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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4호] 추모예배 추모사 - “장공, 그는 우리 모두의 선구자” / 정원섭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1:45
조회
643

[제14호] 추모예배 추모사

“장공, 그는 우리 모두의 선구자”

정원섭 목사
(전북동노회 원로목사)

우리 기장인들 중에서 과거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비판적 대립각을 세웠던 분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연보는, 물론 엄혹했던 그 시대적 상황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부분적으로 축소되거나 왜곡된 점이 있어, 5년 전에 이점을 시정할 것을 황성규 교수님에게 알려주었더니 김경재 교수님과 함께 심도 있게 검토한 후 이를 기념사업회 내부적으로 정정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한 개인의 연보는 그가 살아온 시대 속에 역사입니다. 역사는 객관적 진실까지 담보하기 때문에 그 시대 속에 다른 역사와도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확무오가 원칙입니다. 하물며 우리 모두의 큰 스승이신 김재준 목사님의 소중한 연보가 어느 한 사람의 실수나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일부분이라도 왜곡되어 후세에 잘못 전해진다면 이는 장공 선생님께 대한 큰 결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써야합니다. 우리 후세에게 틀린 것을 배우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73년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을 같은 해로 두리 뭉실 통합해 놓은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물론 몰라서 그렇게 정리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부득이 했던 당시의 시대적상황과 맞물려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자유, 민주시대입니다.

그래서
1969년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1971년 공면선거를 위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 초대이사장
을 각각 년도 별로 분리해서 정정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신 후 최초로 발생한 유신반대운동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는 1973년 부활절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배포된「우리는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하는 유인물배포사건(박형규 목사 구속)과 그 해 12월에 발생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면운동사건(장준하 선배 구속)도 모두 그 중심에는 우리 김재준 목사님의 가르침과 독려가 있었음으로 마땅히 연보에 올려 길이길이 기억함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요 도리라고 생각합니다(김재준 목사님의 자서전 凡庸記 캐나다판 참조. 내용출처: 현대사<성공회대>.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성균관대 교수 서중석>.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년 전 제20주기 성묘예배에서 저는 능참봉이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는데 능참봉은 벼슬이 아니라 徵官末職인 그저 묘직이라는 뜻인데 오늘 이렇게 높은 단상에까지 세워주신 조원길 이사장님과 관계 직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25주기 추모예배에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가 직접 경험하고 활동했던 1971년 공명선거를 위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사건입니다. 저는 그때 춘천에 살고 있었는데 김재준 목사님의 급한 연락을 받고 상경해 종로서관 3층에 있는 어느 방으로 안내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와 신학교 동기인 배성룡 목사, 윤기석 목사(74회 총회장 역임)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조금 있자니 김재준 목사님께서 장준하 선배를 대동하고 들어오셨습니다. 그 날 김재준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은“삼선개혁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오는 4월 대선에는 야당에서 누가 나올지 모르지만, 누가 나오더라도 무조건 야당후보를 당선시켜서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공명선거를 위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란 부정선거를 못하게 감시를 잘 해서 박정희의 당선을 막자는 박정희 낙선운동 지령이었습니다. 배성룡과 윤기석은 광주와 호남일대를 맡고, 나는 춘천과 강원도 일대를 맡아, 서로 필승을 기약하고 거듭 파이팅을 다짐하며 헤어졌습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똘똘 뭉쳐 자기네 연고지로 돌아가 밤잠을 안자고 부정선거를 감시하며 투표함을 지켰지만 전국적으로 감행된 집권당의 조직적인 개표부정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때도 보수성향의 대형교회들은 끝내 방관하고 침묵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 장공 선생님을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그때 공무원들은 너무도 무기력하고 과잉 충성으로 집권당의 부정을 방관했습니다. 그 결과 야당후보였던 김대중 씨보다 현직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총 투표수의 절반을 조금 넘는 53.2% 겨우 90만 표 차로 당선이 확정됩니다.

그 일 후 3년이 지난 1974년 1월. 김재준 목사님이 캐나다로 이주하시기 직전에 윤기석 목사와 나는 광주교도소에서 다시 장공 선생님과 이우정 교수님 두 분 은사님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윤기석 목사는 긴급조치위반의 죄명으로, 나는 강간살인이라는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게 되었고, 이 때 우리 제자들을 대면하시는 두 분 은사님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린 듯 저며 옵니다. 캐나다로 이주하신 후에도 고국의 감옥에 남겨두고 떠나오신 못난 제자들을 생각하시며 늘 마음아파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박팔양의 시 봄의 선국자를 소개합니다.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느니 차라리 붓 들고 울 것이 외다. 백일홍처럼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꽃처럼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속절없이 떨어지는 가엾은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느니 차라리 붓 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찬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곱게 곱게 피는 것이 꽃이 아니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오려는 봄소식을 먼저 그리며, 웃으며 사라져 가는 것이 진짜 봄의 선지자라고…선구자는 의리와 절개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한국교회 현대신학의 선구자요 기독교의 사회참여,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앞날을 내다보시고 나를 살게 하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나에겐 더 없이 위대한 선구자이십니다.


[2012년 1월 27일, 장공 김재준 목사 25주기 추모예배에서 추모사를 전하는 정원섭 목사]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4호] 2012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