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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6호] 장공에게서 온 편지 / 김경재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8:33
조회
694
[제26호] 장공에게서 온 편지

아래 편지는 1983년 봄, 캐나다에 계시던 장공 선생님이 김경재 교수에게 보낸 사신입니다. 그 내용 중 특히 편지 말미에 한신 신학교육 정신이 지켜야할 점과 모든 장공 제자들이 항상 갖추어야 할 맘의 자세를 자상하게 일러주시는 스승님의 맘이 나타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하여 소장자가 편집실에 보낸 것입니다. 장공선생님의 편지 그대로 싣되, 한문표현은 괄호에 넣었습니다. -편집실

1983.4.21. Toronto에서

사랑하는 김경재 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편지가 심부心腑에 사무칩니다. 훈장訓長 노릇하던 사람은 자기 마음 깊은 데를 알아주는 후배後輩를 갖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맹자孟子가 “득천하영재이교육지삼락得天下之英才而敎育之三樂”이라고 한 것도 그 후배가 맹자의 심정과 포부를 알아줄 거라는 데서 온 ‘낙樂’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자주 편지는 못 보냈소마는, 편지가 제대로 가는지도 믿기 어렵고, 이번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내신 편지도 부친 날짜는 83년 2월 26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배달되기는 4월 20일이었으니 약 두 달 동안에 온 셈입니다. 물론 그 동안에 토론토에 우편배달인들 파업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편지들은 곧잘 왔었습니다.

내가 경재 교수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국은 유럽과 달라서 ‘크리스텐돔Christendom’이 아니고 복수종교複數宗敎의 나라기 때문에 그 다채로운 재래종교의 누천년累千年 묵은 토양土壤을 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종교 자체 내에 농성한 사람으로서는 자기종교의 편중偏重 때문에 학적學的으로 공정公正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세계의 빛”이라는 것이 공인公認되는 오늘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측광側光 없이 세계의 학學으로 등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감리교 신학교에서 연세대로 옮겨가신 유동식 교수의 ‘샤머니즘’ 연구도 샤머니즘 통속에 칩거蟄居한 ‘학學’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만, 최근 삼민신서 제7로 펴낸 『광야에 외치는 소리』졸문拙文 (미발표, 서울에 남긴 잔고殘稿들과 그 중에 단문들 중에는 기旣 발표분도 많습니다만) 권미卷尾에 부친 유동식 박사의 ‘장공론長空論’은 맹자의 소위 “타인지심여촌탁지他人之心如忖度之”라는 감感이 들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지우志友가 있구나 하는 심경心境이 되어 흐뭇했습니다.

수유리 캠퍼스를 팔아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지 오랩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역사에서는 ‘지연地緣’이란 게 거의 기초역할基礎役割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석회암 고원인 예루살렘을 그렇게까지 끔직스레 보존하려는 정열情熱은 이해타산이나 이성적인 것을 넘어선 ‘종교적’인 광신狂信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광신’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닌 ‘다윗의 별’의 침략욕, 정복욕을 ‘종교화’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남북관계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하겠습니다.

경재 교수가 유럽을 한번 보고 오셨다는 것은 경하慶賀할 일입니다. 보면서 알고 보고서 생각하는 것이 산 지식, 산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범기凡記’(범용기) 제2권, 경재교수 관계기록은 정정訂正해야 하겠지요. 거기서 혹 간행한다면 ‘정오표’를 권말에 부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범기’는 1, 2, 3, 4권이 나오고 5, 6권이 인쇄소에서 인쇄 중입니다. 제3권에도 ‘정오표’가 붙었습니다.

한신대가 대학원으로 신학전공神學專攻이 되고 학생 정원도 늘고, 오산의 한신대학 철학과, 영문과 등을 졸업한 분들이 수유리에서 수도修道하시게 되면 참으로 잘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백제百濟의 ‘계백장군階伯將軍의 혼魂’이 살아 분화구를 치솟아야 하겠지요. 아니, 계백階伯을 끌어올 필요도 없겠지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산 혼魂이 우리 ‘혼’이 되면 그만일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의 예수상이 생활신학生活神學으로 되면 걱정할 것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요要는 양量의 부피보다도 질質의 충실充實입니다. 알맹이 없는, 또는 알 속이 썩어서 재생력 없는 ‘겨 깍대기’ 산출장産出場이 될까 늘 명심하고 ‘나’ 자신의 ‘무無’와 ‘허虛’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합시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6호] 2016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