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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5호] 강연 - “신자유주의 시대의 저널리즘과 영성” / 변상욱 대기자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3:06
조회
811
[제15호] 강연회 - 제15회 장공기념강연회

“신자유주의 시대의 저널리즘과 영성”

변상욱 대기자(CBS)

1. 한국 언론의 구조적 한계

일제 강점기는 친일지가 주종을 이루었다. 대한일보, 한성신보, 국민신보, 시사신문 등이다. 민족지라고 일컫는 동아와 조선일보도 있었지만 항일저항은 지극히 미미했다고 평가받는다. 가장 오랜 전통의 신문인 조선·동아 등이 과거사 청산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친일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예로 동아일보가 흔히 일제하 저항의 예로 드는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경우도 기자가 양심상 일장기를 지운 것이고 신문사는 곧바로 기자를 해직시킨 사건이다. 이처럼 우리 신문은 대단한 항일의 전통 없이 권력에의 굴종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이것은 신문언론의 시대적 변천과정인 팜플릿-월간-주간/순간-일간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근대문물을 곧바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순간/일간으로 시작해 신문언론의 기반 자체가 허약한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도 신문은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 체제 아래서 왜곡된 경로를 거친다. 미군정은 미국식 자유언론제도를 한국에 곧바로 이식했으나 시행착오로 끝난다. 일제강점기의 출판법·치안유지법·보안법 등이 철폐되고, 신문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자 이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문들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고 각 정파의 기관지 성격을 띠었다. 결국 좌우대립에 휘말려 상호비방과 인신공격을 주고받다 급기야는 테러 사건들도 빈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언론정책을 강경규제로 바꾸어 허가제, 신규허가 중단, 처벌강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많은 신문들이 정간 및 폐간당하고, 언론인들이 구속되었으며 그 대상은 주로 좌익계 신문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1954년 신문정비에 관한 담화로 시작해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일간지를 비롯한 여러 정기간행물들을 통제했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독재적 성격을 띤 사사오입 개헌 등 정치적 비리에 대해 언론의 비판이 일부 행해지기도 했다.

2. 군부 정권 하에서의 한국 언론의 굴종과 유착

1) 박정희 시대

법과 제도에 의한 공식적 제재, 비공식적 제재가 병행되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활용해 언론을 유신이념의 전파 도구로 이용했다. 양적으로는 언론이 성장을 시작했고 상업주의도 발흥했으며 언론사주들이 정권에 동조하면서 사주와 기자의 대립 시대가 열렸다. 그러던 중 유신체제에 맞서 젊은 언론인들이 1974년 10월 자유언론수호투쟁을 선언하고 검열거부, 기관원 출입금지를 주장하다 1975년 3월에 대량해직 되었다(동아일보 130명, 조선일보 30명). 정확히는 조선·동아 신문사주들과 박정희 정권의 타협에 의한 탄압이었다.

2) 전두환 시대

1980년 군부 강경파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쥔 뒤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언론 장악에 나섰다. 국군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이 만든 언론계 정화정비 계획에 의해 933명 대량 해직사태(298명 정부 지명, 635명 언론사 자체로 선정)가 발생하고 비판적 언론인들은 해직 이후 감시 상태에 들어갔다.

언론사에 남은 언론인들에게는 특혜를 주며 회유를 시작했다. 언론사의 높은 임금과 각종 다양한 세금제도 상의 혜택이 시작되며 권언유착의 밀월관계가 형성된 것이 이때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권언복합체이고 동아일보에 항상 뒤지던 2인자 조선일보가 가공할 순발력으로 약진 추월하며 최대 신문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시기이다. 동아일보는 야당지로서의 자존심을 저버리지 못하면서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다 점점 열세로 접어들었다. 그 후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감옥에 간 뒤에도 두 사람을 추켜세운 언론들은 그대로 생존해 주류언론으로 존재했다. 이는 우리 언론이 친일, 유신, 권언유착으로 변신하며 살아 기득권을 향유했고 변신을 거듭하며 죽은 권력자만 물어뜯는 하이에나 언론으로 정체성을 굳힌 과정이다.

3. 문민 정권 시대의 언론의 변신

1) 김영삼 정권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모든 언론이 김영삼 후보를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공공연하게 자기네가 킹메이커 노릇을 했다고 주장하는 신문도 등장했고 언론장학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언론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신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언론에 대한 통제는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시행했다. 주로 정무수석실, 공보처가 동원돼 사주와 사장, 편집국장을 수시 접촉하고 보도협조를 요청하는 스타일. 한편으로는 언론계 정화를 주장하며 언론사 간부 재산공개, 증면자제 요청, 세무조사 등 강경한 정책을 쓰기도 했다.

한국의 신문시장은 이 시기에 재벌신문과 신문재벌로 굳어졌다. 김 씨, 방 씨, 장 씨, 삼성, 현대, 한화 등이다. 언론사 내부에서는 사주의 봉건적 지배가 자리를 잡고 편집에 대한 경영진의 간섭과 편집책임자의 추종과 굴종, 족벌세습, 문어발식 확장, 과도한 채무 등이 이뤄졌다.

이후 언론은 사회의 공기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기업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재벌신문과 신문재벌 간에 신문순위를 둔 치열한 경쟁의 시작됐다. 좋은 신문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잘 파는 신문이 많이 읽히는 신문시장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1996년 만년 3위이던 중앙일보는 동아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이때 중앙의 급부상을 누르기 위해 조선과 동아의 공격이 치열해졌고 결국 이건희·방일영 회장의 수뇌회담으로 신문마피아 전쟁은 종결되었다.

2) 김대중 정권

김대중 정권 하의 언론은 초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과 남북 정상회담의 영향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후 김대중 대통령 레임덕 시기에 이르러 김 대통령 두 아들의 구속수감으로 정권과 결별하기 시작했다. 두드러진 특징은 보수신문이 조선·중앙·동아 삼각체제로 자리를 굳히는 대신 진보신문은 경향·한겨레 쌍끌이 체제가구축되었다. 진보 언론 대 보수 언론의 맞대결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문민정부로서 언론의 자율 개혁을 부르짖었으나‘국민여론’을 빌미로 정부가 개입하는 분위기는 여전해 언론사 세무조사, 신문고시의 부활 등 정부주도로 언론개혁이 추진되었다. 신문사들은 이때부터 지역인사 전면배치가 활성화됐고, 신문의 쇠퇴가 시작되면서 사주들의 입김이 본격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등 시민언론이 태동되어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3) 노무현 정권

언론개혁의 성향을 강하게 띤 최초의 집권 세력이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보수·수구의 맹공을 뿌리치고 정권을 넘겨받은 노무현 정권은 보수 언론의 카르텔을 깨고자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친일과 미군정, 독재, 군부로 이어지는 현대사 과정에서 끊임없는 변신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수 카르텔의 접착제 내지는 방어막 구실을 해 온 언론권력에 대해 견제하고 해체하는 정책들이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은 대안 언론의 육성, 신문유통원 설립 등이다. 중소언론을 지원해 대형보수신문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었다. 신문고시 부활과 불공정 거래 제재, 기자단과 기자실을 해체함으로써 기자사회의 재편을 꾀하기도 했으나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해 결국 중앙언론들로부터 버림받았다.

4. 자본권력과 언론의 자유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자유는 자유무역의 자유이자 돈의 자유이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대자본의 팽창과 지구 장악, 이를 지원하는 자유무역의 자유만이 신장되는 21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1) 1990년대 이후 자본권력과 언론의 관계 - 국내

(1) 자본이 미디어기업을 보유하거나 지분을 확대해 영향력을 증강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SBS 초과 지분 완화 및 방송과 방송, 신문과 방송의 교차 소유 추진, 롯데의 홈쇼핑 인수, 경인방송 허가 등 미디어를 신자유주의 아래 자본의 이윤축적 수단으로 보고 거대한 자본들이 경쟁에 나섰고 정부의 공공 논리가 밀리기 시작한다.

(2) 대형 광고주들의 위상이 급상승하면서 언론과 자본의 갑을 관계가 역전되고, 자본의 언론에 대한 물질적 통제가 강화된다. 한겨레신문 등 진보언론들도 노동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등 자체검열이 이뤄져 논란이 일었고 큰 돈을 위해서라면 명분을 포기하는 풍조가 짙어졌다.

(3) 내부 종사자들의 자기 검열과 통제도 비약적으로 심화됐다. 돈이 되는 기사, 광고주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기사, 광고주가 제공하는 기사들이 범람하게 됐다. 여기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홍보예산을 카드로 내밀며 언론 대응에 나서고 있다.

(4) 재벌 그룹의 다양한 언론 통제 기재와 프로그램 강화도 특징에 들어간다. 언론으로부터의 스카우트, 경영진 압박, 기자 연수, 간부진 관리, 직원 대언론 홍보교육 등이 대표적인 예. 몇 해 전 벌어진 삼성 사건은 시민사회의 응축된 불만과 대응이 단발적으로 폭발한 사건이었고 갑인 삼성에 짓눌려오던 거대 언론들은 이삭줍기에 골몰하기도 했다.

진정한 언론은 언론사의 보도 과정과 결과가 아니다. 신문방송 등의 물적 대상이 아니다.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 권리가 서로에 의해 존중되고 그럴 수 있는 공간과 방법을 찾아내고 권력의 간섭과 규제를 밀어내면서 민주 사회의 운영과 발전을 도모하는 실천적 과정이‘언론’인 것이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촛불집회에서의 스트릿 저널리즘이나 SNS가 대표적인 예이다.

2) 1990년대 이후 자본권력과 언론의 관계 - 세계

20세기 후반 세계 미디어 산업은 격변기에 접어든다. 세계 유수의 몇 언론사의 변화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 크리스천사이언스 모니터 - 1908년 크리스천사이언스 교회가 모태가 된 신문으로 신중하고 깊이 있는 분석기사로 이름을 높였으나 적자가 이어지다 2009년 창간 100년 만에 종이신문 발행 중단.

* 뉴스위크 - 1933년 창간돼 타임지와 함께 세계적인 시사주간지로 주가를 높였으나 부채가 5천만 달러에 이르며 2010년 매각. 매각 액수는 1달러. 그럼에도 적자가 이어져 올해 인쇄 중단될 듯.

20세기의 미디어는 대규모의 인쇄설비 또는 방송설비를 갖추고 소수의 미디어 기업이 정보를 독점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보독점에 따른 권력이 생겨났고 상업광고 또한 미디어로 몰려들었다. 결국 미디어는 거대한 기업이 되어 시장을 독과점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매스미디어의 세계이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오며 누구든 최소한의 촬영장비나 컴퓨터만으로 미디어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과 포털을 통해 정보의 독점은 불가능해졌고 소비자를 놓고 신문·지상파방송·인터넷언론·블로거·케이블 및 위성방송 등이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미디어 시장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대기업이 아닌 소수의 시민도 도전이 가능하다. 과거의 전통적 매스미디어는 정보와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편집해 전달하고 독자와 시청자는 수동적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 세계에서 소비자인 독자 시청자는 검색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주체적인 소비자로 돌변했다.

이러한 미디어계의 격변을 흔히 Thin air라고 부른다. 밀폐된 공간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공기가 희박해지는 현상에 빗댄 것이다.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좁은 시장에 갑자기 많은 경쟁자가 몰려들어 동종의 서비스로 경쟁을 펼치면서 투자요인은 많아지고 수익은 불확실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변화의 주목할 배경은 인터넷에 이어 미디어계에 불어 닥친 디지털화이다. 모바일, 테블릿 PC가 확산되자 미디어 소비행태는 급속히 변화했고 SNS가 정보의 교류와 확산에 엄청난 속도를 보태면서 미디어기업의 퇴출이 시작된 것. 이것을‘디지털 구조조정’(DIGITAL DISRUPTION)이라고 부른다.

2011년 사람들의 미디어 이용행태를 보면 하루 중 미디어 접속시간에서 지상파 TV 172.6분, 인터넷 79.2분, 라디오 34.9분, 신문 17.5분으로 나타났다. 특히 모바일은 이용 시간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2012년 이용시간 기준으로 TV, 인터넷에 이어 3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 즉 라디오를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상업광고들도 스마트폰 광고기법이 개발되면서 서서히 이동을 시작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017년에 종이 신문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2040년이면 지구촌에서 종이신문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미디어계에 디지털화와 함께 닥쳐 온 또 하나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 규제완화가 전 세계에 번져가면서 1990년대 이후 전개되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바뀌어 번져나갔다. 우리 사회도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뿌리를 확실히 내렸고, 이후 전통적으로 지켜져 온 신문과 방송의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시장규제 완화는 세계적 추세이며 정부의 규제완화는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생산과 소비를 늘리고 이 혜택이 중산층 이하로 확산된다는 논리를 근거로 미디어계는‘미디어산업의 선진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3) 이명박 정권의 언론관

이명박 정부의 언론에 대한 인식은 다른 정권 때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소통과 전달’이 아닌 ‘산업’의 차원에서 언론문제를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산업적 방송관 언론관은 방송컨텐츠 산업, 글로벌 미디어로서의 신문방송 겸영 대형화 및 국제경쟁력 확보, 경제활성화의 도구적 수단으로서의 언론발전 등에 치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종합편성 채널을 과도하게 허가했고 정책적으로 특혜지원을 펼침으로써 여론의 획일화를 심화시켰다. 또 방송의 관리통제를 위해 방송통신위원회를 왜곡시켰고 정치적 편향성 짙은 측근들에게 방송사를 관리토록 했다. 한편으로는 이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대통령의 산업적 언론관과 통제는 방송사 조직을 경직시켰고 이념적 보수화로 이끌었다. 그 결과 KBS에서는 탐사보도팀이 해체되었다. 이 팀은 20건이 넘는 기획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150건이 넘는 탐사리포트를 제작해 외부로부터 29건의 언론상을 수상한 팀이다.

YTN의 돌발영상도 결국 사라졌다. MBC에서도 피디수첩 등 개혁적인 성향의 시사프로그램을 만들던 제작진들이 모두 지방으로 비방송부서로 전출되었다. 보직간부나 해설위원의 배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마치 일본의 NHK가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뒤 상업방송의 전성기를 보내고 일본 방송이 저널리즘을 상실한 채 외면 받는 전철을 우리가 밟아가고 있는 셈이다.

반대급부로 방송에서는 비즈니스에 치중하는 경향이 급격히 심해지고 있다. 글로벌화와 콘텐츠 수출, 수익의 창출이 강조되면서 방송사는 기업적 영역을 강화하고 있다. 기업은 지속적으로 수익이 큰 품목을 개발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규제를 완화해 시장을 지배하는 속성을 갖는다. 지상파 방송도 이에 따라 수신료 인상 로비, 미디어렙 독자 운영, 연예오락 서바이벌 게임의 양산, 막장 드라마에의 몰입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비판적 저널리즘은 한류콘텐츠로 팔기도 어렵고 광고수익도 나지 않으니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이명박 정권 하에서의 방송

이명박 정부 들어 위의 것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정책이“종합편성 채널”이다. 2000년 통합 방송법에 의해 길이 열렸던 종합편성채널은 방송의 다양성과 광고시장의 한계로 인해 사문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감지한 대형신문들은 방송진출에 사활을 걸고 매달려 현 정부에 의해 신문방송 겸영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1~2개를 겨우 소화해 낼 수 있다는 시장분석을 도외시하고 한꺼번에 4개의 대형 종합편성채널을 허가해 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미디어계는 다시 격변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미디어 광고시장은 줄잡아 (종합편성채널을 허가할 무렵) 7조원을 약간 상회하는 규모였다. 이 가운데 지상파 TV·라디오가 2조2천억, 신문·잡지 2조, 인터넷 1조5천억, 케이블과 뉴미디어 1조원 규모 등이다. 이 가운데 인터넷과 뉴미디어가 해마다 10% 이상의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다른 매체들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종편 4개 채널이 허가됨으로써 새로이 요구되는 광고수요만 연간 5천억 이상의 규모로 조달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종편채널은 3~4천억 원에 이르는 자본금을 2~3년 안에 완전히 잠식하고 도태의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다. 최근 빚어진 미국과 유럽의 재정위기로 인해 이같은 어두운 전망은 현실로 굳어졌다(현재 우리나라 광고시장 규모는 9조5천억 원 규모, 종편채널 연간 3천억 수준).

결국 신문들은 기사화된 광고, 광고화된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약탈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약탈적인 마케팅이 방송계로도 옮겨져 시장과 저널리즘을 황폐화시킬 것이 자명한 현실이다. 특히 종편채널을 허가받은 4개 신문사가 지금껏 건강한 보수를 넘어 수구적 이념을 고수해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4개의 종편채널이 기득권층의 수구적 행태를 옹호하고 지지한다면 방송에서의 공공성이 무너지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지금보다 더 후퇴하게 된다. 또 방송이 사회의 건전한 여론 형성 기능을 저버리고 자본의 논리와 힘에 종속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폐해를 예방하고 보완할 자정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방송은 형식상으로나마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이라는 가치를 지켜왔다. 반면 신문들은 정치권력 창출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왔다. 이로 인해 보수대형신문들의 방송참여는 방송저널리즘의 전통적 가치인 정치적 중립성과 공공성 확보, 권력에 대한 감시 기능을 퇴보시킬 것이다. 최근 방송사 사장들의 정치적 편향까지 맞물리며 사실상 민주주의 자체가 퇴보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2012년 대선으로 이어지며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이들 신문과 권력에 장악된 방송이 국가안보를 상품화해 과거의 냉전이데올로기를 되살려 낼 경우 우리 사회는 다시 이념대립의 극한으로 빠져들 우려도 있다.

지금껏 드러난 신문시장의 약세와 신문의 방송겸영, 이를 위한 권력과의 유착, 생존을 위한 보수화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간략히 정리해 보자.

첫째,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실패에 대해 신문방송을 통한 여론형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진보적 신문과 인터넷 매체 일부가 문제 제기를 해오고 있지만 여론형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조·중·동과 매경은‘신자유주의의 폐해와 함정’에 대해 지난 10년 간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고 분석되고 있다.

둘째, 이명박 정부조차도 정책을 수정해 신자유주의의 범람에 따른 사회적 위험을 해소시키려하지만 보수언론들은 외면하고 있다. 공적인 의제 설정보다 사적인 의제 설정에 더욱 골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종편채널 선정 이후 조·중·동이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기사는 조선 20건, 동아 20건, 중앙 13건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한겨레는 133건, 경향은 172건이다.

대기업과 부유층의 투자와 소비를 진작시키면 그 혜택이 중산층 이하로 연계되리라는 낙수효과에 대한 논란과 비판도 생략되어 있다. 낙수효과 자체를 언급치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종편채널 선정 이후 조선일보는 1건, 동아일보 2건, 중앙일보는 0이고 한겨레는 15건, 경향은 13건이다. 이는 사회적 의제나 논쟁으로 제시되는 걸 회피한 채 관련 정책을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만 홍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권의 비호 아래 종합편성채널이 방송에 진출하고 저널리즘을 퇴보시킬 경우 이를 견제할 방법은 언론계 내부의 조직적 저항과 시민사회세력의 감시견제 뿐이다. 시민사회세력은 구독거부, 시청거부와 스폰서 기업 불매운동 등으로 맞설 수 있으나 이 운동의 정치적 성격과 한계를 구분 짓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압박을 통해 정치권과 대기업군을 움직임으로써 불합리한 제도를 보완해나가는 방법이 최선의 길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방송이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손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장 임명절차의 구조적 결함을 개선하기 위한 시민적 합의와 운동이 필요하다. 사장 추천 절차 및 이사회 구성, 경영과 방송의 분리, 자율성 확보 장치의 보완 등이다. 방송학계의 편향성도 지적될 일이다. 관료와 방송통신위원회는 물론이고 방송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의 비판적 견제가 개혁과 균형을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비판적 연구와 토론도 필요하다.

5. 신자유주의 시대의 언론과 과제

1)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존

이제는 열심히 땀 흘리면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열심히 일하는 국민과 나라가 잘 사는 시대도 아니다. 강대국 중심의 자유무역체제로 지구 시장에 대한 독과점이 형성되어 있다. 수출이 중시되고 현지 공장이 늘어나고 기업의 해외지분이 커지며 수출을 해도 국민경제가 시원하게 살아나지 못하고 국민 몫으로 돌아오는 건 적어진다. 산업이 국제자본에 의해 유린된 상태에서 잉여이익은 해외로 강대국으로 유출된다. 세계화를 맞아들이기 위한 경제제도, 인적자원, 사회적 규범 없이 빗장이 풀려 버렸다. 시장경쟁은 제로섬 게임이다. 상대를 제물로 삼아 생존하고 전진한다.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붕괴된다. 공공예산, 공공투자가 외면당하고 국가도 수익 위주로 변한다. 철도 민영화, 폐수처리 민영화, 가스 민영화, 전력 민영화 등등 …, 중소국가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다국적 기업들이 뛰어들어 국가를 침식해 삼킨다.

정부의 투자도 빠른 성과를 따진다. 경제 살리기 예산이 사회적 기업과 일하는 복지보다 4대강으로 가는 이유도 속도와 성과 때문이다. 심지어 언론과 NGO도 대학도 생존에 급급해 본분을 잃어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인식과 판단은 혼란스럽다.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정치는 오로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고 경제는 다음 분기 이익을 걱정하고 경제학자들은 자기네 파의 이론만 주장한다. 기술자들은 역사와 자신들이 무관하다 여기고 언론은 얄팍하게 떠들며, 종교는 천박하다. 점점 더 나빠지는 세상에 대해 넓은 인식과 장기적 관점, 정직한 균형을 갖추는 것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사고와 계획의 기본이 장기적이고 책임감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사회 인프라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 교통체계, 상하수도망, 물류시스템, 전력공급 등만 인프라가 아니고 물, 대기, 토양, 해양, 농협, 수협, 새마을 운동, 4H 등도 인프라이다.

이런 공동재산은 중앙정부와 기업이 성공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 때문에 지역별로 자체 계획을 갖고 행정력과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결합시켜 피드백 장치를 통해 신중하고 유연하게 운영했어야 한다. 이른바 거버넌스의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를 집어 삼키는 가장 큰 적은 지난 시대에는 자본주의의 모순이었다. 이제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속도와 국제규약을 얹은 신자유주의의 범람이다. 막아낼 수 있는 길이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기본은 국내 산업의 보호(부자는 민족적으로 마구 쓰고 가난한 자는 아껴야 해)와 공동체의 회복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극대화시키며 이웃을 없애는 행동양식이다. 작은 공동체를 살려내야 하고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도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

국가가 시행하면 공동선이라는 관념은 고쳐야 한다. 국가는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만 따진다. 총매출만 따지는 셈이다. 수단이 좋든 나쁘든 고루 나눠지든 1%의 것이 되든 따지지 않는다. 이것에 시대정신과 국민들의 사고가 전염되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정의만으로 불가능하다. 공정 사회는 룰을 지키며 룰에 의해 운용된다. 정의 사회는 룰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능력에 의해 기울 수밖에 없는 걸 조정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정의사회만으로도 힘들다. 사회적 강제조정 없이도 스스로 정의를 위해 내놓고 덜어놓는 사회가 이뤄져야 한다. 이것을 의로운 사회라 불러야 할까? 율법에 의한 해방과 사랑의 계명에 의한 구원이 다른 것도 그런 것일 듯싶다. 필요한 건 정의에 대한 진지함과 이해 및 관용이다. 언론도 교회도 공동체를 살리고 정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이해와 관용을 선도해 가야 할 상황이다.

치열한 경쟁과 낙오와 분노의 시대에 즈음해 갈등이 반목과 대립으로 번지지 않게 할 책임이 중요하다. 우리를 집어 삼키는 가장 큰 적은 지난 시대에는 자본주의의 모순, 이번엔 거기에 속도와 국제규약을 얹은 신자유주의의 범람이다. 막아낼 수 있는 길이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국내 산업의 보호(부자는 민족적으로 마구 쓰고 가난한 자는 아껴야 해)와 공동체의 회복이 핵심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극대화시키며 이웃을 없애는 방식이므로 작은 공동체를 살려내야 하고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도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

국가가 시행하면 공동선이라는 관념도 고쳐야 한다. 국가가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만 따지고 있다. 총매출만 따지는 것이다. 수단이 좋든 나쁘든 고루 나눠지든 불평등해 1%의 것이 되든 따지지 않는다. 이것에 시대정신과 국민들의 사고가 전염되었고 교회 또한 전염돼 있다. 이 헛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공화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2)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우리가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따지자면 여러 가지이다.

진보주의라는 길도 있고, 보수주의라는 길도 있고,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길이 있다. 이런 길의 이름 뒤에는 영어로 '~ism'이라는 꼬리가 붙는다. 진보주의(Progressivism), 보수주의(Conservatism), 자유주의(Liberalism), 사회주의(Socialism)… 우리는 큰 틀로서 자유주의를 택했다. 그 안에서 정책들을 놓고 진보주의냐 보수주의냐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던 것이다.

그럼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ism'이 아니고 '~cracy'이다. '데모크라시즘(Democrism)'이 아니라 데모크라시(Democracy)이다. 민주주의는 이념체계가 아니라 이념을 현실 속에서 실행하는 작동방식이다. 컴퓨터 운영체제 도스(dos), 윈도(window)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cracy'는 '정치체제', '정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귀족정치(Aristocracy), 독재정치( Autocracy), 관료정치(Bureaucracy), 민주정치(Democracy, Demo).

지금 우리의 정치체제가 정말 데모크라시(Democracy)인가? 국민대중이 그 뜻대로 이끌어 가는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혹시 엘리토크라시(Elitocracy)는 아닌가? 정치 엘리트들이 국민 대중을 섬기는 척 하며 표를 얻어낸 뒤 자기들 세상인양 꾸려나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그러니 좋은 대통령, 시장,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 대중이 정치 엘리트들에게 휘둘리며 속으며 끌려 다니지 않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정치주권 확립과 그 주권의 행사이다. 우리 언론은 그래서 유권자 국민에게 투표소에 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라고 캠페인을 벌인다. 여기까지가 전부라고 여기는데서 흔히 과오가 발생한다. 민주정치는 투표참여가 아니라 정치참여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시민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라고 권면해야 하며 정치 참여를 높일 수 있는 뉴스와 정보들을 세심하게 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어제 오늘의 거의 모든 정치 뉴스는 정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기자가 얻어 듣고 시민에게 전한다. 그 과정에 시민의 주권이나 주권행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정치인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정치 뉴스라는 생각도 위험하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은 정치가 아니라 지배일 경우가 허다하다. 저널리스트로서 지배와 정치, 민주정치와 과두정치화 한 현실 정치를 명확히 분간해 판단치 않고 기계적으로 정치 기사를 쓴다면, 선거 취재에 뛰어든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어두워진다.

왜 국민에게 정치를 권하지 않는가? 왜 국민을 정치게임 내지는 선거레이스의 관중으로만 묶어두려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민주정치는 국민이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고루 나누는 것이다. 국민의 정치적 권력이 교묘히 박탈당해 온 시대의 왜곡을 언론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언론, 바로 우리 자신이 기성 정치권력과 함께 투표장에 가면 그걸로 할 만큼 한 거라며 국민들을 오도한 책임이 크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이제 언론은 시민의 편에 서야 한다. 그 첫 걸음은 언론이 정치 관련 소식을 공정하고 바르게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한 냉엄한 자기평가와 반성에서 시작될 것이다.

3) 민주공화국민의 새 출발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공화국의 의미는 크게 따져 보지 않는다. 공화주의(共和主義)란 일반적으로 군주 독재에 반하는 인민주권(人民主權)에 의한 정치형태를 이른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국민(國民)을 더 이상 백성(百姓)으로 여기지 않는다. 군주가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도 백성일 때와는 달라진다. 무분별한 자유(自由)와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개인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 공화국에서의 국민은 사회공동체에 참여할 책임을 지닌 자주(自主)적 공민(公民)이다.

그렇게 公民으로 바로 선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필요한 정체제도를 구비하면 민주주의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에 담긴 의미는 이러하다.

인민주권의 정치란 어려운 말이 아니다. 국민이 합의한 공공질서가 있고 공정한 룰이 통하면 된다. 어떤 계급에 의해 다른 계급이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으면 된다. 최근 10여 년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다투어 왔다. 누구든 곁에 오면 진보인지 보수인지 확인을 하고 자신과 다르면 상대하지 않고 같으면 선명성을 요구한다. 진보는 진보다워야 하고 보수는 보수다워야 한다고 압박한다.

진보는 모든 사안에 반미여야 하고, 개방 반대여야 하고, 반 새누리당이어야 하고, 반 TK여야 한다. 이에 맞서 보수는 보편적 복지를 싫어해야 하고 북한주민의 인권과 탈북자만 용납할 뿐 그 어떤 대화도 타협도 있어선 안 된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야 설명이 되지만 꼭, 항상 그래야 할 것은 아니다. 더 황당한 것은 보수면 4대강을 찬성하는 것이 마땅하고 진보면 무상복지면 뭐든 추진하자고 해야 옳은 듯 여기는 것이다. 어정쩡한 듯 보이면 회색분자가 된다.

그건 아니다. 공화국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갖되 공공을 위해 관용의 원칙도 함께 지녀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을 요구하면서 스스로가 불통과 무작정 편 가르기에 나서는 것은 피해야 한다.

무작정 성장이 암세포의 논리이듯 무작정 내 편이 옳다 역시 공공을 해치는 논리이다. 시민이 공공의 책임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면 민주주의는 성큼 다가온다. 공화국은 바로 선다. 이것이 돈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놓고 99%를 낙오시키는 신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열쇠이다. 무한경쟁, 자주적 산업기반의 붕괴, 극심한 양극화의 시대에 맞설 수 있는 유이한 무기는 깨어 있는 자주적 시민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단단한 지역 공동체 뿐이다. 그 어떤 정책도 이 두 가지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제 효과를 낼 수 없고 오래 버틸 수 없다.

올해 치르는 선거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도 지역주의도 엘리트 정치문화도 뛰어 넘어야 한다. 도움닫기를 할 새로운 가치질서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공화주의적 가치와 그것에 대한 확고한 인식 및 신념이다.

공화주의적 가치란 모두가 자발적이고 자주적이되 공공의 질서를 갖추는 것이다. 결코 불가능하지 않고 이미 우리는 여러 차례 이루어 냈다. 근대사 속에서 첫 번째 예는 1980년 광주이다. 군사정권의 폭압적인 진압과 위협 앞에서 시민들은 무장과 군수보급, 질서 유지, 대표회의 구성, 항전과 수습을 놀랍도록 침착하고 평온하게 이어갔다. 1987년 민주화 운동 때도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모두가 민주질서를 지켜 대통령 직선제 등 새로운 정치체제를 이끌어 냈다. 1997년 IMF 환란 위기 때의 금 모으기도 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운동 때도,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2011년 희망버스에서도 우리는 민주공화국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위에 예를 든 현장 중 어떤 것은 정파적으로 나뉘기도 했지만 정파가 다르다 해서 참가하겠다는 그 누구를 내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공화주의적 가치는 이념과 정파적으로 내 편만 챙기는 분파주의가 아니다. 모두를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함께 누리는 자유를 목표로 해 나아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적극적 참여와 연대이다. 그것은 서로가 자신의 자유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모두에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적극적인 의지와 참여이다. 이것이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민족의 역량을 가로 막아 온 것이 지역주의이고 중앙집권적 엘리트 정파 정치였다. 국민들은 화합하고 결속했다가도 이런 장애요소로 인해 좌절하고 흩어졌다.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지역주의 엘리트주의의 큰 불을 더 큰 불로 끌 수 있다. 공화주의를 가로 막는 것이 있다면 더욱 강한 공화주의로 넘어서면 된다.

6. 21세기의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

이제 저널리스트는 소속 언론사에 의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대중의 눈을 통해 감별되고 대중의 갈구에 의해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을 중심에 둔 언론이 인간에 의해 선택될 것, 이익을 중심에 둔 언론은 이익을 밝히는 인간들이 선택할 것이다.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고 관점들의 타당함과 비중을 살피고 독자의 판단을 도와야 한다. 이것은 개혁과 진보의 입장에 서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진리도 때로는 시대적 트렌드이다. 개혁이나 진보가 아닌 공익과 시대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저널리스트의 관점이 된다.

개인적인 관점과 감정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점과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관점과 감정으로 도전하고 공격한다. 특히 이미 권위로 자리 잡은 특권과 신성불가침 영역에 덤비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 자본주의, 진보주의, 보수정치권, 수구기득권 세력, 군산복합체 등이 그것이다.

더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주목하지 않으면 언론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사회운동이 해결책을 내놓는 게 아니라 더 강한 공동체가 해결의 열쇠이고 시민사회운동은 더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를 존속시키는 기반이 될 것이다.

좋은 저널리즘은 품격과 권위, 존재의 목적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좋은 저널리즘의 기사는 세상에 대한 관점과 이해, 세상 일에 대한 의미나 원인, 대안과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추악한 비리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도 설명하고, 거기에 사회가 뭘 놓치고 있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를 넘어서야 한다.

해결책과 대안에 보다 더 집중해 궁구하고 추적해 제시해야 한다. 찾아내려면 골치 아프다. 그러나 공부가 된다. 대안을 적어 보겠다고 뒤지고 고민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더 배우는 것과 같다.

더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주목하지 않으면 지역 언론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사회운동이 해결책을 직접 내놓는 것만 방법이 아니다. 더 강한 공동체가 해결의 열쇠이고 시민사회운동은 더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를 존속시키는 기반이 될 것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5호] 2012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