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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8) 몇 가지 토막 이야기 – 대가족과 서당 풍경

범용기
작성자
changgong
작성일
2017-06-29 08:27
조회
1749

몇 가지 토막 이야기 – 대가족과 서당 풍경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대식구였다. 부모님이 계시고 형님 내외분, 누님 셋, 그리고 나, 후에 내 아래로 누이동생 하나가 막내로 났다. 거기에 농군 하나 두면 열 사람이다. 조카들은 후에 끼어들었지만, 누이들은 출가하는 것으로 교체된 셈이었다. 그러니 자작 자급하는 중농으로서 생계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형은 ‘글을 했다’는 축에 들지는 못했지만 보통 정도의 글에는 자유로웠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가 농사란 중노동에 시달려 삶의 절반은 짜증인 것 같았다. 아버님은 생계도 다소 도울겸, 사랑방에 초학서당을 차렸다.

서당(書堂)이란 것은 온전히 자치여서 가까운 동네 약 열가호쯤이 합의하여 학채를 분담한다. 학채란 선생에게 드리는 사례금이다.

서당에는 칠 팔세 꼬마에서 십 오륙세 십대(Teenager), 그리고 몇 사람의 이십대 청년도 섞이는 일이 있다. 청년들은 시전, 서전, 주역 등을 제 손으로 읽어 내려가는 ‘문리’(文理)난 사람들이니만큼 선생 앞에서 한번 강론을 받고서는 집으로 돌아간다.

제일 개구쟁이는 십대 아이들이다. 그러나 선생이 앉아 있는 동안 그들은 ‘죄수’다. 왼 종일 공기구멍도 없는 골방에 꿇어 앉아, 재미도 없고 뜻도 모를 한문을 덮어놓고 외운다. 옆 아이와 몰래 손장난이라도 했다가는 당장 물푸레 채찍이 어깨를 갈긴다. 그 중 나이든 아이가 접장, 즉 반장이 된다. 그는 ‘보좌감독’이다. 소변 본다는 것이 밖에 나갈 유일한 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접장에게서 외출패를 받아야 한다. 그 낌에 나가 놀까봐 그러는 것이다.

어쩌다 선생이 ‘마스도리’ 즉 마을에 볼 일이 있어 나갈라치면, 그 때에는 접장이고 뭐고 없다. 모두 뛰쳐나가 ‘앞갱변’에서 쌔름한다, 딩군다, 주먹질한다. 깨깨거리며 날뛴다. 어떤 놈들은 뒷산에 올라가 돌배 딴다, 갬 뜯는다, 야단법석이다. 숨박꼭질, 넓이 뛰기, 높이 뛰기도 한다. 그런 운동은 아이들이 저절로 아는 것이었다.

나도 언젠가 앞뜰에서 고임대를 세우고 매끈한 싸리를 가로질르고서 높이뛰기를 하다가 아버님께 들켰던 일이 있다. “이놈 다리 부러지고 싶으냐? 들어가 글이나 읽어!”하고 노려보시던 바람에 혼이 나서 도망친 일이 있다. 그랬으니 운동신경이 발달된짬이 어디 있었으랴 싶다.

서당 풍경 중 하나는 십대 개구쟁이들의 성(Sex)적 발동이다. 사춘기라서 선생만 없으면 서당은 음담패설의 시궁창이다. 대가리 큰 놈들은 자기보다 어린 것들을 껴안고 동성연애를 건다. 밤에는 한 방에 합숙하며 글 읽은 경우가 태반인데 그런 경우에는 선(線)을 넘어 행동한다. 십삼사세에 벌써 십육칠세된 아가끼와 결혼한 소년들도 있다. 그런 애들에게는 성적 호기심에서 성 경험을 캐물으며 놀려댄다.

서당은 십대 음란의 소굴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자교제에 도움이 되거나 자유결혼의 길을 여는 것도 아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여자교제는 어림도 없다. 같은 또래 여자와 길에서 마주치면 여자쪽에서 길을 비켜 돌아섰다가 간다. 총각들도 어색하고 부끄러워 감히 쳐다보지 못한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친척 아닌 타성 아가씨들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버님 사랑방 서당에 모이는 십 여명 아이들은 아침에 와서 어제 배운 글을 강 바치고 새로 몇 줄 배우고, 낮에는 글씨 쓰고, 글 짓고 오후 늦게부터는 큰 소리로 글을 읽는다. 글 읽을 때에는 몸을 앞, 뒤로 또는 좌, 우로 흔드는 것이 습성이다. 그 동안에 아버님은 밭에 나가 형의 농사일을 도운다. 나도 서당 아이의 하나와 같이 다루셨지만, 글을 배우는데는 둔하지 않아서 한 두 번 음독하고 대강 새겨주면 곧잘 기억했었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는 대여섯번 새겨줘도 모르는 둔재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님은 나를 그 애 옆에 앉아 ‘방청’하게 하고서 “모를게 있거든 저 애에게 물어라” 하셨다. 그러니까 ‘꼬마 조수’격이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순진해서 열댓살 씩 먹은 큰 애들도 곧잘 물어오곤 했다.

그런데 형은 아버님께 너무 부담이 크다면서 서당 ‘직업’에 반대했다. 사실 초학 훈장이란 속이 썩는 일이라고 들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학채 낸다는 것도 보기 딱한 일이지만, 천생 가야 ‘글’과는 인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돌대가리’ 아이들과 일년 열두달 싸우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도 ‘훈장’을 사퇴하셨다. 학부형들이 간청해서 학채도 더 드린다고 했지만 아버님은 고사하시고 정원을 가꾸고 풍월에 자적하는 여생을 지내셨다.

나도 서당 없어진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침에 아버님 앞에서 강(講)을 바치고 그날 글을 배우고, 글제나 하나 받아 놓으면 그만이다. 두세번 읽는 것으로 암송 준비는 끝나는 것이나 나머지는 왼통 자유시간이다. 소먹이 풀베는 재미에 낫들고 종일 싸다니기도 한다. ‘노성’에도 올라가고 소도 옮겨 매고 뒷산, 앞뜰, 가메골, 왼통 내 천지다. 언덕바지를 내래달릴 땐 다리에 날개 돋힌 것 같았다. 맨발로 다녀서 발바닥이 구두 같이 굳었다. 다섯째 숙부님과 함께 가재골에서 가재잡이도 했다. 거기 가재는 서중 즉 더위 먹는데 명약이라고 해서 약용으로 잡는 것이다.

아버님은 시상이 떠올라 맘에 드는 시라도 지으시면, 딴방에서 자는 꼬마(나)를 불러 자작시를 읊어 주셨다. 특히 초가을 입추에서 추석에 걸쳐 푸른 하늘, 밝은 달, 맑은 바람, 익어가는 곡식 등등의 계절이면 거의 매일 저녁 불려 갔다. 그래서 아예 옆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노라니 나도 풍월을 알 것 같고 풍월의 감흥이 제법 느끼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한시 짓는 재주는 없었다.

그럭저럭 나도 나이가 일곱 여덟살 되어 갔다. 통감은 이권까지 밖에 읽지 않았고 직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소위 사서를 읽었다. 어린애가 그런 고전을 알고 읽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는 것 같은 기분이기는 했다. 당판으로 논어와 맹자는 각기 일곱권씩이었는데 다 떼면 일곱권을 묶어 선생 앞에 드리고 꿇어 앉아 첫권부터 마지막권까지 암송하는 것이었다. 막히는데 없이 물 흐르듯 내려가면 근엄한 아버님도 만족한 미소를 띠우곤 하셨다. 맹자는 아홉 살 때 통독했다. 그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장이었다.

건장한 소년으로 열 살까지 집에 있었다. 쉬운 김도 매고, 땔 나무도 했다. 창꼴 막바지에 우리 산이 있어서 형은 거기서 하루에 한 수레씩 땔나무를 해 왔다. 아버님은 뒷동산에서 한 이년씩 자란 애숭이 가둑나무를 낫으로 베고 계셨다. 나도 아버님과 같이 그 일을 했다. 일이라기보다 장난삼아 재미로 한 것이다. 하루는 낫이 빗나가 내 발목에 걸린 것을 모르고 나무 베듯 잡아 당겼다. 그 결과는 뻔하다. 뼈까지 낫날이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아픈 줄 몰랐다. 놀라서 나는 앙앙 울었다. 아버님이 저 편에서 달려 오셔서 적삼 고름을 채서 동여매고 부둥켜 안고 비탈을 내려오셨다. 우리 집에서는 전에 한약국을 했었기에 그 때까지 천정과 벽에 한약 주머니가 배꾹 매달려 있었다. 곧 석번인가를 갈아 붙이고 싸맸다. 그러나 균이 들어 곪아서 여름내내 나는 절며 다녔다. 초가을 청명한 공기 속에서야 새 살이 자라 아물었다.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내가 아버님께 안겨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요 나중이었다.

형수님은 김봉사 ‘내용’(내鎔)씨 따님이다. 김봉사란 분은 글 잘하고 풍류와 멋이 몸에 밴 어른이었다. 처음에 어느 능참봉으로 계시다가 ‘봉사’로 승진했다. 말끔한 미남으로서 어느 좌석에서나 재담과 주흥과 시와 담론이 판을 치곤 하셨다. 형수님도 친아버님을 닮아서 살결이 말쑥한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성우에 못잖게 ‘말’ 흉내 내셨고 재치있게 화제를 돌리곤 했다. 다산이셨지만 삼남 일녀 밖에 남기지 못하셨다. 내 큰 누님은 열 여섯에 열 세 살짜리 총각 김인수 한테 시집 갔다. 서울가서 훈련원 판관으로 있었다는 김판관 손부가 된 것이다. 모두 아버님이 만든 운명이다. 둘째 누님은 박춘익이란 좀 머리가 모자라는 청년에게 주어졌는데 스물 네 살 때 독감이 폐렴으로 번져 일찍 가셨다. 셋째 누님도 열일곱살에 엄씨네 꼬마(엄충섭)와 결혼이라고 했다. 모두 아버님의 독단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불평이 있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구습에서 헤어날 힘이 없었고 헤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빨리 장가들여 사내자식 많이 낳아, 일손이 늘면 팔자 고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몇해 후에 나는 향동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했다지만, 이런 사회관습에 도전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누님들은 내게 기대를 걸고 끔찍이 위해 주었다. 마치 내가 새벽을 불러올 단 하나의 샛별이나 되는 것 같이 드높여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들은 단오날 씨름판에 가서 사위감을 고르고, 그네 뛰는 처녀들 보고 며느리감을 선본다. 그리고서는 타성 집안에 출가한 친척 여인의 중매로 결혼이 상담된다. 그 다음에 남자의 가장이 아가씨집 가장을 예방하여 정중한 청혼을 한다. 승낙이 되면 그것이 약혼이다. “우리 아이는 미거해서……”하면 그것이 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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