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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3호] 권두언 - “학장 자리가 무엇인데, 한 교회만 평생 섬겨라” / 조원길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0:18
조회
732

[제13호] 권두언

“학장 자리가 무엇인데, 한 교회만 평생 섬겨라.”

조원길 목사
(본회 이사장 / 남성교회 원로목사)

칸트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이런 스승을 원한다. 제자에게 처음에는 판단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지혜를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참된 스승이다.”

나는 1958년 6월 7일에 제대했다. 복학을 하기 위해 수유리 학교로 왔다. 그러나 내 형편에 등록비는 너무나 벅찬 액수였다. 나는 학업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김재준 학장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나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학장실에 갔더니 학장님은 캐나다에 가시고 안 계셨다. 나오는 길에 복도 게시판을 보니 캐나다에 계시는 학장님의 주소가 게시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로나마 인사를 드린 후, 집으로 가려고 생각하고는 편지를 써 보냈다. 며칠 후에 서무과장 최등립 집사가 부르기에 갔더니 캐나다에 계시는 학장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내 월급을 계산해서 조 군의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대주고 모자라면 내가 나가서 책임질 테니 그를 잘 돌보아주라’라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나는 당시의 김재준 학장님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관용 장로님을 만날 때마다 그때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당황하는 마음이 앞선다. 나는 즉시 학장님께 고맙다는 인사편지를 드리고 계속해서 매 주일에 한 번씩 학교소식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내드렸다. 특히 경건회 때 설교자, 본문, 제목 등 간단한 내용을 항공엽서로 보내드렸다. 그 후 육 개월 만에 학장님이 귀국하셨다. 귀국하시는 날 수유리 교정 잔디밭에서 전 교수와 직원 그리고 학생 전원이 환영회를 가졌다. 환영회가 끝나자 갑자기 학장님이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시면서 ‘여기 조원길이 어디 있나?’ 하시면서 나를 부르셨다. 갑자기 긴장감이 돌았다. 내가 머뭇거리면서 앞으로 나갔더니 영어 원서 ‘Here I Stand’라는 마틴 루터의 책 한 권을 주시면서 “영어 공부 잘해”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내게 보내 준 편지 고맙네”라고 격려해 주셨다. 나는 이때 어릴 적 남주석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의 구절이 생각났다. 매 주일 한 번씩 항공엽서 한 장으로 학교소식을 학장님에게 전해 드린 결과가 이토록 큰 영광을 누리게 된 줄 몰랐다. 그 후에 내가 4학년이 되어 어쩌다가 학생회장이 되었는데 개교기념일에 내 손으로 직접 당시로써는 아주 귀했던 파커 만년필을 화신백화점에 가서 구했다. 그리고 학장님께 선물로 드렸는데 며칠 후 나를 부르시기에 학장실로 갔더니 이 만년필 어디서 샀느냐고 물으시면서 “자네가 가짜를 모르고 샀구나. 앞으로 무슨 일이든지 정확, 신속을 잊지 마라”고 하셨다. 나는 오늘날까지 목회하면서 학장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매사를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하는 목회철학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 후 학장님의 소개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영찬 목사님이 보내주시는 장학금으로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 문제도 해결되었다. 매달 월말이면 당시 이화여대 약대 교수로 계시는 한초덕 사모님에게 가서 장학금을 받아왔다. 이영찬 목사님은 안 계셔도 홀로 계시는 사모님께 대하여 지금도 은혜는 항상 잊지 않고 있다.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65년에 남성교회에 처음으로 목회하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전부터 잘 아는 C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그분은 당시 어느 대학교 이사장이신데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어려운 교회를 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와서 마침 자기 학교 학장 자리가 공석이니 이런 어려운 교회에서 고생하지 말고 학장 자리를 드릴 테니 가자고 청했다. 나는 너무나도 기뻐서 가장 먼저 김재준 목사님과 의논을 해야겠다 하고는 당시 한양대학교 병원에 계시는 학장님을 찾아가서 보고 겸 의논을 드렸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학장 자리가 뭔데 양들을 버리고 떠나려느냐. 조 목사는 평생 떠나지 말고 한 교회에서만 목회해라”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날까지 내가 섬기는 이 남성교회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김재준 목사님의 한마디 말씀이 이처럼 교회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섬기는 남성교회는 처음에는 너무나 건물이 초라했다. 그것도 전임자 이윤학 목사님이 이곳에 오셔서 고아원을 운영하시다가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이곳은 건축허가가 허락되지 않는 지역이라 닭장을 개조하여 건평 27평 정도에서 예배를 드렸다. 내가 1965년도에 이곳에 처음 올 때의 형편이었다. 그 후에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신축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던 중 마침 영락교회 이영옥 권사가 내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3일간 부흥회를 인도할 때 은혜를 받아 퇴직금 전액 약 천만 원을 헌금하여 현재의 교회 대지 약 500평을 구입했다. 이 일을 한경직 목사님이 아시고 우리교회에 오셔서 주일 낮 설교를 해주셨는데 이때 내가 김재준 목사님의 안부를 전했더니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기에 내가 주선하여 한경직 목사님이 계시는 남한산성에서 두 어른이 수십 년 만에 만나 하루 종일 산책하면서 지난날의 우정을 다시 나누신 일이 있었다.

최근에 내가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직분을 맡은 것도 나의 마지막 인생길에 반드시 그 어른의 은혜를 보답하고 오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어른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정확, 신속 그리고 오직 한 교회에서만 내 인생 끝날 때까지 섬기기로 다짐을 한다.


1959년 한국신학대학 학생회 임원 사진이다(앞줄 맨 오른쪽이 본인이다).


[당시 김재준 학장님과 한국신학대학 학생회 임원 중 왼쪽 본인, 가운데 홍영환, 오른쪽 김선회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3호] 201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