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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5호] 권두언 - “아름다운 전설, 장공 김재준 목사님” / 이현숙 이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2:47
조회
750

[제15호] 권두언

“아름다운 전설, 장공 김재준 목사님”

이현숙 이사
(본회 이사 /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65년인 듯하다. 성서해설과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강의에서 장공 목사님을 처음 뵈었다. ‘따뜻하면서도 퍽 이지적인 할아버지’모습이 풋내기 대학 신입생이 처음 받은 인상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장공 목사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를 세운 이야기며, 기장 탄생에 관한 이야기, 한경직 목사님과 양대 산맥이란 이야기며, 명 문장가로서의 면모, 말씀 없음과 삶의 검약함에 얽힌 일화 등, 그분의 실체와 내력은 이렇게 소문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내게 전설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말씀 없음에 관한 일화는 단연 돋보였는데 장공은 말씀하기보다 경청하길 즐기신다는 일화 하나가 떠돌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찾아가 목사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실 때까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찾아뵈었는데 역시 목사님이 먼저 말씀을 안 꺼내시는 바람에 종국엔 몇 시간을 대책 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 왔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목사님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애송이 대학생이 저 전설 속의 주인공과 친밀감을 쌓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는지 싶다. 어느 날 이우정 선생님은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어느 모임이 있는 곳까지 택시로 장공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목사님 댁 근처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목사님을 모시러 댁으로 향했다. 마음은 이미 들떠 있었다. 아니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목사님을 모시고 가는 동안 목사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듣던 대로 아무 말씀도 안하실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여쭤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번민 속에 택시는 목사님 댁 앞에 당도했다. 그런데 그만 나는 택시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를 보내는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초인종을 누르고 목사님이 밖으로 나오셔서 ‘택시는 어디 있느냐?’고 할 때까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우연히 찾아온 전설 속 주인공과의 첫 대면은 이렇게 당혹스런 상황으로 시작되고 말았다. 우리는 잠시 겸연쩍은 웃음을 교환하고 함께 길가로 나와 택시를 탔다. 다행히 택시를 쉽게 탈 수 있었지만 목사님은 듣던 대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미 멀쩡한 실수가 있었으니 나 또한 한 마디도 운을 뗄 처지가 아니었다. 행운같이 찾아온 목사님과의 첫 대면은 이렇게 침묵으로 끝나고 말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목사님의 좌우명과 실천은 경청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그는 말씀을 줄이는 대신 수많은 글을 남기셨다. 그 수려한 글들은 많이 들음의 소산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들음 속에서 그는 그 시대의 질문과 문제를 더 잘 파악했을 터이고 그래서 그의 글은 힘을 내장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침묵 속에 막을 내린 나의 첫 만남은 다행스럽게도 장공전집을 통한 만남으로 충만해질 수 있었다. 장공전집은 내 삶의 자부심의 원천으로 서가에 꽂혀 있으며 신앙의 안내서처럼 손길을 타고 있다. 오래 전 세로 쓰기로 쓰인 그 분의 책 <성서해설>은 지금까지도 머리맡에 성경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여전히 나는 그 분의 그늘 속에서 주유하고 있다. 내게 김재준 목사님은 아름다운 전설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자꾸만 느슨해지고 게을러지고 싶을 때 내면을 다독여주고 사명감을 불러내는 요청의 목소리다. 끝내 못했던 말씀, 사랑해요 목사님 !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5호] 2012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