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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8호] 장공의 가르침 다시 읽기 - 학문(學問)의 자유(自由)와 사명(使命)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7 13:53
조회
671

[제18호] 장공의 가르침 다시 읽기

학문(學問)의 자유(自由)와 사명(使命)
학생세대(學生世代)에 거는 민족(民族)의 이상(理想)
- 민족(民族)의 장래를 위한 동량(棟樑)의 이상(理想)과 사명(使命)

* 이 글은 월간《창조》1972년 3월호에 게재된 컬럼으로서 김재준 전집에 들어가 있지 않은 글입니다. 제보해주신 흥덕교회 안세환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외국인(外國人)이 한국의 대학(大學) 캠퍼스를 두루 시찰하고 나서 ‘어쩐지 초상난 집 같다’고 했다. 하기야 초상난 집이라고 해서 모두가 한결같이 슬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도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웃음으로 대하는 것이고 너무 심심하면 장기, 바둑도 두는 것이고 항간의 고십(gossip)으로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분위기로 말한다면 역시 저기압(低氣壓)이고 그 밑바닥은 음산한 애수의 골짜기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학원 분위기가 초상집 같이 음산하다 해도 교수가 강의하고 학생이 청강하고 입학식, 졸업식, 학사, 석사, 박사 학위 등 수여식이 그대로 시행되고 이사회, 동창회 등등도 그대로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원은 역시 초상집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큰 대목에서 잘못된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의 첫째는 학원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학원자유(學園自由)의 분위기가 대폭 동결(凍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항목, 저 항목의 개별적인 자유는 어느 정도 허용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일반적인 분위기가 어떤 중압 아래 놓여있다면 그것은 ‘학원(學園)’의 자유 분위기일 수가 없다.

동결(凍結)된 학원(學園)에 봄은 오려나

학원은 인간을 형성하는 고장이기 때문에, 특히 대학은 그 마무리를 시도하는 시간이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전반적인 자유가 필요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주체성이니, 개성이니, 인격성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은 자유 안에서만 성립되고 육성되며 보존되는 것이 때문이다. 고아원이나 수용소에도 부분적인 자유는 있다. 그러나 거기 있는 아동이 화기애애한 자유로운 가정 속의 아이들과 같게 되기는 어렵다. 자유가 억압 또는 위축 왜곡된 상태에서 주체성이 확립될 수는 없다. 자기 결단과 자기행동의 자유 없이 주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예거나 가축의 반열(班列)에 가산될 것이다.

개성(個性)이란 것도 그렇다. 나로서의 자유(自由)가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나요 남이 아니다. 나는 어느 다른 사람과도 바꿔지거나 그 대용품이 될 수는 없다’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전반적인 자유가 보장된 후에만 있을 수 있는 긍지라 하겠다. 인격성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격이란 것은 벨자에프에 의하면, 인간이 자연 질서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도 위에서부터 받은 것,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이 여러 가지 잘못된 조건 때문에 찌그러지고 더러워지고 무력해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에서 구별되어 초월된 세계를 갖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 판단과 자기 결정의 능력을 갖고 심미(審美)의 영역에서 도덕의 영역, 영(靈)의 영역에까지 비약한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자유 없이 인간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간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원도 ‘자유 없이 학원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자유 없는 학원은 ‘인간’을 만드는 학(學)의 동산이 아니라 기계의 부분품이거나 어떤 권력이 요청하는 인간자료를 생하는 공장으로 화해버린다. 우리는 불과 수십 년 전에 히틀러 독일에서 이런 것을 역력히 보았다.

...(중략)...

시궁창에 빠진 탈레스

학원은 참여를 통하여 진리를 살리는 기관이다. 학원은 세파(世波)를 초월한 상아탑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그런 주장이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오직 진리를 위한 진리, 모든 이해타산에서 초월한 진리 운동, 평생 연구실에 들어앉아 어떤 하나의 추상적 진리 체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하여 저서를 출판해도 겨우 한 두 권 팔리나 마나한 그런 경우에도 그 진리 때문에 한없는 희열과 긍지를 느끼는 그런 곳이 진정한 학원이라고 주장한다.

상아탑 속에 앉아,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면서도 길가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성좌의 이동을 계산하는 학자가 참 학자라는 얘기도 노상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아탑과 거리의 물결이 직결되어 있다. 거리에 통하지 아니한 상아탑이나 상아탑에서 단절된 거리는 다같이 자멸(自滅)하겠금 되어 있다는 말이다.

...(중략)...

스스로 몸을 던져 참여(參與)할 때

대학은 이런 악용 또는 남용되는 권력 앞에서 삼엄하게 맞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상아탑의 기상이다.

대학의 자유는 인간성 파괴 또는 인간 말살 행위를 그 근원에서 방지하기 위한 필연적 요청이다.

대학이 돈이나 권력에 좌우되지 않는 진리의 전당이 되기 위하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아탑적인 긍지를 유지해야 할 것이고 국민도 그런 대학에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진리는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건으로서의 진리라야 한다.

그러므로 학생이 학문을 배운다는 것도 그 실현 행위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며 정치, 사회, 문화 등 문리대(文理大) 부문에 있어서도 그들의 사회 참여 행위를 통하여 그 부문의 학문을 체득하는 것이다. 학교가 ‘지식’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전락하지 않고 그 지식이 인격화·인간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식인간’으로 형성되게 하는 ‘인간 만드는’ 고장으로 되려면 학생들의 진리 탐구와 그 발표와 그 생활화와 그 사회화의 노력을 억압해서는 안될 것이다. ‘데모’란 것은 학생들의 사회 참여 의식의 표현이어서 그것은 교육자나 피교육자를 막론하고 본질적인 교육 방법에 속하는 것이며 진정한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학생들이 어떤 사회적 사건에 관심을 표명하고 그 의견의 효능화를 위하여 스스로 그 몸을 던져 참여할 때 그것이 소위 ‘데모’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학생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사회화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자기가 개인 중심적인 이기주의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동참(同參)할 뿐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을 정립(定立)시키는 의식구조를 그런 행동을 통하여 확립하는 것이다.

...(중략)...

권력이란 것은 그 권력을 획득하기까지에는 상당히 혁명적이고 진취적이며 민중적이지만, 일단 권력을 획득한 다음에는 보수적이며 자기옹호적이고 탄압적이 된다. 그것은 다시 혁명적인 것을 허용하는 때에는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위협이 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 질서를 기어코 고정시키려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공산사회에서의 무자비한 숙청은 ‘주의(主義)’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는 현 집권층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 정권이 독재에 가까울수록 타의(他意)는 더 많이 배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창조운동은 그만큼 저지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새로 창조해야할 다음 세대(世代)의 뼈저린 생장고(生長苦)를 예상시킨다.

그러나 자라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말살 또는 억압하는데 끝까지 성공한 예는 역사에 일찍 있어 본 적이 없다. 중국(中國) 청조(淸朝)에서 여자의 발을 작은 자국신으로 묶어 자라지 못하게 했다. 발가락뼈는 안에서 자라 안으로 꼬부라들었다. 얼마나 기형적인 인간학대인가? 그러나 그것도 한때,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생명은 유연(柔軟)하다. 터지고 갈라지고 불기둥이 용암을 뿜어대는 지구의 초기에 다소의 냉각기가 오고 어느 골짜기에 물이 고이고, 그 물 속에 지극히 작고 미미한 아메바가 생겼다. 그 포악과 위세를 떨치는 화산의 힘에 비하여 이 아메바는 무(無)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 보잘것없는 생명도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하고 진화하여 오늘의 이 놀랍고 다양한 생명의 세계(世界)를 만들었다. 세계(世界)의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생에게서 미래(未來)에의 ‘비전’과 그것을 창조하기 위한 유연한 생명의 충동만이 맥박치고 있다. 그러나 불 뿜는 화산이 아메바를 이기지 못한 것과 같이 미래(未來)는 그들 켠에서 그들을 밀어준다.

...(중략)...

참신하라 그리고 영원하라

학생은 더 훌륭한 미래를 향하여 비전을 보며 외친다. 정의가 바다에 물 덮이듯 충만한 사회, 부정부패가 번식할 수 없는 사회,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 모든 사람이 양심대로 외치고 이성에 따라 생각하고 전체 사회를 위하여 자유롭게 봉사하는,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자유분방하면서 질서 잡힌, 정의로우면서 각박하지 않은 민주사회를 앞에 그리면서 전진한다. 이런 학생 기질을 짓이겨서야 되겠는가? 나라의 보배와 같이 아끼고 존중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학생들은 너무 속히 ‘기성’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 졸업만 하면 취직 자리를 구하고 운수 좋게 취직이 되면 ‘의복이 날개라고’ 매끈한 양복에 기름이 번지르하게 화장하고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결혼하고 애기 낳고, 그래서 작은 행복에 안정해버린다. 너무 속히 ‘기성’이 돼버리니 창조적인 모험이 자취를 감춘다. 좀 더 거세고 야인답고 큼직한 불평도 품고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무엇이 오랫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목욕물과 함께 애기까지 버리는’ 일이 칭찬 받을 까닭은 어느 세대에도 있을 수 없겠지만.

학교 경영자에게 교육적 과오가 아직 없을 수는 없다. 교수들이 교수답게 위신을 지키지 못하고, 또 교수답게 대우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다. 학생들이 너무 과격했다거나 파괴적이었다거나 ‘버르장머리가 없다’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교당국이 원하는 대로 학교 당국에서 학생을 통어하지 못하는 실정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북(以北)’이라는 미묘한 대결 세력이 호시탐탐(虎視耽耽) 침공의 틈을 노리고 있다는 현실도 가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서 현존 질서의 유지를 책임진 경찰당국이 학생들의 데모기풍에 신경과민이 된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계산에 넣는다 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학원자유를 그 근저에서 유린해야 한다는 결단이 정당하게 뒷받침될 수는 없다. 그것은 뿔을 고치다가 소를 죽인다는 속담에 해당하는 졸렬(拙劣)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민족 역사(歷史)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진정 거대한 인물의 배출을 위하여, 광명한 미래의 약속을 위하여 학원 자유는 급히 광복(光復)돼야 한다.

[장공의 한국신학대학 학장 시절]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8호] 2014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