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長空 회보

[회보 제12호] 추모예배 설교 -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 김이곤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08:49
조회
1622

[제12호] 장공 24주기 추모예배 설교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시편 121:1~2, 사도행전 17:22~25)

김이곤 목사
(본회 이사 /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오늘 읽은 성서본문 중 구약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을 향해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만 온다.” 이 시구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예배에서 흔히 나타나는 交讀 또는 交唱형식의 예배 儀式文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교독문의 “신학적 의미”가 문제의 중심에 옵니다. 왜냐하면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그 물음에 대하여, ‘나의 도움은 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온다’라고” 응답하는 이 물음과 대답의 관계는, 분명, 인간 실존이 갖고 있는 궁극적이고도 종교적인 본질을 총 집약한 말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는 바로 이러한 물음, 즉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종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어느 신학대학의 한 교수님은 <과학과 신학>이라는 과목의 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매우 격앙된 어조로, 종교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물은 다음, 곧 이어서 그 교수님은 과학만이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무신론이야 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인간의 자기고백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을 향해 눈을 들고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그 물음에 대하여 그 교수님은 ‘나의 도움은 종교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으로부터 온다’라고 대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기독교 지식인들의 내면을 어느 정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의 어느 일간신문에서는 외형으로는 매우 대조되는 두 개의 기사가 나란히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7만 명 교인의 대형교회인 강남 소망교회의 전․현직 목사 계파 간의 내분사태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진보신학의 세계적 프론티어로 잘 알려진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폴 니터 교수를 초빙한 “종교 간 대화”를 주제로 한 토론회의 장면을 소개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에는, 이 두 기사가 모두 다 오늘 구약본문이 제기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을 향하여 묻는 한 인간의 고뇌에 찬 그 실존적 물음에 대하여 오늘 구약본문이 대답해 주는 것과 같은 그런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된 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첫 기사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소망교회”라는 그 “교회”는 교회가 가야할 그 본래적 사명인, 이른 바, 하나님 증언이라는 사명에 있어서는 실패하였다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모범적 범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의 교회들이 “하나님 증언”에 있어서는 자신감과 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는 교회선교의 최대의 원수인 “교회물량주의”를, 마치 교회의 본질적 과제인양 잘못 확신하고 그것을 낯내놓고 지향해 갔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례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을 해결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오늘 교회의 절대적 대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두 번째의 기사도 또한 마찬가지의 결론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폴 니터 교수를 초빙한 “종교 간의 대화”문제에 관한 토론회는 분명 대외홍보도 그럴듯하고 또 그 내용도 또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이와 관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 간의 협력>이라는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망교회 문제와는 그 格이 전혀 다른 매우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나 종교다원주의 이데올로기를 일반화하는 일과 같은 것은, 비록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21세기에 있어서는! 거의 해묵은 낡은 과제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보다는 좀 더 본원적으로 니체, 러셀, 도킨스, 호킹 등등에로 이어지는 <무신론 선교운동>과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하나님 증언>의 근본문제를 본격화할 때가 현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간에 그들 모두가 우리 신앙의 진정성을 증언하는 일보다는 모두들 그 본질과는 무관하게 그저 외곽을 현학적으로만 겉돌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정말 자기 integrity를 갖고 있는 종교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에까지 왔다는 자괴감마저 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도 불교가 아니고 이슬람도 역시 그러해서, 모두가 다! 자기 본질을 잃고 그저 외곽을 형식적으로 겉돌기만 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왜 종교가 따로 존재해야 하고 또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생기에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비종교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어느 한 교회의 간판은 “예수교회”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바로 옆 자리에 또 다른 교회건축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새로 짓는 교회 이름이, 놀랍게도, “<> 예수교회!”라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희가극 중의 희가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슈퍼마켓 늘어나듯 무한대로 늘어나지만, 이 시대를 향하여 그 존재이유를 분명하게 증언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나?”라고 물으면서 “교회”를 찾아가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그들 중 십중팔구는 그 곳이 처음엔 교회인줄만 알았지만, 얼마 후엔 모두가 그 본질에서 떠나가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그 모순은 아무리 극복하려해도 구제불능이라서, 다들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 그만 자신도 또한 교회기업화에 안주해 버리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종교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이젠 많은 사람들도 또한 종교 대신 교회를 향해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는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대답은 단지 “교회가 교회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오늘 구약본문의 문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오늘 교회들이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시인이 말하는 “나의 도움”이라는 말은 성서가 그 끝 간 데까지 내내 반복적으로 설명하며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즉 이 시인은 여기서 “인간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질문자들이 그 대답을 얻으려고 “들을 우러러 쳐다보았다는 그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산에서부터 혹 “나의 구원”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향한 이 세상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나의 구원”을 찾기 위하여 다들 “산”들을 쳐다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산”은 너무 높고, “인간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잡히는 것이 아닌, “불가시한 것”이고, 해서,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와 오늘 종교들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현상을 저는, 단 한 마디로 말하여, 이 지구상의 종교들은 모두가 그것이 탄생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곧 그 본질에서부터 이탈하여 비본질적인 것으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마치 인간이 타락하자 곧 그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비본질적인 실존으로 떨어졌듯이, 그렇게, 종교도 또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증거를 우리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등등이 하나같이!! 범해 온 “경전이탈”이라는 현상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40여 년 전, 제가 대구 성락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팔만대장경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는 경북대학교의 어느 교수님(불교학자) 한 분을 초청하여 수요저녁집회 특강을 마련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교수님의 강연의 결론은 “오늘의 한국 불교는 경전불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도 “경전기독교”가 아니라는데 그 근본문제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들이 비록 사경회를 자주 하고 또 최근에는 교회마다 갖가지 형태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막상 그 진상을 살펴보면, 우리의 경전인 그 “성서”를 공부하고 해석하고 연구하며 그것에서부터 구원의 진리를 도출해 내려고 몸부림하는 교회는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상이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사람들은 아우성치며 묻지만 교회는 끝내 아무 대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신학계가 아닌, 영화계가 나서서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몰이를 한 저 “sound of music”이라는 고전 영화를 통해서, 그것도 엉거주춤, 주인공 마리아의 입을 빌려서, 정말 바보마냥, 수도원 주변의 들을 쳐다보며 그리고 정말로!! 그 산들에게서 나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리고는 정말로! 그 산들의 도움으로 독일 나치 헌병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그렇게 각색되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주인공 마리아가 스위스의 알프스 푸른 산 능선들을 타고 뛰어다니며 마치 실제로 산들을 향한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얻은 것인 양, 그 아름다운 산들을 자신만만 찬양하는 뮤직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전적인 “뮤직 드라마”는 그만 “산”이 구원의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거짓증언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산”들이 실제로 주인공 마리아의 구원기도를 들어 준 것은 결코, 결단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드라마의 증언은 비록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잘못된 각색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허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비판을 받게 되고 즉각 주인공 마리아의 기도 내용 중에서 시편 121편 1절을 삭제하는 소동까지 벌였던 것입니다.(J.F.D. Creach, "Psalm 121" Interpretation, Jan. 1996, vol. 50, No. 1, Pp.47~51). 성서의 대답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대답은 단지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도움은 산들로부터가 아니라 산과 들, 그 모두를 지으신, 즉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 온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미 <성서>를 버렸기 때문에 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서 안에 깊이 매장되어 있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인 그 金鑛脈을 지상의 그 어느 교회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캐내려고 땀 흘려 坑道를 힘들게 파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교의 망국적 쉐마교육의 메커니즘만을 흉내 내면서 성서구절을 암송만 하면, 또는 성서의 문자를 부적처럼 가슴에 붙이기만 하면 우리 신앙의 공덕이 자동적으로 축적된다고 오도하고 있어서, 우리는 분명, <나의 도움은 산들로부터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온다!>라고는 결코 당당하게 증언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1953년 예장-기장의 분열 직후인 어느 날, 아직도 한국교회가 예장-기장의 간판 사이를 우왕좌왕하던 그 무렵, 전남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장로교회였던 광주 양림교회에서, 즉 김재석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고 그 담임 목사님의 막내 여동생인 김재순 목사님이나 또는 강신석 목사님 같은 분들이 아직도 나이 어린 중등부 학생으로 있던 그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실 때, 참으로 개척자적이게도, 평신도들과 감히 <질의응답>형식으로! 성서 공부를 진행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평신도가 용감하게 강사 목사님이신 김재준 목사님을 향하여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 동정녀가 임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장공 선생님은 요사이 우리 사이에 흔하게 유행하는 바, 어느 연예인 교회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에서 있었던 유머 담긴 위트(wit)처럼, “남편인 요셉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나서서 야단이야?”라고 하여 폭소를 잣게 하는 機智로서 그 난해한 대답을 능수능란하게 회피하시거나, 아니면, 거룩한 교회에서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호통을 치시며 권위주의적으로 제지하거나 하시지 않고, 단지 조용한! 말로, “비록 그것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여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고 나는 믿습니다”라고 조용, 조용! 대답하셔서 그 대답이 좌중의 무리에게 너무나 “권위 있게”(마태 7:28~29) 들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공 선생의 증언은 오늘 읽은 신약 본문 사도행전 17:22~25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아그노스토 데오”, 행 17:23)라는 허상에 매달려 있었던 그리스 철학자들(에피쿠로스/스토아 철학자들) 앞에서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인신 그 하나님”(행 17:24)을 자신 있게 증언하였던 사도 바울의 그 용기 있는 증언을 연상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그 “산”을, 시편 주석가들의 말처럼, 만일 물질주의와 섹스관능주의를 표방하는 가나안 바알종교의 저 신전 여인들이 엑스타시 속에서 예배 자들과 거룩한 성관계를 하는 성소들(sex-cults)이 있는 그 음란한 수풀 욱어진 山들이라고 한다면, 아테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그 “산”은 아마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역사적으로 그 존재입증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예배 제단, 즉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섬기는 신들(본문은 單數이지만)이라고 지적한(요한 4:22) 바, 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무신론자)들의 세계에서 “신”이라고 흔히 일컫는 그 어떤 관념적 이데올로기, 이른 바, 불확정의 신개념, 즉 신에 관한 그리스적 궤변”을 통칭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관념적 신은 철저히 배척하고 단지,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계시를 통해서 경험된 하나님을 증언할 뿐입니다. 그 분은 천지를 지으셨고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공 선생의 그 소박하면서도 명료한 그 답변은, 실로, <나의 구원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라는 이 증언(시 121:2)만이 오직 유일한 본원적인 진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증언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장공 선생은 니체나 버트란트 러셀이나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 등의 무신론의 전도사들과 같은 자들에게 기독교 경전인 성서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권위 있게 대답하고 증언하는 그 일이 바로 기장의 출발 정신임을 흔들림 없이 천명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호킹의 최근작<2010년 작>인『위대한 설계』에 나타난 그의 무신론 포교에 대한 저의 반박증언은 신암교회 홈페이지 <김이곤 교수 칼럼 1>에 나타나 있습니다. http://shinam.onmam.com). 그렇습니다. 만일 아직도 우리가 이 대답을 증언하는 일에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분명,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며 장공의 제자도 아닙니다.

(2011년 1월 27일 장공 김재준 목사 24주기 추모예배 설교)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2호] 2011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