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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4호] 성묘예배 설교 - “다시 기억해 보는 장공 선생님” / 김대식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2:28
조회
978

[제14호] 성묘예배 설교

“다시 기억해 보는 장공 선생님”
(로마서 12:1-2)

김대식 목사
(서울북노회 원로목사)

장공 선생님은 그의 호가 그러하듯 장공처럼 높고 넓으신 분이어서 어느 한 귀퉁이를 붙잡고 이 분이 장공이시다 말하기에 부적절한 분이시다. 오직 내가 만나 뵌 장공 선생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장공 선생님을 자주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큰따님이신 김정자 집사님을 통해서였다. 김정자 집사는 만주 할빈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신영희 선생의 부인이었다. 신영희 선생은 후에 금호동 성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 받아 섬겼지만 원래 농촌 이상향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분이었다. 의사이므로 당연히 큰 도시에서 개업하여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유촌마을에 들어가 가난한 화전민의 치료자가 되었다. 그 곳에서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상촌을 세우려는데 몸을 바쳤다. 신영희 장로의 헌신적인 봉사를 잊지 못한 유촌마을 주민들은 그의 공덕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교회마당에 서 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의 가족은 불행한 것이다. 그의 부인 김정자 집사는 젊은 나이에 강원도 화전민 속에 들어가 얼마나 고생이 되었겠는가? 가족에 대해 무덤덤하신 장공 선생이시지만 딸에 대한 안스러움이 어떠하셨겠는지 짐작이 된다. 보다 못한 강원용 목사님을 비롯한 친구들이 그를 서울로 불러들여 금호동 돌산 밑에 조그만 의원을 개업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 피난민들이 자리 잡은 금호동 돌산은 서울 장안에서 가난한 마을의 대명사라 할 만큼 달동네 중의 달동네였다. 그 곳에서 생활이라고 강원도 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왕진 가방을 들고 돌산을 뛰어다니며 치료해 주어도 진료비를 낼 수 없는 분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환자를 돌보아 주었기에 주민들은 신영희 장로를「성자」라고, 금호동의 슈바이처라고 일컬었다.

유명한 분의 가족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꿈 많은 남편을 따라 강원도 궁벽한 곳에서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거니와 서울에서도 여전히 고생스럽게 살다가 중년에 불행하게도 전신무력증이란 희귀병을 얻어 나날이 쇠약해갔다. 그 따님의 모습을 보는 장공 선생님 내외분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장공 선생님은 바쁜 중에도 자주 금호동에 내려 오셨다. 선생님이 따님 집에 오시면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나는 만사 제쳐놓고 한 걸음에 달려가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다.

한 번은 신영희 장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장공 선생께 아뢰었다.

“집의 아이들이 통 교회에 나가려 하지 않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모든 부모의 걱정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신장로는 선생이 손자들을 잘 타일러 교회에 잘 다니도록 해 달라는 의도였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의외였다. “그냥 내버려두어! 알아서 잘 나갈 때가 있을터이니…”

그의 이 말씀은 나에게도 실망스러웠다. 좀 야단을 치셔서라도 교회에 잘 나가야 된다고 타이르시지 않고…? 그런데 후에 말 안 듣고 교회 안 나오던 장본인들이 한 분은 장로가 되었고, 다른 한 분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겼다.

겉으로 덤덤한 것 같은 선생님이 속으로는 매우 다정하시고 따뜻하신 사랑의 선생님이시다. 한 번은 선생님께 인사차 수유리 댁으로 방문했다.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 떠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손수 문을 열고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배웅하시는 것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의 겸손하신 모습이다. 한때는 운동권의 투사와 같으신 선생이셨지만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어머니처럼 자애로우셨다. 성호교회 취임식 설교를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제자도”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28장 16-20절 말씀을 주셨다. ‘오늘의 교회는 옛날 콘스탄틴 대제 때와 같이 권력의 비호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카타콤의 지하교회처럼 박해를 받을 각오로 목회해야 한다. 고난을 두려워 말고 잘못된 권력을 비판하고 정의를 외쳐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당시 사회는 삼선개헌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으므로 예언자적인 목회를 주문하신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서 내려오신 선생님께서는 30대 초반의 어린 목사에게 너무 무거운 말씀을 주셨다고 느끼셨는지 사석에서 내 손을 잡고 위로 해주시었다.

“어려운 교회에 부임했다. 돌산에 가난한 백성 중에 있는 교회이니 얼마나 힘들겠느냐? 더욱이 교회가 큰 상처를 입었으니 고생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펄전 같이 회개를 외치며 복음을 전하여라. 그러면 교회가 다시 설 것이다.”

당시 교회는 목회자의 윤리적인 문제로 큰 시련을 겪고 문이 닫힐 지경이었던 때였다. 그때 나는 놀랬다. 선생님의 입에서 스펄전 목사의 말씀이 나왔기 때문이다. 성호교회 20년 목회는 참으로 힘든 목회였다. 그래도 선생님의 말씀이 힘이 되었다.

사회는 매우 뒤숭숭했다. 군사정권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고 있고, 서울 장안의 젊은 목회자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목요집회가 철통같은 경찰들의 봉쇄망을 뚫고 기독교회관에서 기도회를 강행하였다. 기도회 후에는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경찰들은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했다. 나는 젊은 혈기를 어쩌지 못하고 시위 후에는 술을 퍼 마시고 만취해서 들어 왔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밤마다 계속되니 어찌 소문이 안나겠는가? 모르긴해도 신영희 장로가 장공 선생님을 찾아가 걱정을 한 모양이다. 장공 선생님의 소개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망가지는 것 아닌가 염려 되었을 것이다.

하루는 신영희 장로가 장공 선생님이 주시더라며 족자글을 내밀었다. 그 글은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소서.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도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도 이 말씀은 내 서재에 걸려 있고 때마다 선생님의 따뜻하신 가르치심을 되새기고 있다.

안타깝게도 김정자 따님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신영희 장로 마저 중한병이 들었다. 교회로서도 큰 손실이었지만 선생님 마음이 어떠하셨으랴! 그러나 선생님은 희로애락을 잘 표현치 않으시는 분이 아닌가! 오히려 당신도 편치 않으심에도 나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셨다.

“(전략). 어수선하던 금호동교회에 부임하셔서 장기 목회에 충성하시고 교회가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신 것을 못내 치하합니다. 끝까지 충성하시어 뇌신지사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후략).”

선생님 가신 지 어언 25년, 작은 가슴으로 푸른 하늘 같으신 장공 선생님의 높고 넓은 마음을 헤아려 본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4호] 2012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