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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6호] 추모예배 설교 - “새 하늘과 새 땅” / 박근원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4:57
조회
1826

[제16호] 장공 26주기 추모예배 설교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21:1-7)

박근원 목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추모하며 그분이 평생 보여주신‘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의 제자들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계21:3-4)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보낸 지도 벌써 26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추모와 같은 그리움은 접어 두었으면 합니다. 가족들이 하는 추모 행사는 그대로 존중하되, 기념사업회가 하는 행사는 추모보다는 그분의 꿈을 계승하는 일로 승화시켜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 반세기 전에 장공 선생님께서 우리 교단의「예식서」를 초안하셨는데, 거기의 ‘교회 예식’으로 ‘추도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그 <예식서>를 수정 증보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온 세계교회의 예식서를 송두리 채 뒤져보아도 조상을 추모하는 예식이 들어 있는 예식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소위 조상을 제사하며 추모하는 그리스도교 예식은 아무데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장공 선생님은 1915년경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필요에 의해서 마련한 조상 ‘추도식’을 그대로 안내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 후학이 다듬으면서 ‘교회예식’이 아니라 ‘가정예식’으로 분류했었습니다. 우리 교단 새 역사 25주년을 기념해서 출판한 <예식서>에서 말입니다.(1978) 우리 문화의 관혼상제 예식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다듬어 놓은 셈입니다. 세계교회 어디에도 그렇게 분류되어 있지 않았는데 임종, 입관, 발인, 하관, 추모(제사)의 내용으로 정리했던 것입니다. 바닥교회 현실에서 그런 것들이 요청되었기 때문입니다.‘추도식’ 곧 죽은 이를 위한 기도모임은 그리스도교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추도’가 아니라 ‘추모’로, 그리고 일본 문화의 유산인 ‘ㅇㅇ식(式)’이 걸려서 ‘ㅇㅇ예식’으로 통칭하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예배와 예전의 신학으로는 주일예배가 아닌 것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않아서 예배가 아니라 ‘예식’으로 통일하려고 했었으나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바로잡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장공 선생님이 시작해 놓으신 교단예식서의 맥을 이어서, 우리 교단은 새 역사 50주년을 기념하며 ‘예식서’가 아니라 <희년예배서>로 출간해 낸 일이 있습니다. 나는 먼발치에서 감수 아닌 후견인 노릇을 한 셈이지만, 교단의 후학들이 엮어낸 훌륭한 작품입니다. 여기에서는 목회예식을 믿음, 사랑, 희망예식 등으로 분류하고, 가정예식의 ‘추모예식’을 ‘희망예식’(부활신앙을 표현하는 그리스도교 예식)으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추모예식은 철저하게 가정예식인데, <희년예배서>는 우리 문화를 배경에 깔고, 우리 사회의 ‘가정의례준칙’보다는 융통성을 두어서 ‘사십일 탈상’예식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정식 추모행사는 3년까지, 교회 기관에서의 추모행사는 5년까지로 마감하여 간소화할 것을 어디엔가 장려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 까지 추모행사를 할지는 그 주체마다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만, 추모행사를 무한정 연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추모행사도 탄신 100주년을 전환점으로 마감하고, 그 후부터는 탄신 몇 주년마다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추모보다는 그분의 꿈과 비전을 미래지향적으로 수렴하고 발전시키는 기념사업 등을 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바람을 염두에 두고 이번 추모 행사에서 나누고 싶은 몇 가지 발상이 있습니다.

첫째로, 1953년 6월(장공이 53세 되던 해), 우리 교단이 예장에서 퇴출당하여 새 교단으로 새 역사를 시작하면서 그 계기를 개혁의 전환점으로 생각하고 분명한‘개혁의지’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을 소위 우리 교단의 ‘호헌사’라고 합니다. 저는 그 호헌사의 초안을 누가 썼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학술적으로 추적해서 고증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으로 봐서 저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그 초안자라고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당시에 논리적으로 그만하고 분명한 입장을 정리할 만한 분이 그분 말고는 그 누구도 없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 호헌사의 네 번째 항목에 우리 교단은 “전 세계교회와 협력병진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철저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천명한 우리 교단의 교회론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표방한 우리 교단의 ‘에큐메니칼 정신’은 겨우 그 몇 해 전인 1948년에야 W.C.C.가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결성 총회를 가진 바 있었던 바로 그 몇 해 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이 출범한 그 다음 해인 1954년에 미국 에반스톤에서 W.C.C. 제2차 총회가 열렸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 교단의 위상을 ‘에큐메니칼 교단’으로 천명한 것은 실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우리 교단은 W.C.C.의 가맹 교단이 되었고, 그 후 내내 우리 교단은 세계교회 운동에서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 교단의 에큐메니칼적인 초석을 놓았던 장공 김재준의 분명한 신학적인 입장을 지금까지 우리는 견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그분이 천명한 교회론인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이 에큐메니칼 교회론의 꽃봉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에큐메니칼 신학자로서의 장공 김재준의 평가는 그동안 다소 미흡하지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에큐메니칼 신학을 겨우 교회 일치의 신학 정도로만 평가해온 우리의 현실이 실로 부끄럽습니다. 장공은 국내 교단이나 세계교회의 지평에서-그 일치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세계를 섬기며 우주를 섬기는 그리스도교의 전망까지도 포괄하는 오늘날의 에큐메니즘을 이미 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1980년도 초에 휘호로 남기신 정의ㆍ평화ㆍ생명(正義ㆍ平和ㆍ生命)이 W.C.C. 운동의 명제(JPIC)가 되었고, 올해(2013) 한국 부산에서 열리는 제10차 총회의 주제가 된 것을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그 신앙과 신학의 견해 차이 때문에 교회일치의 접근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단이나 우리의 신학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우리의 오늘을 생각하며 장공 김재준 목사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그분을 추모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둘째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우리 교단의 ‘예식서’의 초안을 마련하신 것은 1961년으로 그분이 61세 되던 해였습니다. 만 60세로 학장직 퇴임을 정부로부터 강요받아 강제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에 우리 교단 총회가 그분을 예우한다는 차원에서 ‘교단예식서 초안’을 부탁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당시 총회 총무였던 이영민 목사의 부탁을 물리칠 수가 없으셨습니다. 저는 대학원 학생으로 그 예식서의 초안을 작성할 당시 몇 차례 심부름을 하면서 그것의 등사판 ‘초안 복사본’원고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계기로 그 초안 내용에 있었던 ‘견신례’(입교예식)를 제목으로 삼아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특권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세계교회의 예배와 예전의 맥락을 아무것도 몰랐던 부끄러움이 내게 있었습니다.

‘등사본 예식서’초안(1961)이 교단 <예식서>(1964)로 출판된 것을 한참 훗날(1978)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도 또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장공 <예식서>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장공께서 초안한 우리 교단의 <예식서>는 먼저 일본교회의 예식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미국, 캐나다 교회의 것을 참고해서 우리 실정에 맞게 번안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일본 ‘교회식’예배와 예식을 그대로 베껴 놓은 당시 한국교회의 다른 교단의 것은 번안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한국교회의 예배와 예식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식 ‘식순 예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모든 예배가 천편일률적으로 묵도로 시작해서 예배식순 하나하나를 사회하면서 진행하는 그런 일본식 예배를 지양하려는 내용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예식 집례 때 마다 하얀 장갑을 의무화 했던 소위 일본식 식순진행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예배를 ‘식순’이 아니라 ‘드라마’로, ‘시나리오’로 설명한 내용들에서 일본식 식순예배를 극복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예배개혁의 과제는 오늘에도 우리의 사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셋째로, 1979년, 장공께서 79세 되던 해(오늘 내 나이) 캐나다에서 북한을 방문할 생각으로 스위스에 있는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나 그때나 이것은 비밀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독일에 살던 후학들이 절대 거기에 가시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면 이용만 당하시고, 국내나 국제의 동지들이 하는 통일 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장고 끝에 이 거사를 단념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입북하시려고 했던지 간에, 입북하셨다 해도, 10년 뒤인 1989년에 문익환 목사님이 김일성 주석을 독대한 만큼의 역사적인 사건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분의 월북시도를 회고할 때 마다 우리 선생님도 민족의 통일 의지 열망에 물꼬를 열어보았으면 하는 속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앞뒤에 남긴 글에서도 그분의 강렬한 민족화해와 통일의 열망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의지를 장공은 우리 모두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최근에 출처 미상의 선생님의 시 한 편이 교계신문에 실렸는데, 이것이 그 당시 장공의 심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통일은 지상명령
반대할 민족이 한 사람인들 있으랴
이제 우리는 통일 방안을 세운다.
......”

우리 후학들과 우리 교단에 남겨진 이 민족화해와 통일의 꿈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를 향한 지상명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이렇게 집약해 봅니다:

­“에큐메니칼 신앙과 신학을 표방한 우리 교단과 우리 신학의 정체성 확립!”

­“오도되어 수입된 ‘식순 예배’를 극복한 민족 주체적이며 순수한 우리 신앙의 드라마로서의 예배와 예식의 개혁!”

­“우리 겨레의 평화 통일의 성취!”

이런 것들이 오늘, 2013년에, 저 옛날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받았고, 우리 스승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이 시점 우리 교단과 후학들에게 물려준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이 아닐까요. 다시금 그 분문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계21:6,7)


[2013년 1월 25일, 장공 김재준 목사 26주기 추모예배에서 설교말씀을 증언하는 박근원 목사]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6호] 2013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