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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10) 경원 함양동 3년 – 집 생각하는 소년

범용기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30 07:59
조회
1318

[범용기] (10) 경원 함양동 3년 – 집 생각하는 소년

나는 외갓집에 2년 있는 동안 큰어머니와 큰아주머니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어머니 그리움은 그것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밤낮 어머니 생각, ‘창꼴집’의 그 소박한 전원 생각, 닭, 병아리, 돼지, 꼬마강아지, 누렁고양이 그리고 내가 가재골에서 뽑아다 심은 오리나무들, ‘미루’에서 옮겨다 심은 낙엽송 두 그루 등등 모두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텅 빈 윗방에 혼자 앉아서 초라한 책궤짝 속을 못견디게 꺼냈다 넣었다 하며 왼종일 ‘고독’을 새김질한다. 머리가 아프고 밥맛이 없고 밖에 나갈 생각도 없고 생명은 갈수록 안으로 꼬여든다. 형은 졸업식 직전에 명태드럼, 마른대구, 집에서 다린 엿 등등을 말께 싣고 와서 그 동안의 신세를 치사했다. 귀로에는 내가 말 잔등에 앉고 형님이 경마를 들었다.

집에 가서도 계속 골이 아팠다. ‘골치 아프거든 밖에 나가 바람 쐐라’하고 아버님은 역정삼아 말씀하신다. 밖에 나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에 서울 백부님이 여러 가지 신간 서적과 계몽잡지들을 보내왔다. ‘나파론 전사’(나폴레옹 전쟁사), 양계초의 ‘월남 망국사’니, 잡지 ‘야뢰’니, 그 밖에 수다한 책들이 이엄 이엄 도착했다. 나는 골치 아프면서도 그걸 읽었다. 그 때 글이란 한문에 토 단 것 같은 것이었지만, 못견디게 읽고 싶었다. 석달 넉달 계속 골치가 아팠다. 차츰 더해가서 아주 드러 누웠다. 머리를 들 수도 돌릴 수도 없다. 움직이기만 하면 뇌수가 파도처럼 두개골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밥도 못 먹는다.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셔서 밤낮 내 옆에 앉아 계셨다. 아버님은 대범하시달까 앓는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으신양 삼 껍질로 가느다란 노만 꼬신다. 비비적거리는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리는 무한한 선의 창조에서 무념무상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짜증이 나셨다. “아이는 곁에서 죽어가는데 노만 꼬면 그만이요? 무심해도 분수가 있지!” 그래도 아버님은 묵묵부답이시다. 동네에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이란 이름도 모르는 고장이다. 있다면 조작박이 한의(韓醫)일 것인데 그 분이 우리 아버님이시다. 그리고 점장이, 복술, 소위 도인(道人)이라는 정체 모를 인간이 한 두 사람이 있는 것 뿐이다.

그날따라 형님은 송상이 막측이 어느 유명하다는 도인을 찾아 갔던 모양이다. 저녁때, 돌아온 형님은 유달리 상냥했다.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글썽해서 나를 끌어 안으며 “무슨 병이 이러니?”한다. 후에 안 이야기지만 ‘도인’은 형에게 “아이는 죽은 아인 줄 아시오” 했다는 것이다. 형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죽은셈치고 이런 방도나 해 보시지요” 했단다. 그것은 오늘 밤 자정에 아이 아버지가 아이 누워 있는 방 바깥 댓돌 위에 엎드려 분향하고 애곡하고 아이 입던 의복가지를 바깥 마당에서 불사르란 것이었다 한다.

그날 밤 자정에 지시대로 했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 계셨다. 밖에서는 아버지와 형이 차부를 차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마도 밤 열한시 반쯤 됐을 것이다. 두통이 씻은 듯 없어지고 정신이 똑바로 맑아졌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으며 “엄마, 나 이제 안 아파!” 했다. 얼마 후에 밖에서 아버님 애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향내와 옷가지 타는 냄새가 스며든다. 뜨락에서 옷 태우는 불길이 컴컴한 종이창문에 마왕의 혓바닥처럼 넘실거린다. 내가 나은 것은 확실히 ‘방도’하기 적어도 반시간 전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방도’의 덕분이라고 믿으신다. 내가 시간 차이를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부터 서두른게 아니냐!”하는 논리다. 나는 그렇게 아프면서도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깨끗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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