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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4호] 권두언 - “장공, 슬픔의 파토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1:21
조회
587

[제14호] 권두언

“장공, 슬픔의 파토스”

하태영 목사
(본회 학술위원장 / 삼일교회 담임목사)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향년 8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금년으로 25주년을 맞이했습니다(1901. 11. 6-1987. 1. 27). 금년 추모일에는 수유리 신학대학원 채플에서 추모예배를 마치고, 남한강공원묘원 산소에서 조촐한 성묘도 있었습니다. 나름으로 뜻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좀 쓸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김 목사님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변함없이 김 목사님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김 목사님께 직접 사사받은 후학들도 이제는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거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분들도 대부분 고령이시라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등 굽은 소나무가 산소 지킨다는 옛 말이 있지요. 피붙이도 점차 제 살길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터에 제자라 해서 특별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겠지요.

문제는 후학들에게서 장공에 대한 생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현장의 목회자들은, 장공은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러는 ‘아직도 장공이야?’라고 노골적으로 핀잔하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장공이 싫어서가 아니라 존경은 하지만 목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이런 괴리가 생긴 것일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장공은 신학자이기는 하지만 교회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말문이 막힙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토대가 바른 신학에 있을 터인데도,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오직 교회성장만이 선이다는 지극히 비신학적인 사고에서 연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장공은 분명 교회만을 위한 신학을 하신 분은 아닙니다. 교회다운 교회,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꿈꾸며 가르치신 분입니다. 장공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삶을 사신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회에 대한 열정을 지니셨든 분입니다.

장공에 대한 또 다른 부정적인 평판은 비타협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면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공의 삶에서 투쟁을 빼놓을 수 없기에 그럽니다. 교권주의와의 투쟁, 반독재 투쟁, 인권신장을 위한 투쟁, 민주화를 위한 투쟁 등 장공은 암울한 시대 한 복판에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실 권력과 불편한 관계를 겪어야 했고, 기득권으로부터는 경원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공은 복음의 선물인 신앙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에서 물러섬 없이 사신 분입니다. 여리기 이를 데 없는 작은 체구로 어떻게 그 험한 일들을 감당했을까? 의지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중생의 체험을 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공은 생각은 깊으면서도 폭이 넓고, 말은 진솔하면서도 과장이 없고, 글은 꾸밈이 없으면서도 물 흐르듯 쓰신 분입니다. 비판은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를 잊지 않으신 분입니다. 생활은 넉넉지 못했음에도 구차하게 살지 않으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일생을 한결 같이 사신 분입니다. 장공의 삶과 성품을 짐작해볼 요량으로 18권 되는 <장공전집>에서 생애 처음 쓴 글과 생애 마지막에 쓴 글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처음 글은 1926년에 재일본기독청년지 [사명]에 쓰신‘예찬의 말씀’이고, 마지막 글은 1986년에 쓴 자전적 에세이 [조약밭의 조약돌들] 서문 ‘이유없이 슬퍼져’입니다. 처음 글은 당신의 나이 25세로 혈기 왕성한 청년기 동경에서 공부하실 때 쓰신 것이고, 마지막 글은 당신의 나이 85세로 육신이 극도로 쇠잔하여 소천하시기 1년 전에 쓰신 것입니다. 뜻밖에도 두 글은 60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슬픔의 파토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장공에게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는 단순히 청빈한 삶의 모델이기보다 구차한 몸을 벗고 언젠가 가야할 고향을 향한 동경이기도 합니다. 장공은 예레미야애가처럼 하나님이 아니고는 위로받을 수 없는 가족과 분단조국과 교회와 동역자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지니고 사신 분입니다.

아씨시의 성자여, 불딩구라 거친 초방(草房)의 한 구석에서 제단도 사제도 없이 주의 성찬을 지키시고 깊은 침묵 가운데서 저 세상으로 옮기신 성자여, 당신이 가신지 700유여년 움부리아의 봄풀은 해마다 푸릅니다. 그러나 흐르고 흐르고 큰 물결 한 구비인 이 세상은 너무 변하지 않았습니까.

성자여,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가슴에 안기셨습니다.…그러나 기막히게 맑은 움부리아 창공에 흰구름이 흐르고 무너진 아씨시 성 틈에 묵은 풀이 푸른 봄날, 교외로 거니는 병여(病餘)의 당신 가슴 속에는 하염없는 공허가 느끼어졌습니다.…(1926)

벌써 거의 한 달째, 이유 없이 슬퍼져 어떤 때에는 체면 없이 울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니 발산 안 되는 탓도 끼어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재도 빈곤하여 읽고 싶은 책도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글씨를 써 보아도 울적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닥잖은 글씨인데 종종 글자를 빼먹는 일까지 생깁니다. 애꿎은 화선지만 수세미로 변합니다.…내가 울고 싶을 만큼 슬퍼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울며울며 떠나던 하령과 하령의 아빠가 눈에 선한 것 때문이기도 하고, 단군 할아버지 유산인 만주 벌판, 천리 천 평을 중공에다 넘겨준 슬픔도 내 심장에 꽂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잃다 남은 고토마저 남과 북으로 허리가 잘려 병신노릇 밖에 못하는 현실이 슬프기도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나라에 자기 운명을 맡기고 동족이 원수가 되어 그 흘긴 눈동자가 바로 설 기약이 아득하니, 앞날이 몇 해 남지 않은 노부가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량 사랑을 대변한다는 교회도 심한 근시안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 역시 슬픕니다.…(1986. 1. 24)

한 사람의 살아온 생애 처음과 끝이 이토록 깊은 연민과 슬픔으로 이어지다니. 아무리 인격이 도야된 사람일지라도 살아온 세월은 굴곡이 있기 마련이고, 곡절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도, 한평생 삶의 색채가 시종여일하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장공의 후학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목회자들이 배워야 할 인물을 꼽는다면 그가 이룩한 업적이나 처세나 기술이나 그럴듯한 직함이 아니라, 그의 삶과 신앙과 인품이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공은 후학들만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아끼고 배워야 할 미래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후학들의 관심을 기대해봅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4호] 2012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