, 민주화 회복을 위한 사명과, 진실한 투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둠의 현실에 묵시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외치신 희망의 말씀이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제3일>지가 창간되던 70년대 초, 장공 선생님에게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인 인간화와 사랑의 인간관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민주화인 사회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공 선생인의 사회참여 역사참여 신학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평화운동에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장공 선생님은 탈이념적인 자유를 기초로 해서 권력의 독재에 대해서는 남과 북,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 비판합니다. 장공 선생님은 공산주의의 무신론적 유물사관에 대하여 비판하고 그 독재와 실태를 비판합니다. 한국의 독재의 성격을 악마적 절대 권력으로 비판합니다. 민족통일의 문제에서, 우리가 남북간에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장공 선생님은 평화통일의 문제 역시 민주주의의 지평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를 희생한 민족통일이나 인간화되지 아니한 민족주의, 그리고 국민의 사회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통일을 지향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 물론 국제관계도 중요하겠지만 한미공조보다는 남북공조의 원칙을 회복하고 국제공조를 슬기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생원리에 근거한 평화공존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민족과 교회의 슬기와 예지가 모아지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70년대 초와 중반에, 나는 목요기도회에 줄곧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용기 있고 뜻있는 민주인사들이 감옥 드나드는 일과 가족들의 울부짖는 행보는 감동적이었고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하시는 성령역사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난한 지역의 천은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장공 선생님은 나의 담임목사 취임 때 설교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항상 감사하며 다시금 소중한 기쁨이 되곤 합니다. 나는 목포중앙교회(1985-1999)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때, 시편 27장 1-6절의 휘호를 위임기념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목회재임 기간 동안, 나는 이 말씀의 휘호를 당회장실에 걸어놓고 항상 귀한 보고로 보존해 오다가 최근에 長空기념사업회 유품전시관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휘호 유품은 여성숙 의사에게 써주신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결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휘호는 여성숙 의사가 내게 전해주셔서 보관하던 것인데 이번 기회에 함께 내놓게 되었습니다. 목포중앙교회는 목포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서 자연히 당시 민주화 운동의 대열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지금은 목포시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목포 민주화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미국에 나가 프린스톤 신학교 도서관에서 2년간을 보내며 청강을 하였고, 2001년부터는 뉴욕 주 롬(Rome)시 미국장로교회(PCUSA) 소속 교회에서 다문화가정목회를 하였습니다. 유티카 대학(Utica College of Syracuse University)에서 역사학(History)으로 졸업(B.A.)을 하였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간 객원으로 교회사를 공부하였습니다. 미국생활 12년여를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순탄치만은 않은 나그네 여정이었지만 은혜로 인도함 받았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난날 나의 생활을 장공 선생님께 아뢰기도 할 겸해서 한신 동문 제위께 인사도 드리며, 이 원고를 부탁 받고 쓰고 있습니다. 회고하면, 장공 선생님은 나를 수호하는 스승님으로 항상 함께 해 오셨던 분이라 회상하고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민족의 스승인 장공 선생님이 많은 한신인들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귀감이 되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인이 목포중앙교회(1985~1999) 부임 시, 김재준 목사님께서 시편 27장 1~6절의 휘호를 위임기념으로 써주신 글

 

김재준 목사님께서 여성숙 의사에게 써주신 글(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결실에 대한 말씀)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3호] 201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