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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3호] 특별기고 - “長空과 나” / 최우길 교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6 10:32
조회
707

[제13호] 특별기고

“長空과 나”

최우길 교수
(전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된 이후, 한국입국이 거부되었던 김재준 목사와, 교수직에서 파면되어 미국에 체류하시던 이우정 교수 등, 뉴욕 민주화 운동의 발판은, 당시 유신독재에 항거해서 목요기도회로 모이던 뉴욕한인교회였고, 1976년경부터 내 집인, 월세 아파트는 뉴욕을 방문하는 김재준 목사와, 한신 동문들과, 미주 각 대학의 이런 저런 동료들의 뉴욕 체류 숙소가 되었다.

1979년도에 뉴욕에 새로 구입한 3층 연립주택은, 베란다가 달려있는 2층에 김재준 목사의 방을 마련해 드렸고, 나무숲들이 우거진 뒷마당에 접해 있는 지하실은 동문이나 친구가족들의 숙박을 위한 침실과 욕조를 마련했었다.

뉴욕을 중심한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였던 뉴욕한인교회는 3․1운동의 여파로, 1921년도 조병옥 박사의 노력으로, 감리교 본부의 후원을 받아서, 뉴욕 콜럼비아대학 앞에 4층 연립 벽돌건물을 마련해서 교회로 개조한 교회다. 지하실은 사교실, 1층은 교회로 쓰이고, 2층과 3층은 숙소로 꾸며져서, 우리 귀에 익숙해 있던 이승만, 서재필 씨 등의 방문과, 김활란, 서은숙, 박마리아, 박인덕, 정일형, 이기붕, 허정, 김도연, 안익태 씨 등, 당시 뉴욕 일원에 있던 유학생과 거주민들의 독립운동 활동무대와 유학생들의 숙소가 되었다.

나는 내 집에 유숙 중이신 김재준 목사의 소일거리로 紙筆硯墨을 넉넉하게 마련해 드리고, 아침이면 일터인 뉴욕한인봉사센터로 나갔다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고, 김재준 목사께서는 늦은 아침에 일어나시면, 내 아내가 준비해 놓은 식사와 커피를 드신 후, 회의가 없는 날이면 맨해튼에 가서 영화도 보시고, 구춘회 장로 등 동문들의 일터에도 찾아가서 소일하시다가, 저녁에 집에 오시면 함께 저녁을 드신 후, 소파 팔 거리 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비스듬히 누우신 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를 상대로 밤이 늦도록 평소 마음에 새겨 두었던 생각들을 들려 주셨다.

“나는 아내한테 미안했어, 공부한답시고 경성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시부모 모시고 살림 맡아 가면서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 많이 하였지. 나는 아내에게서 매력이나 사랑의 감정은 없이 살아왔지만, 외지에 다니면서도 항상 아내에게 미안해서 고마운 생각으로 속죄했고, 평생을 한 번도 오입생각은 가져 본 적이 없었어.”

김재준 목사의 회고담은 솔직하셔서 가식이 없었고, 마음가짐은 항상 자유로워서 하늘처럼 드넓은 長空의 기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종일 일터에서 시달렸고, 퇴근 후, 집에 와도 전화로 도움을 요청해오는 교포들의 사정을 거절하지 못해서 상담에 응하다가, 밤 10시가 넘어야 김재준 목사와 마주 앉을 수는 있었으나, 피곤하고 지쳐서, 자며 깨며 제대로 듣지도 못하면서 건성으로 대답만 해 드리다가, 밤 12시경이 되면 먼저 침대로 가버리곤 했었다.

나는 그때, 김재준 목사께서 자기 일생의 중요한 행적들과 동문들에 대한 기억들을 유언처럼 낱낱이 말씀하시던, 그 소중한 내용들을 녹음해 두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었는데, 후일 凡庸記 집필을 시작하셔서, 내게 말씀하신 많은 부분들이 그 책 안에 수록되어져 있었다.

1980년, 깔끔했던 독신녀, 이우정 교수께서는 주로 뉴욕의 한신 동문, 구춘회 장로 댁과, 장로교단에서 마련한 International house 기숙사에 유숙하시면서, 목요기도회와 여러 집회에 오셔서 “여성의 한”을 주제로 강연 하셨는데, 당시 한국의 공장 여공들의 참상과, 이주여인들의 실정을 50여 분 동안 청중에게 차분하고 재미있게 말씀하셨고, 그 때 나는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워서 이우정 교수에게 경제적인 지원과 교통편의 등을 도울 수가 있었다.

서남동 목사께서 소천하시기 몇 달 전이었던 1984년 5월, 뉴욕으로 오신다고 해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었다. 뉴욕에 오신 서남동 목사의 첫 인상은 무척이나 병색이 짙어 보였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속에는 통증이 묻어 나왔었다.

“캐나다에서 박사학위 하나 받아가라고 해서, 내년 봄부터 京都대학 초빙교수로 강의를 부탁 받았는데, 앞으로 일하려면 박사형식도 하난 필요하고 해서, 그것 받으러 가는 길에 유니온 신학교 학생들의 민중신학 논문지도 부탁도 있고 해서, 그래서 뉴욕에 들리게 되었네.”

내 집에서 10여 일 머무시는 동안 두통이 심하다고 하셔서 진통제를 사서 드렸다. 그렇게 아픈 와중에서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책상머리에서 희랍어 사전을 펴가면서 두꺼운 책을 읽고 계셨고, 강연도 준비하시고, 당시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들을 내 집에 초청해서, 여러 날을 민중 신학에 관한 논문을 지도하시는 동안, 진통제의 약효였을까 아프다는 말씀이 없으셨다. 서남동 목사께서는 뉴욕에 계시는 동안, 그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억양으로 50분 동안이나 하신 강연에서도 목소리가 씩씩하고 기운이 있어서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서남동 목사의 강연 내용은, 역사적인 예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치사상으로서의 제롯당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는 내용과, 죄는 보는데 한을 발생시키는 죄의 구조악은 보지 못한다는 것,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은 아는데 강도 맞은 사람의 아픔은 모른다는 것, 예수의 죽음은 아는데, 예수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민중신학의 논리가 사회복지사상 이론과 일맥상통한 것을 느꼈었다.

나는 한신 재학시절 김재준 목사와 서남동 목사, 이 두 분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던 사람이어서, 서남동 목사께서 캐나다로 떠나실 때, 편하게 여행하실 수 있도록 용돈을 넉넉하게 드렸다.

봉투를 뜯어보시더니 놀라시면서 말했다.

“웬,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가.”

“책 좋아하시는 분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신간서적들이 무척 탐나실 터인데요.”

1958년도 내가 한신 1학년 1학기 때, 서남동 목사께서 캐나다에서 수학을 끝내고 오셔서, 학생과장으로 계셨다. 나는 서남동 학생과장을 찾아가서 내 사정을 이야기하는 동안, 서남동 목사께서 나를 대하시는 진지한 자세와, 지식인으로서의 소박하고, 순수하고, 대쪽같이 곧은 성격에, 나는 그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존경심을 느꼈었다. 그때, 서남동 학생과장은 나를 김재준 학장에게 추천해서, 나는 4년간의 학비 전액을 Dr. Scott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가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행스럽게도, 내 집에서, 교수직에서 파면되신 후 고생하시는 서남동 목사를 맞게 되어서 어려움에 처해 계시던 서남동 교수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그러나 그분은 내게 배려한 장학금에 대한 일은 까마득히 잊고 계셨고, 우리 두 사람은 여러 날 동안 한국의 민중신학사상과 사회복지사상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서남동 목사는 캐나다로 떠나시면서, 유니온 신학교 학생들의 논문지도 때문에 갖고 오신 서적들을 모두 내게 선물로 남겨 주시고, 홀가분한 여장으로 출발하셨고, 20여 일이 지난 후, 캐나다를 거쳐서 로스앤젤레스 따님 집에 왔다면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여러모로 고맙네, 곧 한국으로 돌아가겠네, 자네가 내게 주었던 약이 몸에 잘 듣던데, 그 약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버파린’이라는 약인데요, 백화점이나 식품점에서도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진통제입니다.”

나는 ‘한국의 안테나 신학’으로 불리던 서남동 목사의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청렴한 성격을 무척 존경했었고, 그것이 내게서는 竹齊, 서남동 목사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불과 며칠 후, 東京, 하네다 공항에서 쓰러져서, 휠체어에 실려서 귀국하셨다는 소식과, 3주 후, 암으로 소천 하셨다는 부고가 왔다.

나는 서남동 목사의 사망 소식을 받고, 멍청했던 내 감각을 무척 후회했었다. 그때 나에게는, 외국인 여행자가 미국 안에서 응급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미국 입국 Visa를 받은 분에게는, 미국 연방정부의 의료보장제도를 신청해서 연방정부 의료보장 기금으로 치료할 수 있는 제도적인 법규가 있어서, 나는 그런 전문지식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는데, 병색이 완연한 분에게 의사의 진찰조차 한번 권해 보지 못하고 소홀했던 내 자신을 무척 자책했었다.

김정준 목사의 사망소식은 당일인, 1981년 2월 3일 김정준 목사의 조카인 동문, 김영호 목사로부터 전해 듣고, 뉴욕동문회에서는 뉴욕에서 김정준 목사의 영결예식을 준비했다. 한국과 뉴욕이 시차는 달랐지만,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앞마당에서 거행된 김정준 목사 영결예식과는 같은 아침 시각에, 뉴욕 한신 동문들은 동문인 한진관 목사가 시무하는 퀸즈 한인교회에서, 한신 동문, 연신 동문, 성남교회 출신 교우 등, 50여 명이 참석해서 영결예식을 가진 후,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헤어졌고, 그날 식비는 성남교회 출신인 醫師 문시형 장로가 부담해 주었었다.

1987년 1월 27일 김재준 목사의 소천 소식이 왔다. 나는 한신 동문명의로 추도식을 준비했다. 뉴욕에서 준비한 추도예배에는 뉴욕 한신 동문회의 명의로 교포중심지역인 제일감리교회 강당에 추도예배 장소를 마련하고, 경로회관 서예반 어른들이 15미터가 되는“謹弔 金在俊 牧師 召天 追悼禮拜”한문현판을 만들어서 달고, 한국일보 뉴욕지사에서 확대해준 김재준 목사의 영정사진으로 추도예배장소를 장식하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목요기도회 회원들과, 뉴욕의 유지들과, 성직자들 100여 명을 초청해서 성대한 추도예배를 드렸다.

이 날 추도예배에 쓰인 영정 사진은 지금도 내 서재에 걸어두고, 아침저녁 지나치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면 옛날처럼 인사를 드리고 있다.




최우길 교수님께서 본회에 위 병풍과 함께 간단한 해설을 첨부한 아래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박정희 유신정부로부터 귀국을 거부당한 후, 뉴욕에 오시면 뉴욕의 반유신체제의 모임인〔목요기도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내 집에 유숙하시게 되었다. 나에게는 김재준 목사님이 써주신 두 폭의 병풍이 있다. 마태복음의 팔복을 한문으로 크게 쓰시고, 미국으로 추방되어 귀국하지 못하시던 자기 심정을 한글 작문으로 울분을 토해내신 이 병풍 글 속에는, 유신헌법 독재정권의 말로에 대한〔독재자의 피를 들개가 핥는다〕는 무서운 예언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