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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5호] 특별기고 - “김재준 목사와 한경직 목사와의 마지막 만남의 주선” / 조원길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2:58
조회
1243

[제15호] 특별기고

“김재준 목사와 한경직 목사와의 마지막 만남의 주선”

조원길 목사
(본회 이사장 / 남성교회 원로목사)

1976년 5월 4일 내가 미국 Assembly of Go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졸업하고 남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취임하고 보니 교인은 장년 60여 명이었고 건물은 무허가 건물에 건평 25평 정도였다.

그래도 전임 이윤학 목사님의 신뢰와 성실한 교인들의 협력으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한 나는 날마다 넘치는 의욕으로 산 기도, 심방, 설교 준비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목회의 꿈은 땅을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촌 세브라스 병원 원목 일을 하는 김모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 병원 직원들을 위해 부흥회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부흥회를 인도해 본 경험이 없다고 거절했으나, 그는 기어코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나도 결국 허락했다. 김 목사는 우리 교단도 아닌 예장통합 목사이나 그가 나를 초청한 이유는 비록 내가 기장이지만 그와 나는 서울 장신대에서 약 15년 간 같이 강의를 한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교육학을 강의하고 그는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했다.

세브란스 병원 전 직원을 위한 부흥회는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20분까지 한 시간씩 삼일동안 진행되었다.

나는 부흥회 전문 강사도 아니고 더구나 목회를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집회는 처음인지라 두렵고 긴장이 되었다. 설교는 거의 내가 미국 유학시절에 받은 체험 중심이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약 이주일 후에 원목 김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히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하기에 갔더니 그가 나를 보면서 “당신의 교회는 복된 교회야”하면서 나에게 봉투 하나를 주면서 집에 가서 보라고 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개봉했다.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보증수표 오백만 원 이었다. 김 목사가 말하길 이 병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퇴직을 앞둔 이영옥 집사(예장통합 영락교회)가 퇴직금을 어디에 사용할까 기도하던 중 지난 주 조원길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고 드디어 그 교회에 헌금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영옥 집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 흉곽내과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주로 외국 유학 가는 학생들의 X-Ray판독을 통역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영옥 집사가 자기 나름대로 남성교회에 헌금을 하고 집에 가서 남편 김근주 집사(숭실대 영문과를 나와 서울 시내에서 의류 수출회사를 경영)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 내용을 듣던 남편 김 집사는 예장도 아닌 기장 교단에 왜 헌금을 하느냐며 약간의 문책을 하면서 내가 직접 남성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조원길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고 나머지 오백만 원 헌금을 결정하자고 부부가 합의를 하고 우리 교회에 왔다. 주일 예배 때 나의 설교를 듣고 즉시 오백만 원 수표를 남성교회에 바쳤다. 도합 천만 원이었다. 이 헌금으로 우리는 당시 김춘기 씨(현재 남성교회 권사)땅 220평을 구입하고, 그 후에 김은자 권사(예장합동 서대문교회, 당회장 장성칠 목사)의 헌금으로 건축을 완료했다. 김은자 권사는 내가 예장통합 서부이촌동교회(당회장 이연호 목사)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그 때 은혜 받고 자기 집을 팔아서 남성교회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그러니 남성교회는 기장이면서 교회 대지는 예장통합 영락교회가, 건축비는 예장합동 서대문교회가 헌금하여 세워진 셈이다.

그 후에 한경직 목사님이 이 소식을 듣고 주일날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영락교회가 수많은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한 줄로 아는데 기장 교단 교회를 위해 교회 대지 구입 헌금을 한 것은 처음인줄 압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나의 죽마고우 김재준 목사와의 우정을 회복하라는 뜻인 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듣고 김재준 목사님이 캐나다에서 귀국하셔서 지금 수유리 자택에 계신다고 했더니 한경직 목사님은 너무 기뻐하시면서 그러면 속히 주선하여 김재준 목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은퇴 후에 남한산성에 계시는 한경직 목사님이 자동차를 친히 보내어 생전에 만날 줄 몰랐던 두 분이 만나 점심식사를 하시고 하루 종일 남한산성 옛 성벽을 거닐며 그간 서로의 살아온 과정을 나누면서 뜻 깊은 하루를 보내셨다.

이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 많은 오해와 비판을 다 털고 가시게 되었다는 일을 생각할 때 나 자신이 김재준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마지막 만남을 주선한 일이 이 두 분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믿고 내 평생에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산다.


[위 사진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시절(1928년) 사진이다]
[김재준, 김성광, 한경직, 윤하영]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5호] 2012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