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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1호] 기념강연회 - 장공사상의 적합성 / 한완상 박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09:32
조회
1050

[제21호] 기념강연회

장공사상의 적합성 -오늘의 위기와 ‘장공애(長空愛)’의 힘

한완상
(전 교육부 총리)



1. 공공성의 위기 상황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소천하신지 벌써 27년이 지났습니다. 거의 한 세대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의 삶의 향기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현실 속에서 그윽하게 남아있습니다. 그의 사상, 그의 신학적 상상력과 성빈했던 삶, 그리고 그의 치열했던 ‘역사변혁에의 헌신’은 오늘에 와서 더욱 절박하게 요청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삶 자체가 의미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오늘 한국의 위기 상황에서 그의 삶과 사상이 절실한 적합성(Relevance)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오늘의 위기를 잠시 일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2008년 뉴욕의 금융시장 위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의 끝없는 탐욕, 그 몰도덕의 모습을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의 시장의 ‘갑’과 99%의 ‘을’간의 심 각한 불평등은 시장의 공공성이 위험스럽게 훼손되었음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같은 자본주 의 시장의 위기를 목도하면서 시장의 적자(適者)들의 추악한 탐욕을 정의롭게 규제하지 못한 국가의 무능을 또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질병처럼 번지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국가와 시장의 공공성은 심각한 위기 상태라 할만큼 낮 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표준(標準)세력은 비표준(標準)세력을, 적자(適者)는 비적자(非適者)를, 주류(主流)는 비주류(非主流)를 더욱 여러모로 옥죄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고통은 부당하게 증가하게 되지요. 그래서 ‘월가를 점령하자’는 민중적 요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 러한 위기상황에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비판들이 터져 나옵니다.

“과연 경제적 부(富)가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가?”

“99%의 비적자들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가 과연 민주국가인가?”

이 같은 질문은 사회과학적 질문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철학과 윤리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여름 프란시스 교황이 방한하여 던진 메시지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엄청난 부(富) 바로 곁에, 적빈(赤貧)이 소리 없이 자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종교인들이 빈곤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자본주의 탐욕과 결탁한 교회를 나무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심각한 구조적 양극화는 정치사회문제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신학적 문제이며 교회의 과제이며 종교의 주요문제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국가의 총체적 무능과 시장의 처절한 탐욕을 목도했습니다. 세월호가 구조적으로 침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관피아의 탐욕과 부패 탓이지 요. 시장과 국가가 결탁하여 국민고통을 부당하게 증폭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들이 수개월간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와 함께 시커먼 죽음의 바다 밑바닥으로 삼백십여 명의 생명이 처참하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헌법 34조 6항이 명령하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임무를 국가는 전혀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 앞에서 뜻있는 모든 국민은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도대체 국가는 어디 있는가? 민주국 가는 어디 있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지요. 이 질문은 대형사고에 대한 관례적 질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고에 대한 효율성 차원에서 나온 한가한 기술적인 질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정당성의 문제요 바로 국가공공성의 문제입니다. 그 러기에 그것은 반드시 심각하게 다뤄야 할 총체적 문제입니다. 종교인이 반드시 관심 가져야 하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제기해야 하고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그 해답을 종교인들도 앞장서서 찾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세월호 참사를 역사분수령적 사건이라고 보고,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 지식인들이 반드시 치열하 게 다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가만히 기다리라는 지시에 충실하게 순종했던 청소년들이 몰살당한 것이지요. 창조적 모험적 교육을 무시해왔던 한국교육의 민낯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것은 교육이 가르치고(敎) 길러내야(育) 할 바람직한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표준 또는 교과서(Text)를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교육이 과연 민주시민, 민주지도자를 육성하는 교육인가를 새삼 묻게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교주 같은 권위로 쏟아내는 온갖 설교에 ‘아멘’과 ‘할렐루야’로 조건반사처럼 반응하도록 하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가만히 기다리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창조적 도전자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국가, 시장, 학교, 교회 모두가 세월호 참상에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에서 저는 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그의 신학과 신앙도 포함하여)이 가지는 시대적 적합성, 역사적 적절성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한신대 출신도 아닙니 다. 그리고 기독교장로회에 속해있지도 않습니다. 비록 대학 교정에서 장공에게 직접 가르침 을 받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만, 장공을 항상 저의 정신적, 신앙적, 사상적 멘토로 모셔 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삶에서 장공과의 조우(遭遇)가 가지는 사회적, 신앙적 의미를 증언하고 싶습니다. 80가까운 저의 삶에서 장공으로부터 깨달은 기쁨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 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비극적 한반도 상황에서 장공신학의 적합성을 보다 적절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의 우리 민족의 독특한 고통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억울한 고통이 있는 곳에 신학은 항상 적절하고 정당한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년이면 우리 민족은 분단 70년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맞게 됩니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너무나 부당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냈지요. 승리 직후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우리 국가를 병탄(倂呑)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신흥강대국 미국정부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습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36년간 우리민족은 국권상 실에 더하여 민족의 얼인 언어도, 가족의 성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일본제국의 신학과 종교 도 강요당했지요. 신사참배가 주는 종교적 탄압 또한 아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 쟁은 끝났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해방과 광복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게도 식민 지 시대에서 분단시대로 직행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38선이 그어진 진상은, 알고 보면 참으 로 어처구니없이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차 세계대전 후 살벌하게 펼쳐졌던 미ㆍ소간의 이념과 영토 다툼에서 우리 조국은 타율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억울한 것은 미ㆍ소간의 냉전 대결의 대리전으로 남, 북간의 살벌한 대립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1948년 남북 각기 국가체제를 갖추게 됨으로써 민족대립은 국가 간의 열전과 냉전으로 첨예화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수백만 명이 사살당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냉전체제가 강고해지면서 분단고착은 엄청난 민족고통을 제도화시켰습니다. 그 고통의 비용은 계산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정말 어이없게도 한국전쟁 발발로, 식민지배 주체였던 일본은 군수물자생산과 조달로 일거에 경제대국으로 치닫게 됩니 다. 정말 6·25 전쟁은 우리민족에게는 최악의 저주였지만, 일본에게는 기시 노부스케(지금 아 베 수상의 외조부)가 자랑했듯이, 일본의 신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도 따지 고 보면, 전범국 일본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징벌을 우리가 대신 받은 꼴입니다. 이런 부당하고 억울한 민족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믿는 한국 기독교의 지도층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분단 상황에서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요인에는 냉전근본주의가 굳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게도 냉전근본주의의 핵심에는 근본주의 신앙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친일세력과 반공주의 세력(냉전세력)간의 결탁이 한국교회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에 앞장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적극 찬성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에는 신랄하게 부정적 입니다. 20년만에 한일관계는 우방관계로 전환했고, 한ㆍ러 관계는 휴전 후 38년만에 적성국가 관계에서 우호관계로 전환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의 주적이었던 중국과는 39년 만에 우방 국가관계로 진화했습니다. 지금 중국은 세계 제2강국으로 부상되었고 한국과는 멀어질 수 없는 경제협력동반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동족인 북한만은 아직도 철천지원수로, 초전박살낼 주적으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이 같은 냉전근본주의적 증오가 기독교신자들 중에 더욱 불타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비정하고 비정상적인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공은 이 같은 불행한 민족사에서 태어나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억울한 고통을 누구보다도 온몸으로 겪었던 분입니다. 특히 그를 마녀사냥했던 세력이 바로 교권적 냉전주의자였고 그를 정치적으로 탄압했던 세력 역시 세속적 냉전 수구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같은 비극적 역사 속에서 장공의 신학과 신앙, 그 리고 그의 삶을 조명해보면서 그의 삶과 사상이 이 시대에 가지는 적합성을 확인하는 일은 뜻 깊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적합성 확인을 통해 우리는 예수복음의 본질적인 공공성, 그 감동성 그리고 그 변혁적 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장공과의 조우 : 내 삶에 던져 준 의미

먼저 청소년 방황자였던 저에게 장공은 어떤 의미, 어떤 적합성을 갖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전쟁과 함께 예민한 청소년기를 맞았습니다. 1950년대 초 전쟁이 주는 참상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미군 폭격으로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 피 해자 중에는 외사촌 자형도 있었지요. 달덩이 같은 자식 둘과 함께 아내가 폭격으로 죽자 저의 모친 앞에서 가슴 치며 몸부림치는 그의 처참한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 다. 이보다 더 슬펐던 것은 형 또래의 군인들이 국민방위군으로 징발되어 나갔다가 해골의 처참한 몰골로 귀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지요. 군 수뇌부의 부패와 부정으로 그들은 폐인이 되어 죽어가면서 귀향하였지요. 저는 전율했습니다. 전쟁이 빚어내는 이같이 고약한 ‘질병’들 을 고치는 일은 누가 맡게 되는가를 저는 심각하게 묻게 되었지요. 이런 질문은 대학진로를 앞두고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대구에서 기장계열의 교회 장로께서 운영하셨던 육영학사(育英學舍)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높은 뜻을 품고 있다고 판단되는 고등학생, 대학생, 신학생, 대학원생들이 기숙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김재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사에는 여러 책들이 있었는데, 《십자군》, 《야성》 같은 간행물과 『낙수(落穗)』 그리고 『낙수이후(落穗以後)』 같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낙수이후』를 읽게 되었는데 여기서 장공의 인품, 그의 사상, 그의 신학과 신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글을 통한 만남이었지만, 결코 그저그러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심각한 실존적 조우였습니다. 왜냐하면 벼락같은 충격을 조용하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도저히 만날 수도 없고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인 메시지가 거기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충격을 받고,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며 방황했던 청소 년에게 『낙수이후』의 메시지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잔잔하게 저의 가슴에 남아있기에 그때 받은 영감들을 잠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성서절대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대한 그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비판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까지 저는 성서는 절대 틀릴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확신했기에 장공의 ‘교리와 신앙’이란 글은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에는 원본이 없고 사본만 있다는 언명도, 그러기에 오류는 자연스럽다는 언명도 저를 경악시켰습니다. 그러나 한편 통쾌했습니다. 축자영감설은 인간을 존엄한 자유인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에도 위배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지요. 성서 저자들이 결코 녹음기 같은 기계가 아니라고 했지요. 하느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인격주체가 바로 나라는 깨달음은 ‘방황자’로 하여금 ‘그러면 그렇지’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했 지요. 당시 근본주의 신학의 거두에 대한 비평에서 그를 ‘경건(敬虔)한 기만(欺瞞)’이라고 일갈한 것을 읽고 무릎을 치기도 했지요.


장공은 이미 장로교 총회(1951년 5월, 35회 총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조선신학교는 총회직영신학교 인허가 취소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는 목회자로 나아가는 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장공은 드디어 제명처분 당했지요. 장공은 이 때 한신대는 아벨과 같이 억울하게 맞아죽었다고 항변하면서도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친히 변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호헌총회를 열어 기독교장로회(통칭 기장)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수교단과 교권주의자들의 낙인찍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방황자 청소년은 지금도 그때를 기억합니다. 장공에게 ‘신신학자’요, ‘성경 파괴자’요, ‘인본주의자’요,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당한 그의 대응은 또한 방황자에게 의미있는 새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교리와 교조를 그대로 옳다고 시인하는 태도가 신앙의 전부인 것 같이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교묘하게 위장한 ‘이단(異端)’이다”라고 그는 일갈했지요. 방황자 청소년에게는 이 일갈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왜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이러한 감동적 깨달음을 얻을 수 없나를 아쉬워했습니다. 장공과의 조우는 저에게 신앙적 탈합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 선택을 앞두고 무슨 대학 무슨 학과를 지원해야 할지 고민할 때 장공의 신학적 영감은 고민자 청소년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예언자적 자유정신이었습니다. 그 때 고민자는 부친의 기대와 모친의 기대 사이에 끼어있었습니다. 어머님은 고민자를 잉태하시고 여섯 달쯤 되어(1935년 가을) 큰 화상을 입으셨는데 이때 인근 교회 전도부인의 권유를 받 았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야지” 하는 권고였다고 합니다. 그 때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에 만 일 기적같이 낫게 되면 결신하겠다고 모친께서 대응하셨습니다. 정말 기적같이 나으시고 나를 낳았지요. 그리고 약속대로 감리교 거산교회(충남 당진)에 나가셨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모친께서는 저를 훗날 성직자로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마칠 때쯤, 은근히 신학교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부친께서는 제가 의사가 되길 원하셨죠. 그런데 저는 신학대학이나 의과대학 둘 다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의 꿈은 더 컸고 당찼습니 다. 사회나 국가 같은 거대한 실체가 병들었을 때, 그래서 전쟁도 일으키고, 온갖 부패도 생 산할 때, 그 같은 큰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마침 고2때 대구 YMCA 청소년반(Hi-Y)에 열심히 나갔는데 그 때 저는 지도간사 선생으로 부터 슈바이처의 감동적인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때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52). 저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나도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경북고등학교 3학년 시절)과 상의해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지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슈바이처가 역사적 예수의 탐구자였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다만 예수의 산상수 훈에 감동받고 그 예수사랑을,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고통받고 있는 식민지 땅에서 실천 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감동했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방황자 청소년은 『낙수이후』에서 계속 장공의 영감과 비전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얻었던 영감과 감동이 80이 된 오늘까지 저에게 살아있음을 몇 가지 증언하고 싶습니다.

사회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학으로 진학하려는 저에게 “탐욕의 죄를 어찌 하려느냐”는 장공의 글은 탐욕이 개인의 죄를 낳고 마침내 그 개인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나의 신앙을 확장시 켜주었습니다. 장공은 탐욕이 전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탐욕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탐욕이 사회기구 속으로 깊이 삼투되었다고 했지요. 자본주의 삶이 조직 속에 서 제도화되고 개인 속으로 깊이 내면화된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이것의 폐해를 구조적으로 고 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인 하느님 나 라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원론적인 지적 같지만, 1950년대 초 제 주변에는, 특히 학교와 교회에서는 그런 깨우침을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후일 서울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전쟁을 막 겪은 젊은 지성들에게 전쟁과 자본주의를 탐욕과 죄와 사망의 시각에서 깨우쳐 준 분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전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주임무라 여겼던 젊은이었습니다. 사회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저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복음의 메 시지가 제 주변에 없을 때 장공의 『낙수이후』는 진리의 낙수만이 아니라 방황자에게는 진리의 떡 자체였습니다.

1946년에 쓴 “고독(孤獨)”이란 글도 『낙수이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 장공은 그의 호인 長空에 값하는 소중한 복음의 메시지를 저에게 일깨워 주었지요. 예수의 고독과 고난에 주목하면서 그 고독의 깊은 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를 이해 하지 못했죠. 특히 그의 고난과 고독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으며 심지어 스승을 돈 몇 냥에 팔 아넘기기까지 했었죠. 바로 이 같은 기가 막힌 고독과 고통 속에서 죽음이 처참한데, 장공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깊이와 높이를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공은 하느님 사랑의 그 깊고 넓음, 곧 ‘長空愛’를 드러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바로 성육신의 철저하고 성 실한 자기비움(神의 자기비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깨우쳤지요. Incarnation(육화)이 Kenosis(자기비움)와 연동되면서 하느님의 속량애가 얼마나 넓고, 길고, 깊은지를 깨닫게 한 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 그 은혜의 넓이 大海랄까 長空이랄까 寸志尺心(촌지척심)의 헤아릴 바 아니다.”

홀로 능욕과 인고의 해골언덕 위에서 속죄제단 십자가에 그 몸을 희생제단으로 드렸던 예수는 그 처절한 고독 속에서 말할 수 없이 큰 長空愛, 곧 하느님의 비움 사랑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공 자신은 스스로 가장 보잘 것 없는 “寸志尺心”이라고 하여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長空과 寸志尺心은 그 표현에 있어서 모순관계인데도 희한하게 감동적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고독한 처형의 의미는 후일 제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전두환 군사법정에 피고로 서게 되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씨를 내란음모의 수괴로 몰았는데, 통상 이런 죄목으로 중형이나 극형을 받게 되면 결코 홀로 그 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하들도 함께 연루시켜 그 일당을 일망타진시키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반로마체제 수괴로 처형하려 했던 당시 권력은 참으로 이례적으로,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수괴 혼자만 달랑 체포 구금하여 긴급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 부하들에겐 단 한 사람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홀로 반국가, 반체제 전복운동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고독한 처형에서, 저는 그가 얼마나 제자 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사랑으로 배려했는지를 알 듯 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 저항임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사건으로 성육신과 자기비움의 뜻을 비로소 겨우 깨달은 제자들은 제자들을 그토록 아꼈던 고독한 예수의 長空愛를 뒤늦게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 리고 그 고독한 고난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 또는 사랑나라(Love-dom)운동이 철저하게 비폭력적 운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 당시 젤롯당과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입학을 앞둔 젊은이에게 장공의 “고독”이란 글은 하느님의 비폭력적 長空愛의 감동을 가슴 깊이, 창자 깊이 스며들게 해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은 2014년 늦가을 지금까지 내 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으며 내 육신이 몰할 때까지 더 뜨겁게 작동할 것 같습니다.

‘해방’(이 말 쓰기가 쑥스럽습니다만)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 곧 좌우간의 이념대립이 극심했을 무렵(1946년 7월), 장공은 “第三意志(제삼의지)”란 글을 내놓았습니다. 좌우대립을 넘어서서 화평과 희열, 생명과 조화를 이룩해내려면 제3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3의지’는 곧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이 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새로운 종속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 속량이 주는 해방의 힘이죠. 죄와 악에서 속량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의지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게 하는 힘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고 세워나가는 자유의 힘입니다. 무엇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의 기(氣)는 호연(浩然)하며 막힘이 없다고 했지요(浩然其氣 與長空無礙).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장공과 더불어 거침이 없는 것, 바로 그 힘과 기(氣)가 하느님 사랑이라는 점 말입니다. 김재준의 호가 바로 이 같은 막힘없이 넓고 깊고 큰 사랑이며, 이 힘으로 혼란했던 해방공간에서 새 나라 질서를 멋지게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젊은 방황자에게 는 기를 불어넣어주고 세워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장공’은 이름이면서 동시에 본질이었습니다.

저에게 『낙수이후』의 메시지는 충격으로 눈뜸을 주었는데, 그것이 충격으로만 끝나지 않고 감동의 격려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글 ‘無怨(무원)’이 바로 감동의 격려메시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님은 아예 변호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김재준은 예수의 억울한 죽음 자체가 가장 웅변적인 변호라고 했습니다. 한 명의 변호자도 없이 홀로 억울하게 처형된 것, 그것 자체가 변호라고 했지요.

“그가 만일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였더라면, 그가 만일 자신을 구하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려 하셨다면, 그가 만일 그를 죽이는 원수를 조금이라도 미워하고 원망했다면, 그의 십자가는 그의 몸과 함께 그의 영혼까지도 상처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에게는 부활과 승천, 영광의 재림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원수를 용서했던 십자가의 그 사랑, 그 蕪怨의 사랑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지요. 사도들도 예수의 무원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느 누구의 원수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큰 장공애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이웃으로 만드는 무원의 사랑이 참평화를 세운다고 장공은 온몸으로 외쳤습니다. 1950년대 초 김재준의 이 같은 장공애 강조는 방황자 청소년에게 충격적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회의사가 품어야 할 덕목이 바로 이 무원의 주님사랑이구나, 이 힘이 슈바이처를 움직였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재준이 愛者無敵(애자무적)의 사자성어를 즐겨 쓴 까닭을 알 듯합니다. 오늘 21세기 공공성의 위기로 비표준, 비적자, 비주류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현실에서, 특히 복음의 그 감동 성, 그 공공성, 그 변혁성이 날로 퇴조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장공의 無怨(무원)과 長空 愛의 강조는 너무나 적합한 복음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메시지가 해방공간의 혼란기 에서 적절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더욱 적절한 복음이지요. 더더욱 남북관계가 악화되어야 온갖 이득을 본다고 확신하는 냉전근본주의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위협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장공은 원수를 골라 한칼로 목 베어버리는 것이 내 승리가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저 중동에서 참수를 즐기는 듯 하는 ‘이슬람국가’의 모습, 우리 상황에서 서북청년단 같은 백색 테러리스트들이 준동하는 듯한 조짐을 보며 장공의 이 말이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메시지인가를 저는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장공은 원수가 죽을 때 나의 어느 한 부분도 함께 죽는다고 했습니다. 원수죽임은 곧 스스로를 죽이는 어리석음이라 했지요.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 원수의 존재가 조용히 사라지게 할 때 양편이 비로소 다함께 새로운 승리에 놀라게 될 것이라고 통찰했습니다. 2009년, 제가 『우아한 패배』란 책을 내면서 남북 간의 냉전대결을 종식시키려면 원수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상승(相勝)과 상생(相生)을 강조했는데, 이번에 장공의 『낙수이후』를 다시 읽으면서 그 책이 60년 전 젊은 방황자의 가슴과 무의식 속에 장공이 불어 넣어준 長空愛 강조의 효험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남북 간에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적대적 공생관계(敵對的 共生關係)를 끊어내지 않고는 한반도에 평화를 세우기 힘들다는 진리를 매일 가슴으로 느끼는 저로서는 예수님의 無怨愛, 長空愛가 더욱 절박 한 진리로 다가옵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마침내 분단의 족쇄에서 자유케 해주리라 믿고 싶습니다.

1955년 봄부터 저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서울 대 문리대 벽돌건물과 교정에서 사회의사 지망생은 실존주의 문학(카뮈)과 철학(샤르트르)에서 영감을 얻고자 했지요. 마침 부룬너(E.Brunner)의 『정의와 사회질서』가 출간되어 거기에서도 영감을 얻고자 했습니다. 실증주의 사회학 강의에서는 도무지 사회의사가 되는데 절박하게 필 요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수이후』의 감동은 저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1957년 여름 저는 학보병(대학 재학생으로 군에 징집당한 자)으로 최일선 소대에 배치되었습니다. 학보병에게 이승만 정권은 의도적으로 가혹했습니다. 위선, 부패, 폭력이 일상화된 군생활에서 저는 전체주의적 지배에 대한 강렬한 저항감이 안에서 솟구쳐 올라 옴을을 경험했습니다.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월급을 감사 앞두고 마치 꼬박꼬박 받아온 것 처럼 속이는 집단훈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허기진 배를 안고 아침 일찍부터 월급액수 복창 암기훈련을 받았습니다. 고된 군사훈련 끝내고 사단교회 다녀온 죄로, 곡괭이자루로 얻어맞고 도 ‘여유 있게 웃었다’는 ‘건방진 태도’로 인해 영하20도 겨울밤에 시베리아 삭풍을 벌거벗은 몸으로 맞으면서 엎드려 펴기 오백 번 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죠. 폭력은 폭력에 여유 있게 대응하는 자를 가장 신경질적으로 증오한다는 진리를 이때 배웠지요. 장공은 1952년 《思想 界》에 실었던 “民主主義論”에서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생활철학이요, 사회철 학이며 생활양식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극좌이든 극우이든 전체주의는 자기체제를 완전무결한 ‘完成品’으로 미화하기에 겸허한 자기반성을 못한다고 했지요. 저는 이런 군대생활을 온몸으로 아프게 체험하면서 내 평생에 걸쳐 싸우어야 할 선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 체제와 전체제도(total institute)와의 싸움이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사회의사의 책무라고 생각했고 기독교인으로서 예언자적 사명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전체주의 악을 이기는 힘은 그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폭력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예수 십자가의 비움과 지움의 감동적 실천이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야만 ‘제3일’의 감동이 터져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長空愛의 동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대학생활과 군대생활을, 신학대학 밖에서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쳐다보며 치뤄낸 셈입니다. 특히 가혹했던 군대생활에서 저는 反全體主義 충동을 강렬하게 얻게 되었습니다.

제대한 뒤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미국유학 준비를 했는데, 1961년 뜻밖에도 한국 감리교와 인연이 깊은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에모리 대학이 있는 미국 동남부 아트란타는 요원의 불처럼 번지고 있던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메카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걸출한 젊은 목사 킹은 그곳 출신으로서 인종차별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힘차게 펼치고 있었습니다. 민권운동과 더불어 미국 전역으로 대항문화운동(counter-culture)이 대학들 중심으로 들불처럼 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뉴레프트 물결과 히피들의 反자본주의 문화운동 역시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反戰運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킹 목사는 민권운동과 함께 월남전쟁 반대운동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가 구약 예언자의 20세기 현신(現身)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로부터 이사야, 아모스, 미가의 목소리를 듣는 듯 했습니다. 킹 목사야말로 행동하는 사회의사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테네시 공과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1968년쯤 저는 연세대 성내운 선생으로부터 한가지 제의를 받았습니다. 연세대에도 사회학과를 신설하려고 하는데 제가 그 일을 연세대로 와서 맡아 달라는 제의였습니다. 사회의사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로 저는 기뻤습니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강원용 원장께서 크리스찬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저를 초청했습니다. 저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한국사회와 교계의 개혁을 위해 대화 운동을 펼친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저의 꿈을 이룩하는 계기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저는 기뻤습니다. 그래서 선택의 고민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대학으로 가 느냐 아카데미 사회운동으로 가느냐를 놓고 번민했습니다. 주변의 동지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대답이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이때 저는 장공에게 여쭈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강원장의 스승이시기에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좌우간 장공의 말씀을 듣고 저의 진 로를 결정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답신도 예상외로 빨리 왔습니다. 장공의 권고는 간단명료하고 단호했습니다. 강원장과의 관계를 밝히신 뒤 “한 박사는 대학으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충고하셨습니다. 내 자신이 사회의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나, 민족과 국가의 동량들을 길러 그들이 사회의사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이 답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에 저는 모교에 와서 가르치라는 은사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대학교 총 장도, 교무처장도 모두 사회학과 은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70년 여름에 귀국했습니다. 성내운 선생님에겐 미안했습니다. 강원장에게는 아카데미 부원장직은 맡지 못하지만, 서울대학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 이외 시간은 아카데미 운동에 협력하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 시민운동가들 훈련 계획으로 제가 中間集團敎育(중간집단교육)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서울대학과 아카데미 일에 내 시간을 몽땅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의사의 직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공께서 저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충고를 주셨기에 1970년 여름 저는 신나게 귀국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장공이 주로 기독교 교권주의자들과의 선한 싸움에 열중하셨는데 1960년대 부터는 싸움의 과녁을 보다 크게 잡으셨습니다. 반민주적 정권이 그의 선한 싸움의 주 과녁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문민독재기간에는 교권주의자들과의 싸움으로 장공은 세속권력과 직접 부딪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장공은 한국사회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와 본격적으로 맞싸우기 시작했고 한국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친히 서셨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 그렇게 적절한 선택을 하도록 권고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그의 충고는 점증하는 한국 민중과 민족의 고통을, 그 부당한 고통을 구조적으로 해소하는 운동의 주역을 대학에서 가르치고(敎) 길러내라(育)는 지엄한 명령 같았습니다. 귀국해서 모교교정에 서 보니, 그곳은 상아탑이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최전방 전투장 같았습니다. 출근하는 첫날, 연구실로 가는 시멘트길 바닥에 는 ‘중앙정보부 해체하라’는 흰 페인트 글씨가 선명했습니다. 긴장감이 저의 척추를 흘러내리는 듯 했습니다. 사회의사 되는 길이 험난한 길임을 예고해 주는 듯 했습니다. 변혁적 시민사회운동 일꾼을 길러내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고 또 고독한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이때 적지 않은 훌륭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은 후일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주역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장공의 제자들이었고, 신학교 제자는 아니더라도 장공의 사상과 삶을 존경하는 분들이셨습니다. 기독자교수 협의회는 이들의 활동마당이었습니다. 일종의 종말론적 희망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서울대 학 교수회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복한 공동체적 긴박감이 이 종말론적 공통체에는 항상 감돌았습니다.

1971년이던가요 어느 날 장공께서는 자기 제자들 몇 분과 함께 누추한 저의 집을 느닷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강원용 원장도 거기 있었지요. 장공은 《제3일》지를 창간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동인이 되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얼떨떨했으나 속으로는 기뻤습니다. 이제는 장준하의 《思想界》도 폐간되었기에 이 땅의 민중과 함께 자유, 정의, 평화의 가치를 널리 전파하고 실천할 매체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基督敎思想》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씨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장공은 예수의 부활의 동력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고 세우는 운동을 위해 《제3일》지를 창간하려 했습니다. 장공의 권고에 고맙게 여겨 저는 멍해 있는데 강 원장께서 “한박사를 아낍시다. 나중에 동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씀하 시면서 당장은 크리스찬아카데미 일을 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공은 그의 제자의 말에 한 발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저에게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동인이 되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은 자신을 지금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1976년 2월 말 드디어 저는 서울대학에서 광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광야 4년간의 쓰라 린,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새로 배웠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방해로 기독 교 방송국 논설실장 자리에 갈 수 없었습니다. 전성천 사장께서 함께 일하자고 권고하셨는데, 거기로 갈 수 없었지요. 그 자리도 사회의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박사의 친구인 조선출 기독교서회 총무께서 저에게 조그마한, 그러나 뜻깊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편집고문역으로 《기독교사상》을 위해 일했습니다. 정말 4년간 신 나게 기획하고 신나게 글을 썼지요. 그 때 쓴 글들의 조각들을 모아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지식인과 허위의식』도 이때 나왔습니다. 『민중과 사회』도 출간되어 대학 밖에서 대학 젊은이들을 깨우치는데 이런 책들이 올곧게 힘차게 활용되었습니다. 뜻밖의 일이 었지요.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한국교회 비판서는 기독교 젊은이들에게 ‘불온한’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이 책을 금서(禁書)로 찍었다고 합니다. 이런 책들과 강연 활동을 통해 들판에서 참으로 신나는 4년의 삶을 보냈습니다. 따지고 보면 장공이 저를 일찍부터 ‘선동’했기 때문에 저는 수많은 꿈쟁이 젊은이들을 또한 ‘선동’할 수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부하에 의해 살해되자 약 다섯 달 동안 정국은 요동쳤습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80년 3월 1일자로 대학에서 쫓겨났던 교수들과 학생들이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민주화의 열망은 더욱 국민들 사이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또 하나의 쿠데타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그해 5월 12일, 저의 모친께서 소천하셨는데 이때 상가에 조문 왔던 동지들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내란을 음모했다는 구 실을 앞세워 신군부는 DJ등 민주세력을 일망타진한 후 신군부독재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도대체 북적대는 상가에서 내란 음모했다는 검찰의 진술을 군사법정에서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때 민중신학을 실천했던 동지들 중 상당수도 일망타진 당했습니다. 가혹한 지옥 심문으로 심신이 걸레처럼 구겨지고 약화되었지요. 3ㆍ1민주구국선언으로 이미 옥살이를 했던 서남동 교수는 신군부의 지독한 심문으로 더욱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저는 그 지옥현장에서 확인했지요.

저는 서목사와 함께 1980년 11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때 미국교회협의회 중동총무였던 이승만 목사와 에모리 대학 레이니 총장 등이 함께 노력하여 저는 1981년 10월에 기적 같이 도미할 수 있었습니다. 모교 에모리 대학에 방문교수로 갔지요, 그리고 1982년 여름에 여권도 비자도 없는 무국적자처럼 되어 뉴욕으로 갔습니다. 뉴욕 목요기도회 동지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지요. 그 중에 이승만 목사의 헌신적 도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때 장공은 캐나다 토론토에 계시면서 북미주의 교포들의 조국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소위 민통)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뉴욕에 가보니 동포들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는 미묘한 두 흐름, 두 ‘진영’이 있다는 것을 저는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先民主(선민주)’를 주장하는 다 소 ‘보수적’인 흐름이었는데, 한국 NCC와 손잡고 일하는 동지들이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先統一(선통일)’을 더 중요시 하는 동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북관계 개선을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자는 후자를 ‘친북’ 세력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보수, 합리적이고 6ㆍ25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총살당했던 부친을 모셨던 이승만 목사는 후자의 대표자처럼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장공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저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만, 짐작건대 和而不同의 입장(바로 그것이 당신의 평소의 신학과 신앙이 강조하는 입장)이 바로 장공의 입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不同而和의 정신이 바로 그의 뜻인 듯 싶습니다. 和而不同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되 서로의 다름은 존중한다는 뜻인데, 뉴욕 가서 보니까 이 두 흐름 간에는 화목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르지만 서로 조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뜻에서 不同而和가 요청된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장공의 그 넓은 포용적 신앙이야말로 不同이지만 和睦(화목)해야 한다는 신앙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장공을 만난 것은 1983년 9월이었습니다. 장공이 10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려는 즈음이었습니다. 고국을 항상 요억(遙憶)하셨던 그가 귀향하게 되자 미국에 있는 동지들과 오찬하기로 했습니다. DJ 내외, 한승인, 문동환 등 열 명도 안 되는 조촐한 모임이었 습니다. 아마도 김대중 씨가 미국에 오게 되니 가벼운 마음으로 환국하신다고 생각한 듯 했습니다. 김대중은 오고 김재준은 간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날 사회를 맡은 저는 두 분의 이름이 자꾸 헷갈린다고 했지요. 저는 그때 과연 김대중 씨가 장공의 간디 같은 품격으로 재미동포들 을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독려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 해 보았습니다. 한 달에 서너 번 뉴욕에서 워싱톤에 가서 DJ를 뵈었는데 여러 번 저는 그에게 네루 보다 간디의 시각에서 교포사회를 이끌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치인인 그분은 다소 불편해 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장공의 송별만찬에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조용히 품위 있게 귀향했지요. 없듯이 존재하는 장공의 풍모에는 언제나 그윽한 향기가 서려 있었지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비보통적인 존재의 향기를 남기고 귀향하셨습 니다. 저는 그 이듬해 1984년 8월 15일에 마침내 복권되었기에, 9월 초에 오매불망했던 고향으로 3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접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종말론적 희망을 품고 귀국했 습니다.

1987년 초 장공께서 소천하기 전 자택을 찾아갔습니다. 저를 쳐다보시던 그 처연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육신의 고통과 헤어짐의 아픔이 뒤섞여 있는 그런 쓸쓸한 표정이었습 니다. 그가 50세 갓 넘었을 때 대구에 드나드시며 힘차게 강연과 설교하셨을 때의 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기진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달려갈 길을 다 달렸으니, 좀 쉬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는 표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장공의 육신의 마지막 고통이, 제3일의 영광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아픔이길 기도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의 육신은 27년 전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메시지는 저희들 가슴 속에 울림의 파장으로 오늘도 따뜻하게 살아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저의 순례길에 길벗이 되고 있습니다.

3. 장공사상

장공의 기라성 같은 제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의 신학세계를 이미 여러 갈래로 잘 정리 요약했기에 제가 여기서 새삼 그의 신학의 특징을 정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도 한신대 출신도 아닌 제가 방황했던 청소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저의 사상적, 신앙적 스승으로 모셔왔기에 몇 가지 그의 사상을 제 나름대로 오늘의 위기 상황에서 부각시켜 강조해 보고 싶습니다. 특히 그의 실천적 삶에서 드러나는 신학적(사상적) 특징 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 그의 실천적 삶은 참으로 복음적인 신학의 뿌리에서 자란 가지요 잎이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김익두 부흥집회에서 성령의 은혜를 벼락 떨어지듯 받은 이후, 그 성령의 감격을 죽는 순간까지 평생 지녔다는 점에 저는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의 굴곡 많은 순례길에서 일관성 있게 그를 인도해준 이 감격은 한마디로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의 동력이었습니다.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의 은혜에서 나온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삐뚤어진 복음주의 자들(혹은 근본주의자들)의 값싼 속죄론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성육신 신학과 비움 신학의 결합이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incarnation이 바로 바울의 kenosis와 하나되어 나오는 실천적 삶이 바로 그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복음의 공공성이 있고 그 공공성이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개인과 구조가 함께 변화되는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카네이션 과 케노시스는 그의 실천적 삶에서 항상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 자체가 잔잔하게 은혜롭고 감동적 메시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충격적인 선동의 메 시지이기도 하지요.

성육신 신학과 비움 신학이 실천적 삶 속에 서로 도와주기에 그의 신학이 결단코 추상적인 교리나 초월적 이원론으로 굳어버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역사 현실에서 먹고 씹으면서 가장 낮은 민중의 고통에 동고하는 비움의 사랑실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성육신 신학이 예수의 先在性(선재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가현설(docetism)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고, 바울서신의 영광 받는 황홀한 그리스도에만 주목하게 되면 복음이 탈역사화 되기도 쉽습니다. 때론 값싼 구원론이 하느님 나라 운동을, 죽어 천당가는 일로 대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혹과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장공의 후학들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성과들을 적절하게 두루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운동의 복음과 제도교회의 케리그 마 복음 간의 해묵은 간극을 창조적으로, 감동적으로 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간의 불건강하고 불편하고 불필요한 거리가 은혜롭게 줄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간극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는 근본주의적 신학이 앞장서기도 하지만 때론 진보적 신학도 그 간극 유지에 책임 없다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테 면 불트만의 성서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탐구의 문을 반세기 동안 닫아 버렸습니다. 1953년에 와서야 그의 제자 케제만은 처참한 나치 폭정의 현실 속에서 예수가 반유대주의자로 교묘하게 왜곡되는 사실을 보고 스승과 달리 역사적 예수 탐구의 발동을 걸지 않았습니까?

독일의 상황에 견주면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핍박 받던 1950년대 초 우리 상황에서 장공의 신학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매우 가깝게 연결시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그때 한국의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분열된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기야 예수교장로회를 이끌었던 교권주의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예수 이름만 교단의 간판으로 내세웠지요. 기독교장로회로 분립했던 분들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만 매여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가피하게 가져갔지요. 이것은 희극적 비극 같습니다. 하여튼 오늘의 장공의 후학들은 장공의 성육신 신학과 비움 신학의 실천을 통해 고난의 예수가 바로 부활의 그리스도요, 부활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박력 있게 실천한 역사적 예수임을 우리의 민족 현실에서 실천적 삶으로 힘있게 증거해야 합니다. 분단의 족쇄에 매여 평화, 공의 같은 공공가치가 조직적으로 훼손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공공적 복음, 변혁적 복음을 감동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1953년 장공을 파면시키고, 교단에서 그를 축출했던 교권세력이 바로 친일 냉전세력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서북청년단이 부활하는 조짐이 보이는 오늘의 엄혹한 현실에서 교회 안팎의 냉전 근본주의 세력과 용기 있게 맞서야 할 것입니다. 장공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는 역시 이 의로운 싸움에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앞장서실 것입니다. “예 할 것은 분명히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용기있게 아니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아바 (Abba)의 장공애로 힘을 모아 愛者無敵의 효험을 뿜어낼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비움의 힘 보다 더 크고 진보적인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로 국가와 시장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장공의 그 큰 비움의 ‘長空愛’ 실천으로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조짐은 이미 광화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이런 동고공동체적 연대가 진 보해 나감으로써 앞으로 국가의 공공성과 시장의 공공성이 확대심화될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과 변혁동력을 감동적으로 살려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런 점에서 저는 감히 ‘제3일 운동’이 다시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 장공이 《제3일》지를 창간했을 때 그가 가졌던 절박한 상황 판단은 지금에 와서 더욱 절박하게 정당하고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제3일’의 적합성(relevance)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펼쳐질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절망하여 귀향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예수는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여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길벗이 바로 부활 예수인지 몰랐습니다. 떡을 떼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갈릴리 밥상 공동체 운동에서 익숙히 보았던 예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이죠.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로구나’ 하는 ‘아하!’의 깨달음에서 바로 ‘제3일 운동’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절망에서 제자들은 떨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용기 있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갔지요. 새역사가 날개짓기 시작했지요. 그곳에서 그들은 불같은 성령의 소통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역사 변혁의 큰 물줄기가 터져 나왔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벌떡 일어서면서 새 구조와 새 역사를 만드는 작업에 발동이 걸렸습니다. 인종장벽, 계급장벽, 성의 장벽 등 도무지 허물어질 것 같지 않게 오래 버텨온 차별과 억압의 장벽들이 마침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014년 끝자락에 서서 저는 장공의 ‘제3일 운동’이, 그래서 절박하게 요청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70년간의 비정상적 분단장벽, 날로 두꺼워져 가는 계급장벽, 그리고 온갖 부당한 구조적 방벽들이 생명, 평화, 공의의 가치를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장공의 후학들이 이 벽들을 허무는 참 복음적 선교에 결연하게 앞장서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이 벽들을 근원적으로 해체시킬 수 있는 힘은 그 벽들을 강고하게 쌓고 지키려는 세력의 힘과 방식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 힘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애(無礙)의 깊고 넓은 아바사랑, 곧 가장 모성적 아바사랑입니다. 끝없이 비워내는 장공애입니다. 장공의 성육신 신학과 비움 신학에서 나오는 비우는 삶의 신앙이 바로 참복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신앙적 결단은 구체적으로 원수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원수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은 추상적, 초월적 사랑은 한낱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바로 이 진리를 몸소 실천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 갈릴리 예수입니다. 그의 고난 얘기의 핵심은 처참한 고난 현장 속에 아바사랑이 육화된다는 진리입니다. 막강했던 로마의 제도 폭력에 의해 사랑 자체가 어떻게 처형되는지를 자세히 증언한 것이 예수의 고난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신 진리의 핵심은 율법의 이웃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사랑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원수사랑으로 평화를 만드는 실천만이 바로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지요(마태5:43-45, 5: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이 진리를 말(saying)로만 설파하시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체포 순간부터 골고다의 십자가 처형 순간까지 아바의 장공애가 어떻게 자기비움, 자기지움의 모습으로 화육되는지를 감동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폭력적 가해자들을 위한 용서기도를, 그 고통의 절정에서 드렸지요. 이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와 함께, 결코 초월적 명상이 아니었습니다. 폭력의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는 바로 참 용기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선택해야 할 ‘제3일’의 길입니다.

(3) 저는 이 길이 발선(發善)의 길이라 믿습니다. 발악(發惡)이란 언어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는 발악 프로세스 속에 일상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적 선택은 발선이었습니다. 역사의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친서에서 발선의 사랑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밝혔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 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로마 12:20-21).

원수 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 놓으면 그의 얼굴은 부끄러워져서 붉게 변할 것입니다. 서로 발악하며 증오하는 동안 꽁꽁 얼어 붙어버린 원수 속의 착한 마음(善心)이 녹아내리면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착한 마음의 발동, 그것이 바로 발선입니다. 발악의 경우와는 달리 발선의 관계가 이뤄지면 소통과 화해와 평화의 프로세스가 작동하게(emersing) 됩니다.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을 산 위에서 직접 들어보지 못한 바울이지만, 그 비움의 발선효과를 누구 보다 그는 더 잘 이해한 듯 합니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을 경외한다고 알려진 바울 사도가 이 발선 발언에서는 누구보다도 갈릴리 예수의 평화의지를 더 깊이 이해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역사예수 간의 간극도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편지들에서 진보적 예수의 숨결을 체험해야 합니다. 발악관계가 발선관계로 변화되면 원수관계는 친구관계로, 죽음과 죽임의 관계는 서로 살림의 관계로 질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선은 비로소 악을 우아하게 이기게 됩니다. 전혀 악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악을 사라지게 합니다. 愛者無敵의 효험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런 비움 신학과 실천이야말로, 비정하게 70년간 동족을 원수와 사탄으로 증오하면서 그간 우리가 서로 발악해온 비정상적 민족대결의 비극을 우아하게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제3일 운동이 감당해야 할 복음적 과제요,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4) 장공의 신학에서 자랑스러운 특징은 그의 ‘전우주적 사랑 공동체’ 비전입니다. 저는 이 비전이 그의 말년에 가서 처음 나타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의 號(호)인 長空이 언제 주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그의 호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했을 때부터 장공적 사랑의 그 감동성, 그 공공성, 그리고 그 변혁성을 깊이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無量愛(무 량애)가 바로 長空愛가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 사랑 아닙니까? 여기에 더하여 그가 구약을 전공했기에 예언자들의 비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사야의 평화 비전을 선호한 것 같습니다. 나라 간의 전쟁 없는 상태도 평화이긴 하지만 창 조질서의 원형을 복원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평화를 더 선호한 것 같습니다. 그 근원적인 평 화, 또는 보다 공공적인 평화를 이사야의 다음 메시지가 잘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이사야11:6-9)”

여기서 근원적 평화는 강자(적자, 표준, 주류, 갑들)가 스스로 자기 본질을 과감하게 비어내고 약자(비적자, 비표준, 비주류, 을들)의 체질을 즐겁게 취할 때 온다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사자가 소의 여물 먹는 아름다운 모습이야말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참으로 좋다고 감탄했던 바로 그 모습 아닙니까?(창세기 1:29-31)

따뜻한 공동체적 소통이란 정글에서의 적자와 비적자 관계가 잔인한 제로섬 관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짐승을 인간으로 전환시킴에 필요한 사회적 소통에는 세 가지 수준(또는 과정)이 있다고 저는 주장해왔습니다. 소통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역지(易地)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 남의 자리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바로 역지 능력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초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 비움 과정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가장 낮은 역지 수준은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머리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살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준은 역지감지(易地感之)입니다. 가슴으로 남들과 주변상황을 이해합니다. 공감(共感) 수준이지요. 머리와 가슴 간의 거리는 단 한 뼘에 불과하지만 思之에서 感之로 가는데는 내공있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높고 감동적인 수준은 역지식지(易地食之)입니다. 상대방의 주식을 자기의 주식으로 삼는 수준이지요. 여기 서로 경쟁하고 발악하는 두 존재 간에 힘의 균형이 깨어진 살벌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食之가 얼마나 소중한 비움인지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자요, 적자인 사자는 비적자인 소를 죽여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비정한 죽임과 죽음의 관계입니다. 평화란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세워질 수 없지요. 결사적으로 잡아먹으려 하고 결사적으로 달아나려는 정글 상황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근원적 평화를 만들려면 강자가 자기의 살육적 충동과 욕심을 철저히 비워 내야 합니다. 강대국이나, 지배집단이 먼저 자기 체질을 변화시켜야만 근원적 평화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놀라운 食之라는 실천의 경지입니다. 이사야의 비전은 바로 이 점을 저희들에게 깨우쳐 줍니다.

세계적으로나 우리 사회 안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날로 험악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설득력 있게 이 비정한 양극화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국가의 공공 성 위기나 시장의 공정성 위기, 공교육의 위기와 으뜸 가르침인 종교의 위기도 이 같은 정글 법칙의 비정한 작동에서 불길하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21세기 세계와 분단된 우리 민족 그리고 우리 국가와 시장과 사회에서는 이사야의 비전이 절박하게 요청됩니다. 장공은 이점을 잘 이해하셨고 바로 이 비전을 전파할 매체로 《제3일》을 창간하려 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것이 그의 우주적 사랑 공동체로 이어진 것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장공의 전우주적 사랑 공동체가 예수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면 그의 이 비전이 역사를 탈출하려는 신비적 우주론의 한 변종으로 인식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전우주적 사랑 공동체는 인격적 아바 하느님의 내재적 경험(Abba experience)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그 아바 경험이 역사변혁으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비인격적 우주의(cosmic) 초월적인 신비로운 힘이 아무리 크고 넓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의 아바 하느님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결코 무감각한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장공에게 전우주적 사랑 공동체 는 그 비움의 감동을, 표현할 수 없이 넓고 길고 깊은 아바사랑공동체(Love-dom)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하느님을 아바라고 부르시면서 피와 땀으로 기도한 것은 우주적 초월자에 대한 한낱 명상(meditation)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범신론적 명상과 사랑의 근원이신 아바에게 피땀 흘리며 간구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는 차원이 아주 다른 듯 합니다. 제가 이것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장공의 전우주적 사랑공동체 비전을 영지주의적 차원 또는 신플라톤적 인식에서만 이해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극단으로 가면 가현설(Docetism)적인 유혹에 함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사랑 공동체는 인간 역사 구석구석까지 깊숙하게 아바 하느님의 장공애가 구체적으로, 감동적으로 육화 되는 생동하는 역사 공동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아한 패배’를 두려움 없이 선택하면서 온갖 승리주의적 복음 운동을 극복해 내는 일 또한 ‘제3일 운동’의 하나일 뿐 아니라 전우주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아한 패배를 선택할 수 있는 신앙과 신학의 여유가 이 각박한 위기상황에서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이 우아한 패배를 당당히 선택하는 힘은 악을 이기는 선의 힘입니다. 저는 예수 처형을 감독했던 로마의 중대장 (백부장)의 용감한 선택을 보며 새삼 감격합니다. 그는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였던 로마신학을 철저히 학습했던 예비 로마지배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황제를 신의 아들로 확신했을 것입니다. 시저를 메시야요 주님으로 경배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엄한 황제 명령(물론 총독의 판결)으로 사형수였던 갈릴리 청년의 사형을 집행하면서 그 장교는 이 청년의 놀라운 모습, 특히 충격적 그의 선택을 직접 목도 했지요. 예수의 우아한 패배의 동작 하나 하나를 지켜봤습니다. 자기를 조롱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폭력적 가해자들을 바보처럼 오히려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세계관은 흔들리기 시작했지요. 정말 우아하게 죽는 갈릴리 청년의 너무나 이례적 모습을 보고 그의 엘리트적 로마 정체성은 허물어진 듯 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이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분이야말로 의인입니다.” 이런 발언은 로마체제의 관점 에서 보면 참으로 무엄하고 위험한 반(反)체제적 발언입니다. 이 장교는 지금 사형집행관의 공무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로마 총독이 신의 아들이 아니고, 황제 권위에 도전한 갈릴리 반체제 범죄인을 신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그는 예수를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옹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적인 역지식지의 감동적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제가 작가적 상상력이 있다면 벤허나 쿠오바디스 못지않은 작품을 이 청년 장교의 후일담으로 쓰고 싶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로마 백부장의 고백과 선언은, 그 막강했던 팍스로마나 체제가 우아한 패배를 선택한 갈릴리 사형수 청년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선언을 한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비움의 사랑실천보다 더 진보적인 힘, 더 감동적 인 힘, 더 변혁적 공공의 힘은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비움의 힘은 결코 독선적인 극단주의 체제와 문화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폭력혁명의 힘은 바로 이 비움의 힘에 당하지 못합니다. 폭력을 가장 무력화시키는 힘은 선제적 공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선제적 비움사랑의 실천에서 나옵니다. 가장 진보적인 비움사랑의 힘, 바로 그것이 전 우주적 사랑 공동체를 세우는 역사적 변혁의 감동적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장공 김재준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거의 한 세대의 시간이 흘러갔으나 선생님의 삶과 사상이 없듯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저희들을 이끌어 온 듯합니다. 그런데 장공 선생께서는 온몸으로 가장 불행했던 우리의 민족사 속에서 참다운 해방과 광복을 바라며 온몸으로 신학을 실천해 오셨는데, 아직도 그의 꿈이 이뤄지지 못한 안타까운 우리 현실을 보면서, 저는 장공의 영이 오늘도 살아 저희들을 더욱더 격려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그는 조국의 역사 속에 생명탑 놓아 가기를 독려하고 있으며 하늘 씨앗 되어 밝은 새 역사의 생명을 이어 가라고 응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장공은 타고난 시인이었기에 그 따뜻한 시심으로 복음의 실천적 본질을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하늘씨앗이 되어 역사 속에서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나라를 세우라고 저희들에게 격려하시는 듯합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1957년 장공은 수유리에 마침내 한신대 교사를 마련하시고 제자들, 후학들에게 아래와 같이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한신대를 다녀보지 못했기에 이런 감동적 복음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남긴 스승을 모시는 여러분들을 매우 부러워하며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감동을 삶 속에서 육화하여 분단의 이 슬픈 땅을, 분열의 이 사회와 어두운 이 역사 현실을 공의롭고 평화로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혁시키는 일에 앞서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장공을 기장과 한신의 테두리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겠습니다. 장공이야말로 20세기 한국 역사와 사회에서 우뚝 선 복음의 큰 산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변혁시켜 내일의 새하늘과 새땅을 열어주실 큰 어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고요히 배우고, 깊이 기도하고, 넓게 꿈꾸는 예언자의 무리가 나서 하늘의 사명을 띠고 산 아래 내려가리라.”

여러분, 70년의 그 길고 비정한 분단역사와 세월호 참사의 오늘의 현실에서 민족과 민중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저 산 아래로 내려가서 장공애의 삶을 사는 장공의 후예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민족과 민중에게 희년의 해방, 희년의 광복을 감격적으로 체험하는 ‘제3일’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장공탄생 113주년 기념강연회 집담회]

“한국교회 소생할 수 있는가?”

이번 기념강연회는 “장공사상의 적합성”이라는 제목의 한완상 박사의 발제 후 “한국교회 소생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집담회를 가졌다. 본회의 학술위원장인 하태영 목사(삼일교회)의 사회로, 이영미 교수(한신대 구약학), 김희헌 박사(성공회대 연구교수, 낙산교회), 이철우 목사(기장 광주노회장)가 패널로 참여했다.

그 어떤 주제보다도 시의적인 주제였으며, 한국교회의 위기를 피부로 실감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한완상 박사의 ‘원수사랑’이라는 해제를 이 시대에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패널과 청중 모두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그리하여 그동안 ‘교회의 성장’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던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 대해 반성했다. 현실의 벽에서 짧은 시간 안에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모양의 대안적 교회들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오고갔으며 앞으로도 한국교회 스스로에 대한 ‘성찰’의 끈을 놓지 않아야된다는 마음들을 확인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집담회를 마쳤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1호] 2014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