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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9호] 장공의 글 - “시련과 유혹” - 교회성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7-05 15:13
조회
633

[제9호] 장공의 글

“시련과 유혹” - 교회성
(야고보서 1:12-15)

長空 김재준 목사

마태복음 16장 13~20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만족하셨습니다.“이런 신앙고백은 네 생각이나 어느 인간들의 생각에서 난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 네게 계시해 주심으로 네가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것이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너는‘반석’이라 내가 내 교회를 그 반석 위에 세울 것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준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였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예수가 구세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케리그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삼위일체 하느님이 나를 구원하신다고 믿는다면 개인으로는 그리스도 신자일 것이고 단체로는 그리스도 교회일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면 거기에 교회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교회가 현실화하지 못하는 것은 옛날 바리새인들이 하느님의 계율보다도 자기들이 만든 온갖 복잡한 해석을 앞세운 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교만하여 자기를 다른 인간들로부터 분리시켜 마침내 바리새 즉 분리된 자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교만 때문에 자기들이 기대하던“그리스도”를 자기들 손으로 괴롭히고 고발하고 거짓 증거하여 사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민중과 제사장과 집권자와 외국인을 설득하여 그리스도 살해의 동조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의를 위한 동조자들이 아니라, 분리시키는데 이용하기 위하여 자기들 편으로 유혹하여 악에 한 패거리가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나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 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에 물탄 것 같이 하나 되기는 어렵습니다. 형제우애(兄弟友愛)는 동기지친(同氣之親)이라 하여도, 분가해 살다가 다시 올망졸망 각기 제 식구를 데리고 다시 큰집에 들어와 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회의 하나 되는 방향은 연합된 지체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러기위에 사전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 전장에 나가면“시련”에 견디지 못합니다.“적”의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면 원칙적인 훈련은 무엇일까요?

1. 우리 자신들이 확고하게“서”야 합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 주전 72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유다왕 아하스에게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네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하리라”한 것은 지금도 진리입니다. 아하스왕은 겁을 먹고 바벨론에 구원을 청하려 했습니다. 애굽에도 추파를 보냅니다. 이사야는 왕에게 말합니다.“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란, 타다 남은 부지깽이 정도의, 보잘 것 없는 나라들인데 비하여 예루살렘은 만군의 야웨가 좌정해 계신 성도(聖都)입니다. 역사와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인 살아계신“야웨”를 모신 성소입니다. 우리는 이 야웨 하느님을 믿고 모험합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가 평온무사할 때에 하느님을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절대절명의 위기가 왔을 때 신앙으로 모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개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됩니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의 역사는 위기에 당면해 있다고 봅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 때, 여러 가지 국제관계로 이스라엘은 갑작스러운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치 일락(逸樂)하고 뇌물과 부정으로 사회를 썩게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스라엘의 그때 경우와 비슷합니다.

“독립”이라면서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집권자는 자기 기득권 강화와 보존과 장기화를 위하여 무한궤도적인 전략을 씁니다. 경제번영은 외채번영이라 하겠습니다. 통틀어 말해서 호세야가 말한“어리석은 비둘기”같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교회인은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 역사에 책임을 느낍니다. 그렇다면“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

“서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무엇을 반성하란 말입니까?

2. 교회주의에 대하여 반성할 것입니다. 교회는 존경합니다만“교회주의”는 삼가야 합니다.“교회를 위한 교회”는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교회지상주의”는 악과 타협하면서, 다시 말해서 악마에게 절하고서 천하를 얻으려는“유혹”입니다.“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주님은 호통 치셨습니다.

3. 교회와 사회관계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사회는 더럽다. 교회는 젊잖고 사회는 난잡하다. 교회는 영생의 기관인데 사회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다.…등. 이분논리를 지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교회 바깥세계,“교회”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세계를“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하느님은‘세상’을 사랑하시되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고 사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아들까지 희생했다면,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도“하느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학대하는 것은 하느님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하느님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것은 어떤 특정 인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사람이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하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훌륭한 인간만이“인간”이랄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인간이 인간이기에 인간이지, 인간이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피부 빛이 검든, 희든, 노랗든, 붉으스레하든, 문화가 미개하든 문명이 발달되었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힘이 세든, 약하든, 지식이 높든, 낮든, 모두 똑같이“인간”이고“하느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차별을 배격합니다. 그 인간이 죄인일수록 더욱 우리는 안타깝게 그의“하느님 형상”회복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중산층 인사(中産層 人士)에만 치중하고 사회밑바닥 인사들에게는 등한시하든지, 손이 미치지 못합니다. 교회는 적어도 이 밑바닥 사람들과 중산층 인사와의 친교와 사랑의 통로 구실은 해야 합니다. 지금의“전도”는 개인전도만으로 만족할 것이 못됩니다. 모든 것이 기관화했기 때문에 인간도 기관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개인입니다. 이 기관과 개인과의 실생활 모순을 융화하기 위해서는 기관자체의 그리스도교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회사에 사장이 크리스천이 된다면 그 사장을 통하여 그 기관의 관련자들이 크리스천으로 되기는 아주 순조롭습니다. 물론 그 사장이 그리스도 심정의 소유자여야 하겠지요, 이름만이 크리스천이고 심정은 탐욕적인 부패자본주의자 그대로라면 그의 크리스천 Title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반발과 치욕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군사정권 아래서도 어느 정도 번영을 이룩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일 것입니다만, 그것은“그럼에도 불구하고”이지“그러므로”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열매 없는 무화과로 될 때에는 오히려“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을 그리스도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Conform이 아니라 Transform이라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련도 있고 유혹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4. 시간의 문제입니다. 지금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전세계적으로 이분되어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강력주의입니다.“힘센 놈이 정의다”하는 것입니다. T.V.에서 본대로 남북의 평화통일이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폭력혁명주의요, 무윤리“무한전술”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것이 공산혁명을 위한 수단에 불가합니다. 해방전후, 김규식․김구․조소항․엄항섭 등 원로급 독립운동자들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이북으로 갈 때에 이승만 박사는 아주 냉담했었습니다.“그 분들이 공산당이 무엇인줄 몰라서 그래! 공산당과 협상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이쪽의 망상으로 끝나는거야!”했었는데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5. 남한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남한에서는“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자유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한다”하고 당연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인지, 군사독재인지, 폭력제일주의인지, 정상적인 법치국가인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민심이 불안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 희박하게 됩니다.“누구를 위한 충성이냐?”,“우리가 뽑은 대통령이냐?”,“진짜 국민으로 말미암은 국민의 정부냐?”모두 석연치 않습니다. 남한에서도 원점(原點)에서부터 새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서와 같이 공산주의는 붉은 용입니다. 말하자면 시뻘건 구렁이입니다. 그렇다고 남한에서도 푸른 구렁이 노릇한다면 해결보다도 서로 물고 먹어 피차 멸망하는 쌍두사(雙頭蛇)의 운명을 더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3의 제안은 무엇이냐? 폭력전쟁이 아니라, 호의(好意)에 의한 협상입니다. 그것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끈덕지게 참고 한 차원 높은데서 두 편을 함께 관조하며 결렬을 피할 것입니다. 이북에서 군대 분열식과 전투연습광경을 이남대표들에게 자랑한다면,

“군대훈련 참 잘하셨습니다.”

“누구하고 싸우시려는 것인지요?”

이 정도의 농담으로 야유나 하고 끝까지 구경하는 것이 경망스럽게 퇴장하는 것보다 더 어른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북이 6.25남침을 재현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1. 이북의 실정을 알아야 합니다. “쇼 윈도”(show window)만 보고 온 사람의 말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북을 아는데 있어서도 소위 소수집권“귀족”층보다도 진짜“인민”(People)의 실정을 알아야합니다. 강제노동소를 알아야합니다.

2. 그들 즉 People은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순진한 우리 동족입니다. 그들도 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유를 갈망합니다. 어떻게 하지 못해 하라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제3국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적어도 서독과 동독간의 교류처럼 가능케 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아하스왕에게 충고한대로“네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하리라”한 말씀이 하느님께서 우리 크리스천에게 분부하시는 말씀임을 믿고 일어서서 점호를 받을 용기를 보여야 합니다. 선다는 것은 주체성 확립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일본민족에게 배워야 하겠습니다.

4. 북한선교를 위하여 다음세대에 적용될 그리스도교를 마련해야 합니다. “선교”는 선교할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북한은 기독교선교가 기대되는“황무지”입니다. 종교는 완전히 박멸되었습니다. 뿌리까지 뽑힌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나타난“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하에 숨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가 오며는 일순간에 산하와 들판이 푸른 생명으로 덮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만의 업적이 아니고, 그 뿌리 되는 생명이 하늘에서 내려꽂힌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세대에 적용될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가톨릭은 로마 귀족사회의 종교였습니다. 루터의 개혁교회는 상공계급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말하자면 중상층의 종교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다수의 인간이 노무자, 농민, 학생, 세속주의자들입니다. 그런 계층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누룩이 되기 전에는“선교”의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이미지”에도 그런 것이 돋보입니다. 크리스천도 그“이미지”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반공”을 국시로 한다지만, 공산주의를 낳는 모체는 탐욕적인 부패자본주의였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건실하게 하려면 탐욕적 부패자본주의를 그 원점에서부터 그리스도 이미지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위하여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위하여
아는 자는 모르는 자를 위하여
집권자는 권력없는 자를 위하여
변호인은 억울한 사람을 위하여

오직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길이며 크리스천의 사회관심이며 교회의 대사회적 이웃사랑입니다.

5. 이런 큰 일은 혼자서 다 해낼 수 없습니다. 다 합하여 한 공동체로 일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원초적인 교회일치를 강조함으로, 한 몸이 되어 교회“안”일만이 아니라,“세상”을 상대로 연합전선을 강화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소한 거리낌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마음을 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작은 선이라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외향적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로 먼저 가는 것입니다. 가령 믿지 않는 분이 상사를 당했다면 목사 또는 신자가 제일 먼저 가서 위로의 말씀을 한마디 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화재가 났다면 제일 먼저 신자된 분이 찾아가 위로하고 흩어진 것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난 집에도 교회에서 먼저 가 보는 것입니다. 교인 건사하기도 바쁜데 언제 불신자까지 손을 대느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심정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것이 참 목자의 심정입니다. 집에 있는 살림살이꾼인 맏아들보다도 탕자인 둘째아들의 귀환이 더 기다려지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이것을 확대하여 남북통일문제에까지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 각 교단이 총연합하여 한 공통과제를 놓고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임과 동시에 세계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정권자가 맘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에 정부는 국가지상주의를 내세우고 국가자체를 종교화하여 그것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강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최근 단군교를 국가의 호국종교로 특정하여 전국민에게 강요하려는 기운이 태동하고 있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단군시대의 놀라운 문화와 광대한 통치구역과 그 종교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사학자와 역사학도의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존경하는 것이요, 세계적인 산종교로 숭배할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정부에서 그것을 국교화한다든지 호국종교로서 특권을 부여한다든지 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종교자유, 신앙자유”를 짓밟는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신사참배 강요의 전철을 밟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우상숭배”이고 우상은 파괴되어야 할 운명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신교단에서는 대사회관심과 행사에 있어서 일치단결해야 합니다.

교회의 싸움대상은 공중에 권세 잡은 악광(惡廣)적 세력이요, 신자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Divied and Rule의 재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통일문제도 있고 남한 민주화 문제도 있고
독과점 경제체제와 노사대립문제도 있고
국제정치적인 종속성 문제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사회책임 문제는 심각합니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조금이라도 성의 있게 지키려는 우리 교회가 서로 옥신각신할 여가는 없습니다. 다 합하여 악에 항거하고 선으로 승리합시다.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영생하는 부활이 따릅니다. 이 주먹만한 반도에서 그것도 남쪽절반 밖에 안되는 고장에서 권세를 부리면 얼마나 부리겠습니까. 좀스러운 싸움보다도 전우주 사랑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전위부대로서의 그리스도의 싸움에 진군합시다. 그 전진에 방해되고 걸리는 돌멩이들은 밟고 넘든지 건너뛰든지, 불도저로 밀든지 할 것입니다.

“높은 것은 허물어 내리고 낮은 골짜기는 메우고
구부러진 오솔길은 곧고 넓은 큰길로 닦아
주님 오시는 길이 평탄케 하라.”

교회는 하나 되어 그것을 할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2~15절)

〔이 글은 金在俊全集(18권)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글로서 1985년 8월 29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전국교역자 총연합집회’로 진행되었던 김재준 목사님의 개회설교문이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성경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였고, 문단과 단어와 문장부호는 가급적이면 그대로 사용하고 한문은 한글로 풀었으나 의미전달을 위해 불가피하게 의미전달에 필요한 한문은()처리를 했고, 문장도 현재 맞춤법에 의거하여 수정된 곳도 있음을 밝혀둔다.-편집자주.〕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9호] 2009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